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1 14

찰스 디킨스/왕은철 번역, 위대한 유산, 푸른숲주니어

인물 관계를 알면 소설이 한눈에 보인다 찰스 디킨스의 처럼 분량이 제법 많고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단순히 줄거리를 요약한다고 해서 소설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요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파악하게 되면 소설의 주제나 작가의 의도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사건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배열한 줄거리와 달리 인물들의 관계망은 소설의 전체 얼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 핍은 부모님을 일찍 여읜 탓에 그들에 대한 기억조차 갖고 있지 못한 고아 소년입니다. 그는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누나와 그녀의 남편인 대장장이 조의 보살핌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갑니다. 주목할 점은 누나는 핍을 모질게 대하는 반면, 매부 조는 ..

허균, 홍길동전

의 저자는 누가인가 '홍길동'은 공문서의 견본용 이름으로 널리 사용될 만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의 주인공은 조선 광해군 때 활동했던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인 에서 유래한다고 배웠습니다. '홍길동'이란 이름이 이토록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서자라는 신분의 한계를 딛고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원한 '의적'이었다는 사실도 포함될 것입니다. 영국의 '로빈 후드'나 중국의 '수호지' 같이 부패한 정치 권력과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도둑' 이야기는 백성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서 언제나 큰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홍길동전'의 주인공은 허구의 창작물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그는 1500년(연산군 6년) 무..

현진건, 운수 좋은 날, 사피엔스21

김첨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1924)은 일제 강점기 하층민의 비극적 삶을 탁월한 기법으로 묘사해서 전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한국의 대표적 단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인력거꾼 김첨지라고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나이 많은 남자를 낮춰 부르는 호칭'인 첨지라 불릴 뿐 그의 실명이 알려진 바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김첨지는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조선의 민초들을 대표하는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아야 했던 그 인물에게 정당한 이름과 구체적 얼굴을 되찾아주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김첨지는 동소문(현재의 혜화문..

트리나 폴러스/김석희 번역, 꽃들에게 희망을, 시공주니어

다가오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친구와 약속을 잡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걸거나 공중전화로 친구의 '삐삐(페이저)'에 음성 메시지를 남겨 놓아야 했습니다. 소풍이나 여행을 가서 추억을 남기기 위해 필름을 사고 값비싼 사진기를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촬영된 필름을 사진관에 맡겨서 인화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디 이것뿐인가요. 신나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노래가 저장된 카세트 테이프나 시디(CD)를 가지고 가서 워크맨이나 시디플레이어에 재생시켜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작업들을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전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스마트폰은 그 전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가능하게 해 주었고, 과거에는 없었던 수많은 직업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태 켈러/강나은 번역,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돌베개

새로운 옛 이야기 전래 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떡과 아낙을 집어삼키고도 채워지지 않아 그녀의 자식들마저 잡아먹으려 했던 호랑이의 근원적 결핍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리고 호랑이에게서 도망친 오누이는 왜 하필 해와 달이 되었을까요? 그후 오빠와 누이 동생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또 만약 오누이가 아니라 형제나 자매가 주인공이었더라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이 전래 동화에는 이처럼 대답되지 않은 수많은 빈틈과 질문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남겨진 여백을 듣는 이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채워 읽으며 옛 이야기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게 되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야기들이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오래된 민간 설화는..

김유정/신두원 엮은이, 봄봄, 사피엔스21

첫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세월이 흘러 그 사람의 얼굴이나 몸짓은 기억의 저편으로 희미하게 바래가도 이상하게 어떤 냄새는 갑작스레 시간을 거슬러 그 사람을 또렷하게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냄새를 맡고 불연듯 유년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었듯이 가장 모호하고 불투명한 것처럼 느껴졌던 후각이란 감각은 다른 감각들보다 강한 기억의 힘을 지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첫사랑은 어떤 향기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강신재의 소설 는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합니다. 그에게 풋풋한 첫사랑은 싱그러운 비누 내움으로 기억됩니다. 세련되고 깔끔하면서도 지적인 인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실제로 이 소설이 발표된 1960년에 비누는 귀하고 값도 비싼 물건이어서 비누향은 '고급 향..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다림

현실과 허구의 '일그러진' 만남 이문열의 단편 소설 은 다수의 교과서에서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시험에서도 종종 출제될 정도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 책으로 학생들과 토론을 진행해 보면 결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작품이라는 사실이 새삼 절감됩니다. 일반적인 독자들은 작가의 분신이라 여겨지는 주인공 한병태에 감정이입해서 책을 읽게 될 가능성이 많은데 성인이 된 그가 절대악으로 여겨지는 엄석대를 그리워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며 당황하게 됩니다. 엄석대는 악한 인물이고 그에 대항하는 한병태는 선한 인물이라 생각했던 학생들은 병태의 갑작스런 변심에 어리둥절해 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이 작품을 우리의 정치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와 작품에서..

박완서, 자전거 도둑, 다림

세 가지 '자전거 도둑' 1948년 이탈리아의 감독 비토리아 데시카가 만든 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빈곤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고단한 현실과 따뜻한 가족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네오리얼리즘의 수작으로 평가를 받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여진 동명의 소설이 두 편이나 있습니다. 김소진의 과 박완서의 입니다. 두 작품 모두 '아버지, 자전거, 도둑, 가난'이란 핵심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영화와 완전히 다릅니다. 김소진의 소설은 자전거를 매개로 드러난 타인의 상처를 안아주기는커녕 그로 인해 더욱 멀어지게 되는 가혹함을 비정하게 서술합니다. 박완서의 소설은 16세의 소년이 서울에서 겪게 되는 윤리적 갈등을 통해 도덕적인 각성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

레프 톨스토이/이순영 번역,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문예출판사

톨스토이와 함께 하는 윤리 수업 톨스토이의 단편 모음 는 작가가 러시아에서 구전된 전설이나 민담을 각색해서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해 쓴 글입니다. , , 와 같은 그의 대표작들과 달리 소박한 언어와 평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흔히 '동화'로 분류되며 학생들에게 권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 책을 학생들에게 읽어보라고 하면 '동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설교를 따분하게 늘어놓는 '재미없는 책'으로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책은 마치 기독교의 종교적 가르침을 윤리적으로 각색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가르침의 내용이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처럼 하품만 나오게 합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존재라니요? 그런데 이 책에 실..

정재윤, 14살에 시작하는 처음 심리학, 북멘토

질풍노도의 시기를 헤쳐가는 지혜의 보고 친구들과 유명한 왕돈가스를 먹으러 남산에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A가게에 갔더니 가격이 8,000원입니다. 너무 비싸다고 생각해 B가게로 갔더니 그 가게는 원래 10,000원짜리 돈가스를 8,000원으로 인하해 판매 중입니다. 여러분이라면 A와 B 가게 중 어떤 곳에 가서 돈가스를 먹겠습니까?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B가게로 가지 않을까요?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10,000원짜리를 8,000원에 판매한다고 하니 2,000원 가량 더 이득을 본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미리 주어진 정보를 기준으로 이후의 사태를 판단하려는 경향을 현상을 닻 내리기 효과라고 합니다. 앞의 사례에서는 B가게가 제시한 10,000원이라는 가격이 이후 가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