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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만년샤쓰, 보물창고

100년 전 어린이들은 어떻게 살았나 고등보통학교(일제 강점기에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에 다니는 한창남은 반에서 제일 인기 좋은 쾌활한 소년이었습니다. 우스운 말도 잘할 뿐 아니라 비행가 같이 시원스럽고 유쾌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비행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 해어진 모자나 궁둥이에 조각조각 기워진 양복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집안이 구차한 것도 같지만 그의 집안 사정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십 리 밖에서 학교를 다녀서 그가 정확히 어디에 사는 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창남이는 자기 집안일이나 신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살이 터지게 추운 날 체조 선생님은 양복저고리를 벗고 셔츠만 입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까지 벗었는데 창남이만 옷..

윌리엄 셰익스피어/도해자 번역, 로미오와 줄리엣, 열린책들

왜 을 읽어야 할까 셰익스피어의 은 '엇갈린 비운의 연인(star crossed lovers)'의 대명사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명성과 달리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인 , , , 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비교적 초기에 씌어진 이 작품은 비극적 완결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카풀렛 가문과 문테규 가문이 오랜 원수로 나오지만 그 이유는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로미오가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줄리엣의 사촌 오빠 티볼트를 죽이거나, 로렌스 신부에게 임무를 부여받은 존 신부가 갑작스럽게 발생한 전염병으로 인해 로미오에게 편지를 전달하지 못하게 되는 등 우연적 요소에 의해 사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인공 로미오와 줄리..

한윤섭, 해리엇, 문학동네

인간은 다윈 이래로 진화해 왔을까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1835년 에콰도르 서부 연안의 갈라파고스 제도를 탐사하고 돌아올 때 거북이 세 마리를 비글호에 실었습니다. 이 세 마리 거북이들 중 마지막 생존자인 거북이는 2006년 6월 23일 호주의 한 동물원에서 176세로 숨졌습니다. '해리엇'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이 거북이는 세계 최장수 동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었습니다. 자신을 고향에서 떠나게 한 사람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거북이는 그 긴 시간 동안 과연 인간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처럼 붙잡혀서 동물원에 갇힌 다른 동물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요? 그런데 막상 소설을 읽어 보면 '해리엇'이라는 제목과 달리 아기 원숭이 찰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그의 시선에 따라 해리엇의 생애 ..

패트리샤 폴라코/서애경 번역, 고맙습니다 선생님, 아이세움

트리샤는 왜 지식의 달콤함을 느낄 수 없었을까 트리샤는 책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학교 선생님인 엄마는 밤마다 트리샤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늘 벽난로 옆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트리샤가 일곱 살이 되던 날에는 온가족이 모여 특별한 의식도 치뤘습니다. 할아버지는 꿀 한 국자를 퍼서 책 표지 위에 골고루 끼얹은 뒤 트리샤에게 찍어 먹도록 했습니다. 그리곤 식구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맞다, 지식의 맛은 달콤하단다. 하지만 지식은 그 꿀을 만드는 벌과 같은 거야. 너도 이 책장을 넘기면서 지식을 쫓아가야 할 거야!" 그러나 큰 기대를 안고 시작된 트리샤의 학교 생활은 악몽과 다름없었습니다. 트리샤에게 글자를 이해할 수 없는 암호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미야자와 겐지/햇살과나무꾼 번역, 첼로 켜는 고슈

고슈는 어떻게 훌륭한 첼로 연주자가 되었나 고슈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샛별 음악단'에 소속된 첼로 연주자입니다. 그런데 실력이 동료 연주자들 가운데 가장 형편없었기 때문에 늘 지휘자한테 꾸지람을 듣기 일쑤입니다. 다들 곧 있을 마을 음악회에서 연주할 베토벤 교향곡 6번 연습에 한창입니다. 지휘자는 사사건건 고슈의 연주에 트집을 잡습니다. 고슈의 첼로 연주는 박자와 음정이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다 못한 지휘자는 마침내 그에게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고슈, 자넨 정말 문제야! 표정이 아예 없어. 분노고 기쁨이고 하나도 표현하지 못하잖아! 게다가 다른 악기와 호흡이 전혀 안 맞는단 말일세. 항상 자네 혼자 신발끈을 질질 끌며 뒤꽁무니를 따라오는 것 같다구." 고슈는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까요..

잭 런던/햇살과나무꾼 번역, 야성의 부름, 시공주니어

벅의 변화는 성장인가, 퇴화인가 청소년기에 읽게 되는 수많은 소설들은 성장소설의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수많은 역경과 모험을 겪게 되고, 그 결과 처음과는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과정은 A에서 A'로의 변화로 공식화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A가 A'로 변했다고 보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 이미 A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잭 런던의 은 완벽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보살핌 속에서 안온한 삶을 살던 개가 우연한 계기로 야생의 자연에 내던져지면서 점차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야생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가 늑대로 변한 것을 과연 '성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벅의..

박운규, 버리데기, 시공주니어

버리데기의 이름은 왜 버리데기인가? 자신의 재산과 벼슬을 물려줄 아들을 간절히 원하던 아버지는 내리 딸 여섯을 낳고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온갖 정성을 들인 끝에 부인은 청룡과 황룡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막힌 태몽까지 꾸고 일곱 번째 아이를 잉태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태어난 그 일곱 번째 아이마저 딸이었습니다. 몹시 화가 난 아버지는 갓 태어난 핏덩이를 밖에 내다 버리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은 '버리데기'가 되었습니다. 버리데기는 엄밀히 말해 이름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부엌데기, 새침데기, 푼수데기 등과 같은 단어를 만드는데 사용된 접미사 '-데기'는 '그와 관련한 성질이나 속성을 갖춘 사람'을 얕잡는 뜻을 더하는 보통명사를 형성할 뿐 홍길동과 같은 고유명사..

찰스 디킨스/왕은철 번역, 위대한 유산, 푸른숲주니어

인물 관계를 알면 소설이 한눈에 보인다 찰스 디킨스의 처럼 분량이 제법 많고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단순히 줄거리를 요약한다고 해서 소설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요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파악하게 되면 소설의 주제나 작가의 의도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사건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배열한 줄거리와 달리 인물들의 관계망은 소설의 전체 얼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 핍은 부모님을 일찍 여읜 탓에 그들에 대한 기억조차 갖고 있지 못한 고아 소년입니다. 그는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누나와 그녀의 남편인 대장장이 조의 보살핌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갑니다. 주목할 점은 누나는 핍을 모질게 대하는 반면, 매부 조는 ..

허균, 홍길동전

의 저자는 누가인가 '홍길동'은 공문서의 견본용 이름으로 널리 사용될 만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의 주인공은 조선 광해군 때 활동했던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인 에서 유래한다고 배웠습니다. '홍길동'이란 이름이 이토록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서자라는 신분의 한계를 딛고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원한 '의적'이었다는 사실도 포함될 것입니다. 영국의 '로빈 후드'나 중국의 '수호지' 같이 부패한 정치 권력과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도둑' 이야기는 백성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서 언제나 큰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홍길동전'의 주인공은 허구의 창작물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그는 1500년(연산군 6년) 무..

현진건, 운수 좋은 날, 사피엔스21

김첨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1924)은 일제 강점기 하층민의 비극적 삶을 탁월한 기법으로 묘사해서 전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한국의 대표적 단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인력거꾼 김첨지라고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나이 많은 남자를 낮춰 부르는 호칭'인 첨지라 불릴 뿐 그의 실명이 알려진 바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김첨지는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조선의 민초들을 대표하는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아야 했던 그 인물에게 정당한 이름과 구체적 얼굴을 되찾아주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김첨지는 동소문(현재의 혜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