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5학년 11

송미경, 돌 씹어먹는 아이, 문학동네

부조리한 현실과 싸우는 무기고로서 환상의 세계 '혀를 사 왔지'의 주인공 시원은 일 년에 한번, 삼 일간 열리는 '무엇이든 시장'에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회색 고양이나 원숭이 같은 동물들이 웃고 있는 눈썹이나 원숭이 꼬리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꼬리를 팔고 있습니다. 몇 번을 망설이다 시원이는 어린 당나귀에게서 혀를 사기로 결정합니다. 왜 하필 혀를 샀느냐고요? 그에게는 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펼쳐지는 이런 기괴하고 낯선 광경에 잠시 당황하게 됩니다. 달리나 마그리트와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나 봤을 법한 이질적이고 당황스런 상상의 세계를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에서 마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면 동화의 세계만큼 초현실적인 상상력이 강력하게 요청되는 곳도 없는 ..

이청준, 옹고집 타령, 문학과지성사

옹고집은 왜 고집이 셀까 남의 말은 아무리 옳은 것이어도 도통 들으려 하지 않고 제멋대로인 고집쟁이를 흔히 옹고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답답한 벽창호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옹고집의 진짜 문제점은 단순히 그가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부자로 살면서도 어려운 이웃이나 가엾은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따뜻한 인정을 베푼 적이 없을 만큼 인색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부리는 일꾼들에게 몇 년씩 새경도 안 주고 공짜로 부려먹고,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도 혼수 보내기가 아까워 공짜 시집 보낼 곳만 찾다가 혼기를 놓쳐버리기도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살림 절약을 핑계로 이미 여든 살이 넘은데다 병까지 들어 누운 늙은 어머니에게 약다운 약 한 ..

찰스 디킨스/김영진 번역, 크리스마스 캐럴, 비룡소

배경 지식을 꼭 알 필요가 있을까 구두쇠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유령들을 만나 새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는 많은 아이들이 직접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책을 수업 교재로 만들 때는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과 실제로 책을 읽게 되었을 때 얻게 되는 감상이 다르다는 것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유튜브나 애니메이션을 통해 알고 있는 것과 원작을 독서해서 얻게 되는 것이 차이가 없다면 굳이 책을 읽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지나치게 전문적으로 소개해서도 곤란합니다. 디킨스가 살았던 19세기는 산업혁명으로 이제 막 발흥한 초기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로 자본가들의 탐욕과 노동자들에 대한 착..

박효미, 박씨전, 웅진주니어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병자호란(1636) 이후에 씌어진 은 과 더불어 치욕스런 전쟁의 패배를 상상의 공간에서 이겨내려는 당시 민중들의 소망이 투영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작자 미상의 이 작품은 고전 소설에서는 드물게 박씨라는 여성 영웅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박씨뿐만 아니라 그녀의 하녀 계화나, 청나라 자객 기홍대 등 뛰어난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가 여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합니다. 흔히 병자호란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린 수치스런 장면으로 기억될 뿐 5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의 여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노예 시장에 팔렸다는 사실은 드물게 언급되어 왔습니다. 목숨을 걸고 겨우 탈출한 조..

나시키 가호/김미란 번역, 서쪽 마녀가 죽었다, 비룡소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 나시키 가호의 를 읽고 난 후 문득 수 십 년 전에 돌아 가신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정확히는 할머니가 해주시던 박대찜이 떠올랐습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물만 붓고 쪄냈는데도 윤기가 좔좔도는 빛깔이며 비린내 하나 없이 정갈하면서도 고소한 맛은 입짧은 편식쟁이 아이였던 제 입맛에도 잘 맞았습니다. 그 맛이 그리워 몇 년 전 근처 식당에서 박대찜을 사 먹었지만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셨던 추억 속 그 맛은 아니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마이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문득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된장국, 손수 만든 반족에 양송이와 파프리카, 베이컨을 넣은 키슈, 그리고 둘이 함께 만들었던 '새콤달콤한 숲의 맛'을 닮은 산딸기잼을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의 모든 ..

신연호, 문화재로 배우는 근대 이야기, 주니어김영사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 "지난 주에 고조선을 배웠는데 이번 주에 고구려가 멸망했어요." "고려는 이미 멸망했고 벌써 조선을 배우고 있어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습니다. 알고 보니 5학년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1년 가까이 저와 한국사를 공부한 아이들은 널뛰기 하듯 대충대충 배우고 넘어가는 역사 수업이 영 어처구니 없어 보였나 봅니다. 그나마 미리 역사를 공부한 아이들은 따라가기 수월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그마저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학교 수업이 부실하니 아이들은 유튜브에서 설민석이나 최태성 같은 유명 역사 강사들의 수업을 들으며 역사를 배우거나 사설 학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유튜브로 역사를 배운 아이들은 ..

J.M.바스콘셀로스/박동원 번역,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동녘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 책을 처음 일고 대성통곡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교 후 아무도 없던 집 마루에 엎드려 무심코 집어든 책을 펼치기 전까지 저는 활자가 날카롭고 뾰족한 무엇이 되어 제 가슴을 그리 후벼파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던 눈물을 훔치고 다시 책을 펼치고 또 다시 울다가 다시 책을 펼치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책읽기를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 광경을 누군가 지켜보았더라면 인상 깊은 추억으로 간직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훗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책을 다시 읽으며 제가 그 당시 왜 그토록 대성통곡을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제제처럼 조금은 조숙했던 저..

카를로 콜로디/김홍래 번역, 피노키오, 시공주니어

피노키오는 정말 구재불능의 거짓말쟁이인가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는 워낙 유명하지만 막상 읽어보려고 하면 거의 300쪽이나 되는 분량에 선뜻 손에 들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말썽을 피우고 장난을 치는 피노키오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대체 왜 이 작품이 명작이라는 칭송을 받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피노키오는 '양치기 소년'과 더불어 대표적인 거짓말쟁이로 알려져 있지만,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해서 코가 커지는 장면은 단 한 장면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주머니에 금화가 있는데도 요정에게 거짓말하는 그 장면에서 피노키오는 코가 커져서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나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심하게 부끄러워 합니다. 그 한 장면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으니 피노키..

미하엘 엔데/한미희 번역, 모모, 비룡소(2)

낫을 든 크로노스에 맞서는 방법 '모모'라는 캐릭터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는 1973년에 출간된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고전으로 자리잡은 작품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철학적 우화로 어린 독자들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은 판타지의 구조를 갖고 있어서 동화처럼 보이는데다 평이한 언어로 쓰여 있지만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모모'의 경우 '경청'이나 '시간'에 대한 주제가 많이 언급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러한 주제들을 작품 속 매락이나 작품이 형성되고 소비되는 사회적 상황에서..

미하엘 엔데/한미희 번역, 모모, 비룡소(1)

빼앗긴 시간을 되찾기 위하여 '나눔'과 '돌봄'의 공동체 어느 날 폐허가 된 원형경기장에 모모라는 한 소녀가 찾아와서 그곳에서 살게 됩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 고아로 보이자만 이 소녀가 혼자 사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하지만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거처를 깨끗이 치워주고, 손수 가구를 만들어 주고, 남긴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모모의 삶은 부족하기는커녕 풍족했습니다. 그들 모두 '나눔'을 통해 '풍족'해지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흡사 '심청전'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심봉사가 출산 직후 죽은 아내를 대신해서 갓난 심청이를 키울 수 있었던 까닭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