전체 글 73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김욱동 번역,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저명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이 우리는 소설을 왜 읽는가에 대해 답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그 까닭은 이야기는 금기에 의해 억압된 인간의 욕망을 변형시켜 드러낸 것이어서 사람들의 한없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욕망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소설은 그 어떤 다른 예술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그 욕망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설에는 다양한 욕망들이 충돌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에는 세계를 자기 식으로 변모시키려고 하는 '소설가의 욕망'이 있고, 소설가의 욕망에 따라, 혹은 그 욕망..

에리히 캐스트너/김서정 번역, 5월35일, 시공주니어

상상력을 찾아서 장난스러운 삼촌 링겔후트와 수학을 잘하는 조카 콘라트는 말하는 검은 말 네그로카발로와 함께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콘라트가 남태평양에 대해서 작문을 해 오라는 숙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한테는 상상력이 없다고 단정하고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 모두한테 그 과제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뛰어난 수학자이자 작가이기도 했던 소피야 코발레프스카야(1850~1891)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붙같이 화를 냈을 법합니다. 그는 “수학이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없었던 이들은 수학을 산술과 혼동하며 건조하고 메마른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사실 가장 큰 상상력을 요구하는 건 과학이야. (중략) 영혼의 시인이 되지 않고서는 수학자가 될 수 없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사라 ..

일상을 노래하는 시쓰기

(가) 넘어진 날 친구들과 뛰어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 콰당! 사람들이 자꾸 나를 힐끔힐끔 쳐다 보는 것 같다. 손과 얼굴은 발개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숨어버리고 싶은 날이다. (2학년 학생이 쓴 동시 '넘어진 날' 전문) (나) 비 비가 온다. 오늘은 차를 타고 학교에 가야 한다. 빗방울이 우리 차를 톡톡, 친다. 사람들의 우산에는 빗방울이 송글송글 아이들이 노란색 우비를 입고 첨벙첨벙 꼭 물장구 치는 병아리 같다. 마침 비가 그쳤다. 하늘에는 알록달록 예쁜 무지개가 떴다. (2학년 학생이 쓴 동시 '비' 전문) 아이들이 쓴 동시를 통해 평소 일상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또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게 되곤 합니다. (가)는 친구들과 함께 뛰어가다 넘어졌을 ..

시로 쓰는 독서감상문

팔방미인 반짝이 반쪽반쪽 반쪽이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든 반쪽이네 하지만.... 커다란 나무와 바위를 들고 혼자서 호랑이 다섯 마리를 잡지 많은 사람들이 지키는 부잣집에 들어가 딸을 업고 나오고 영감에게는 장기 3연승! 형들의 잘못을 3번이나 덮어 줄 만큼 착하기도 하지. 몸은 남들보다 반쪽이지만 능력은 남들보다 한수 위 그래서 반쪽이는 반짝반짝 팔방미인 반짝이 (2학년 학생의 시 '팔방미인 반짝이' 전문) 수업에서 동화 '반쪽이'를 함께 읽은 뒤에 한 학생이 그 책을 주제로 동시를 써 왔습니다. 그 전 수업에서 책을 읽고도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해줬더니 용케 그걸 기억했다가 써 온 시였습니다. 보통 아이들이 시를 써 오면 수업 시간에 함께 읽고 시에 관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넌 왜 이렇게 표현했니..

박홍순, 거꾸로 보는 이솝 우화, 마로니에북스

읽기는 곧 쓰기다 '토끼와 거북이', '여우와 신포도', '북풍과 해님', '양치기 소년과 늑대' 등은 어린 시절부터 흔히 들어온 이솝의 우화입니다. 우화가 '삶의 지혜와 교훈을 재미있는 동물 이야기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보니 어린 학생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많이 읽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솝의 '우화집'을 직접 읽어보면 조금은 당황스런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교훈적 이야기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냉혹할 정도로 현실적이거나 냉소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른생활'용 우화들은 대개 이솝이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에서 빅토리아 시대에 도덕주의자들이 이솝 우화를 번역 출판하면서 기준에 맞지 않는 이..

신연호, 문화재로 배우는 근대 이야기, 주니어김영사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 "지난 주에 고조선을 배웠는데 이번 주에 고구려가 멸망했어요." "고려는 이미 멸망했고 벌써 조선을 배우고 있어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습니다. 알고 보니 5학년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1년 가까이 저와 한국사를 공부한 아이들은 널뛰기 하듯 대충대충 배우고 넘어가는 역사 수업이 영 어처구니 없어 보였나 봅니다. 그나마 미리 역사를 공부한 아이들은 따라가기 수월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그마저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학교 수업이 부실하니 아이들은 유튜브에서 설민석이나 최태성 같은 유명 역사 강사들의 수업을 들으며 역사를 배우거나 사설 학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유튜브로 역사를 배운 아이들은 ..

이규희,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보림

호랑이는 무엇이었을까? 을 쓴 한국계 여성 작가 태 켈러는 어릴 적 할머니로부터 호랑이가 등장하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한국의 전래 동화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 넣어 창작한 이 책으로 그녀는 2021년 미국의 아동문학상인 뉴베리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그녀의 문화적 정체성이자 해방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습니다. 태 켈러의 사례는 왜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같은 전래동화를 반복해서 읽혀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간직된 이야기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함께 자라나 그 아이의 영혼을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뿌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

(융합수업)기차는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 반 고흐의 그림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1890)에서 마차는 화면 중앙에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화면 저 멀리 곧게 뻗은 철로 위로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기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기차는 마치 미래를 향해 가듯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고, 마차는 그에 역행하듯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마차와 기차라는 이동수단은 각각 전통과 근대를 상징합니다. 고흐는 기차에 의해 익숙한 풍경의 모습이 변화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던 듯합니다. 동일한 풍경이라도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위치에서 바라본 모습과 저 멀리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모습이 결코 동일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윌리엄 터너의 그림 '비, 증기..

미디어 교육 2024.10.13

(융합수업)거울아, 거울아

수학을 잘 하면 이과이고, 국어를 잘 하면 문과인가? 한국 교육의 특징 중 하나는 이과와 문과를 구분하고, 각 분야에 재능있는 학생을 길러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1959년 영국의 과학자이자 소설가였던 찰스 P. 스노우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리드 강연에서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이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인 문화 간의 단절은 문화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 발전에도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고 강조했습니다.(C.P.스노우/오영환 번역, 두 문화, 사이언스북스) 이후 이 두 분야를 연결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했고, 한때 융합이나 통섭과 같은 단어들이 우리 사회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수학과 ..

미디어 교육 2024.10.12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황현산 번역, 어린 왕자, 열린책들

보아뱀은 왜 코끼리를 삼켰을까? 생텍쥐페리의 (1931)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이 등장합니다. 마치 모자처럼 보인다고 그대로 대답을 했다간 '트럼프 이야기, 골프 이야기, 정치 이야기, 넥타이 이야기'나 좋아하는 어른이라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답을 외워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대답을 해도 상상력이 풍부한 천진난만한 아이 같다는 평가를 듣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암기한 지식을 반복하는 일은 창의성과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창의력과 순수성을 측정하는 시험지가 된 듯한 생텍쥐페리의 그 그림은 사실상 어른들을 아포리아(aporia)에 빠뜨리는 함정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어린 아이들이 이런 곤경을 회피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책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