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없는 그림책
데이비드 위즈너는 뉴베리 상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아동문학상인 칼데콧상을 여섯 번이나 수상할 만큼 뛰어난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그는 26년간 단 한 줄의 글도 쓰여있지 않은 그림책을 선보였지만 매번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이며 독자들을 압도해 왔습니다. 비록 아무런 글자도 없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충격적일 만큼 초현실적인 그의 그림책을 넘기다 보면 머리 속에서 작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위즈너의 작품은 진정한 의미의 '그림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글 없는 그림책을 읽을 때는 아동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보도록 권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다음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질문해서 이미지를 문자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동은 창의성과 추론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 허물기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당환한 듯한 모습을 한 거대한 소라게와 그 뒤에서 소라게를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눈이 보입니다.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한 소년이 모래 사장에 엎드려 돋보기로 소라게를 바라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소라게 관찰이 시들해진 소년은 삽과 양동이를 들고 또다른 무언가를 찾으러 바닷가로 갔습니다. 꽃게를 발견하고 옆드려 장난을 치던 소년은 밀려오는 커다란 파도에 그만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파도가 밀려간 자리에는 해초류와 따개비가 잔뜩 붙은 낡은 카메라 한대가 남아 있었습니다.
소년은 카메라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해변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카메라를 뒤적이다 필름 한 통을 발견한 소년은 사진관으로 달려가 필름을 인화했습니다. 긴 기다림 끝에 받아본 사진은 놀라운 광경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른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고 있는 로봇 물고기, 깊은 바다속에서 쇼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문어, 물고기들을 태우고 하늘을 날고 있는 기구가 된 복어, 등에 온갖 소라집을 이고 유유자적 헤엄을 치고 있는 거북이 등등.
우연히 발견된 카메라와 사진은 소년과 함께 독자들을 환상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카메라와 사진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매체라 여겼던 독자의 믿음과 기대가 보기 좋게 어긋나며 무엇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런 인식의 혼란과 당혹이 일으키는 균열을 틈타서 재빠르게 판타지의 세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저런 신비한 카메라와 사진에 찍힌 기묘한 세상이 정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마구 샘솟기 시작합니다.

사진 속엔 또다른 사진이 있고
소년은 사진 한 장을 들고 수줍고 웃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앞서 봤던 다른 사진들과 달리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던 소년은 문득 돋보기로 사진 속 소녀가 들고 있는 사진을 확대해 봅니다. 그 사진 속에는 또 다른 소년이 사진을 들고 있고, 그 사진 속 소년이 든 사진 속에는 또 다른 소녀가 사진을 들고 있고, 이런 식으로 사진 속 사진들은 인형 안에 또 다른 인형을 품고 있는 러시아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무한증식하고 있었습니다.
현미경까지 동원해서 사진 속 사진을 확대해 보던 소년은 마침내 그 사진이 먼 옛날부터 계속 이어져온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래 전 의상을 입은 소년의 흑백 사진까지 찍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래 전부터 카메라는 전세계를 떠돌며 수많은 아이들이 기념 활영을 해오며 지금껏 시간을 이어온 것이었습니다.
카메라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매체이기도 합니다. 시간과 국적을 초월해서 아이들은 카메라를 통해 서로 연결되며 오랜 시간 함께 해 왔던 것입니다. 이제 소년이 할 일은 오랜 시간 이어져온 그 놀이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년은 인화한 사진을 들고 카메라로 인증 사진을 찍은 후 다시 카메라를 바다로 돌려주게 됩니다. 바다를 떠돌던 카메라는 또 다른 아이에게 발견된 후 즐거운 유희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게 될 것입니다.

메타픽션으로서 <사진 상자>
이 작품은 작가 위즈너가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일종의 메타픽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비한 카메라는 마치 병속에 든 편지처럼 정처 없이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우연히 아이들에 의해 발견됩니다. 카메라 속에 담긴 사진의 메시지를 읽어낸 아이들은 이심전심의 심정으로 다른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전달합니다.
위즈너의 작품 역시 상상의 세계를 떠도는 병속 편지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아무런 글이 씌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그 안에는 아이들이 읽어낼 수 있는 암호와 같은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아이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뛰어난 수신기를 갖고 있습니다. 상상력이라는 수신기를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진 속에 아이들의 모습만 담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아이들만이 작가가 침묵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상상의 세계와 접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도 위즈너의 작품은 세상 어딘가를 정처없이 떠돌고 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메시지를 수신한 후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다른 아이에게 전달해줄 아이를 간절하게 찾으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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