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5학년

한윤섭, 해리엇, 문학동네

ddolappa72 2025. 5. 19. 09:33

 

인간은 다윈 이래로 진화해 왔을까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1835년 에콰도르 서부 연안의 갈라파고스 제도를 탐사하고 돌아올 때 거북이 세 마리를 비글호에 실었습니다. 이 세 마리 거북이들 중 마지막 생존자인 거북이는 2006년 6월 23일 호주의 한 동물원에서 176세로 숨졌습니다. '해리엇'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이 거북이는 세계 최장수 동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었습니다. 자신을 고향에서 떠나게 한 사람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거북이는 그 긴 시간 동안 과연 인간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처럼 붙잡혀서 동물원에 갇힌 다른 동물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요?

그런데 막상 소설을 읽어 보면 '해리엇'이라는 제목과 달리 아기 원숭이 찰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그의 시선에 따라 해리엇의 생애 마지막 5년이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비한 아우라를 내뿜는 해리엇이 실은 다윈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소설 말미에 그의 입을 통해 밝혀 지게 됩니다. 작가는 이런 구성을 통해 인간들에 의해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해리엇의 운명이 아기 원숭이 찰리에게서 반복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찰리를 176년 전 비글호에 실린 어린 해리엇으로 보게 되면, 그 긴 시간 동안 인간은 아무런 반성 없이 자연을 약탈하고 착취해 왔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찰리와 해리엇은 인간에 대해서도 유사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찰리는 너무 어려서 동물원에 보내지는 대신 인간과 함께 잠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찰리는 인간과 함께 살게 된 첫날 자신을 억지로 목욕시키려는 인간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싫은 내색을 했지만 도리어 아이와 엄마는 그런 찰리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기만 했습니다. 찰리는 자신이 물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아이를 쳐다보았지만 그럴수록 아이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찰리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광경이 동물의 시점에서 다시 서술되면서 인간의 감추어진 폭력성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이미 갈라파고스에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한 해리엇은 "사람이 동물과 가장 달랐던 점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갈파했습니다.

작가 한윤섭은 찰스 다윈과 연관된 거북이 해리엇을 통해 과연 인간은 지난 200여 년간 정말로 진화했는가 되묻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발전한 과학 기술의 힘으로 자연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누군가에 고통을 주면서도 웃을 수 있는' 잔혹한 인간 본성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을 발전이나 진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친구다

개코원숭이 스미스는 인간의 손에 길러진 자바원숭이 찰리에게 끊임없이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넌 동물들을 배신하고 사람과 살았잖아! 넌 우리와 살 자격이 없어." 스미스는 인간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연약한 찰리에게 투사하고 그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마다 어디선가 해리엇이 엉금엉금 나타나 스미스를 막아서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친구다."

"이곳의 동물들은 모두 친구다. 그건 이곳이 숲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감시를 받고 길들여진 우리가 서로를 미워한다면 그건 너무 불행한 일이다. 지금 내가 너희 앞에서 평온하게 죽어 가듯 너희도 언젠가는 삶을 마칠 것이다. 그 시간이 올 때까지 이곳은 따뜻해야만 한다."

해리엇의 말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지구라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종류의 생명체들은 지구상에 최초로 등장한 생명 세포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분화한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들은 조상을 찾아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공통 조상으로 수렴될 수 있으며,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개나 고양이를 비롯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과 형제자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망각한 채 인간이 동물보다 잘났다고 여기고 오만하게 구는 것은 과도한 인간중심주의의 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동물들과 구분짓는 인간만의 고유성을 찾기 위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인간과 동물 간의 유사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래 전부터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짓는 근거로 도구, 언어, 웃음 등이 거론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침팬지 같은 유인원이나 야생 원숭이도 땅 속에 있는 먹이를 캐거나 바위 틈을 조사할 때 돌멩이나 나무 막대기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래들은 인간의 언어만큼 효율적이고 체계화된 규칙에 따라 의사소통을 하며 심지어 그들 사이에 유행하는 노래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동종의 구성원을 죽이는 유일한 '살인 유인원'이라고 주장되기도 했지만, 제인 구달은 침팬지 무들 사이의 전쟁을 관찰해 보고한 바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 거장 프랑수아 라블레는 '웃음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했으나 이것은 자기들끼리 장난치며 노는 영장류들의 웃음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은 동물심리학 분야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 때마 줄어들고 있으며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지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장 프랑수아 마르미옹 외/김지현 번역, 인간은 왜 동물보다 잘났다고 착각할까, 북다)

 

생존 당시 해리엇의 실제 모습



해리엇이 마지막으로 전하고자 했던 것

찰리는 우연히 동물원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손에 넣게 되고, 그 광경을 목격한 스미스는 어떻게든 그 열쇠를 빼앗을 궁리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미스의 아기 원숭이가 사람이 던져 준 사탕을 먹다가 목에 걸려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찰리는 고민에 빠집니다. 찰리는 생명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흰 너구리 올드를 개코원숭이의 우리에 데려가면 스미스의 아기를 살릴 수 있지만, 그토록 열쇠를 원하던 스미스가 자신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워 망설이는 찰리에게 해리엇은 이렇게 말합니다. "찰리, 네가 어떤 판단을 해도 난 널 친구로 생각할 거야." 해리엇의 말에도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찰리는 마침내 용기를 냅니다. 찰리는 올드와 함께 열쇠를 이용해 개코원숭이의 우리에 들어가 꺼져 가는 어린 목숨을 살려 냅니다. 미움과 증오를 이기는 것은 상대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뿐임을 찰리는 몸소 경험하게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소심한 아기 원숭이였던 찰리는 이제 용감하고 지혜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죽기 전 고향인 갈라파고스에 꼭 가고 싶다는 해리엇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줄 수 있을 만큼 찰리는 성장했습니다. 동물원의 모든 동물들은 힘을 모아 찰리와 함께 해리엇을 데리고 동물원을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리엇은 왜 갈라파고스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까요?

"난 한 번도 갈라파고스를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리운 우리의 땅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비글호에서 사람의 손에 끌려가기 전 보았던 그 늙은 거북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난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갈라파고스의 동물들에게 내가 본 것을 모두 전해 줘야 하는 일을 하지 못했지. 그것이 내가 살아온 이유였고 내가 죽지 못하는 이유였는데. 이제 모든 것이 끝날 시간이 되어 버렸다. 바다를 만나면 바다가 갈라파고스로 나를 데려갈 거라 믿었는데 그런 기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다시는 갈라파고스로 돌아갈 수 없겠지.... "

해리엇은 떠나온 고향의 동물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마지막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해리엇은 마치 오랜 시간 인간을 관찰하고 그들의 행태를 목격하며 엉금엉금 사색하며 축적한 지혜만이 섬의 동물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아마도 동물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인간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해리엇이 전하고자 하는 그 지혜가 인간과 동물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현재의 동물들이 수 만 년 전 조상들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반면, 인간은 조상들이 물려준 그 지혜 덕택에 조금이나마 앞으로 전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요? 선조들이 들려준 이야기나 그들이 물려준 기록들을 차츰차츰 쌓아올리며 인간은 순환적 시간 속에 살아가는 동물들과 달리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 속에 살게 된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지식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지만 지혜는 그를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해리엇이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가진 자를 우쭐하게 만드는 보잘 것 없는 지식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지혜였을 것입니다. 그런 지혜만이 서로 다른 종들의 동물들을 친구로 만들어 주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