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1

윌리엄 셰익스피어/도해자 번역, 로미오와 줄리엣, 열린책들

ddolappa72 2025. 5. 24. 23:37

 

 
왜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야 할까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엇갈린  비운의 연인(star crossed lovers)'의 대명사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명성과 달리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인 <햄릿>,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비교적 초기에 씌어진 이 작품은 비극적 완결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카풀렛 가문과 문테규 가문이 오랜 원수로 나오지만 그 이유는 명확히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로미오가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줄리엣의 사촌 오빠 티볼트를 죽이거나, 로렌스 신부에게 임무를 부여받은 존 신부가 갑작스럽게 발생한 전염병으로 인해 로미오에게 편지를 전달하지 못하게 되는 등 우연적 요소에 의해 사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인공 로미오와 줄리엣이 비극적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도 그들이 비극적 결함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사실 결혼에 반대하는 두 가문의 연인들이 몰래 사랑을 하다가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 역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는 그러한 서사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쓸 때 이탈리아 소설가 마테오 반델로(Matteo Bandelo)의 작품을 아서 브루크(Arthur Brooke)가 번역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화>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1978년에 제작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 영원한 줄리엣 올리비아 핫세가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원작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 돋보인 작품이다.

 

1996년에 제작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가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뮤직 비디오처럼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인 작품이다.



아버지에 반항하는 딸의 사랑

작품의 서곡에서 이 작품 전체의 개요가 간략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들 두 적들의 치명적인 허리춤에서 / 별들이 가로막은 한 쌍의 연인들이 태어나니 / 그들의 불운하고 애처로운 죽음이 / 그들 부모들의 싸움을 죽음으로 장사지내는구나." 작품의 초반부에 이미 두 가문의 하인들 간의 치열한 갈등이 그려지며 카풀렛 가문과 몬테규 가문 사이에서 오랜 세월 원한과 증오가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을 읽어보면 두 가문 간의 대립이 정말 심각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만나기 전 이미 카풀렛의 질녀 로잘린을 짝사랑하며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잘린을 만나기 위해 카풀렛 가의 파티에 참석한 로미오를 티볼트가 발견하고 혼내주려 하자 카풀렛은 오히려 로미오를 두둔하고 조카를 자제시켰습니다. "마음 쓰지 말고 그를 가만 두게나. 그는 훌륭한 양반답게 처신하고 있고, 사실을 말하자면 온 베로나 사람들이 유덕하고 똑바른 젊은이라 그를 자랑하고 있다네. 이 도시의 모든 부를 다 준다고 해도 이곳 우리 집에서 그에게 불명예를 안기고 싶지는 않다네."

오히려 가장 극적인 갈등은 명문가 자제인 패리스에게 줄리엣을 시집 보내려 하는 카풀렛 부부와 딸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가) 줄리엣 : 성 베드로 교회와 그곳 성자께 맹세코 저는 그의 신부가 되지 않을 겁니다! 남편 될 사람이 청혼하기도 전에 이렇게 서둘러 식을 올려야 되는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가 백작과 아버님께 말씀드려주세요. 저는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맹세코 제가 결혼하게 되면 신랑감은 패리스가 아니라 제가 증오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로미오가 될 것입니다.(3막 5장)

(나) 카풀렛 : 제기랄, 화를 돋우는군. 밤낮으로, 시시각각, 일할 때나 놀 때나 혼자일 때나 사람들과 어울릴 때나 항상 마음은 딸년 혼사 치루는 일이었소. 그래서 뼈대 있는 집안에 재산 든든하고 가문 좋고, 소위 말해 유덕하기 그지없고 남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매끈하게 생긴 양반을 배필로 마련해 주었소. 그랬더니 저 질질 짜는 얼간이, 저 철부지가 복을 코앞에 받아놓고 고작 하다는 말이 “사랑할 수 없고, 아직 어리니 제발이지 결혼하지 않겠어요.”라니. 그래 결혼하지 않겠다면 멋대로 해봐라! 어디서 얻어먹던, 내 집에 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 진심이니 잘 생각해보라. 목요일이 낼모래니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라. 네가 정녕 내 딸이면 백작과 결혼시킬 것이고, 아니라면 길바닥에서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정말 나는 모른 체 할 것이고 한 푼도 보태주지 않을 것이다. 내 말 명심하고 잘 생각해라. 헛소리가 아니야.(3막 5장)

카풀렛 부인은 딸에게 패리스와의 결혼은 "외면의 아름다움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덮어주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설득했습니다. 줄리엣이 '황금빛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속지라면 훌륭한 가문 출신의 패리스는 그것을 둘러싼 '황금장정'으로 이 둘이 결합하면 완벽한 책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거라 말했습니다. 카풀렛 역시 딸의 결혼을 친밀성과 열정과 같은 감정의 결합으로 이해하는 대신 경제적 부의 증진과 계급 유지의 수단으로 파악했습니다. 

남녀간의 결합을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받아들이는 부모 세대와 달리 줄리엣은 개인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녀는 첫눈에 반한 로미오가 몬테규 가문 사람인 것을 알고도 서슴없이 자신의 가문을 버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오, 로미오, 로미오, 그대는 왜 하필 로미오입니까? 그대의 부친을 부정하고 그대 이름을 버리세요. 그렇지 않을 거라면 단지 내 애인이 되겠다고 맹세하세요. 그러면 내가 더 이상 카풀렛 가문사람이 되지 않겠어요." 그녀는 로미오보다 먼저 사랑을 고백했고, 먼저 결혼을 제안할 만큼 사랑에 있어서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줄리엣은 사랑에 대한 로미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데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줄리엣을 만나기 전 로잘린에 대한 로미오의 사랑은 여성에 대해 이상화된 궁정식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로잘린은 "다이아나의 지혜를 지녔고 처녀의 강한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어 큐피드의 약한 장난기어린 활로는 어림도 없"을 만큼 신성한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로렌스 신부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던 이유를 "글을 모르는 자네의 사랑이 외워서 주워섬긴 것임을 그녀가 알았기 때문"이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로미오의 공허한 사랑은 줄리엣과의 만남을 통해 육체적 실체를 지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줄리엣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상은 <오셀로>의 데스데모나나 <맥베스>의 맥베스 부인 등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됩니다.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하고 순종적 여성상에서 벗어난 일탈적 여성 주인공들은 셰익스피어 당대에 악녀들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그런데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문지방 시대에 살았던 셰익스피어가 섬세하게 포착해낸 그 악녀들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선구자들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권위와 시대적 억압에 저항했던 줄리엣의 사랑은 비록 죽음을 맞이하며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말지만, 너무나 순수했기에 처절했던 투쟁의 기억은 마치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처럼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뮤지컬을 영화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의 한 장면. 셰익스피어의 극을 차용해 모던 댄스로 표현한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랑과 죽음을 함께 노래하는 셰익스피어의 언어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를 음미하고, 그 안에 담긴 사유의 조각들을 맞춰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특히 서로 모순되거나 양립할 수 없는 말들을 결합하는 모순어법(oxymoron)이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로미오 : 싸움은 증오와 관련이 있지만 사랑과는 더 관련이 깊다네. 그렇다면, 아, 다투는 사랑, 아, 사랑하는 증오라네. 오, 처음에는 무에서 만들어진 것이여, 오, 무거운 가벼움, 육중한 바람이여, 멋들어진 외양을 갖춘 못생긴 혼돈이여, 납으로 된 깃털, 빛나는 연기, 차가운 불, 병든 건강, 겉과 속이 다른 항상 깨어있는 잠이여.(1막 1장)

로미오는 '사랑'이란 단어에 그것에 반대되는 '증오'를 결합해서 '사랑하는 증오'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습니다. 형식논리상 무의미한 말장난처럼 보이는 '사랑하는 증오'는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당시 로미오는 로잘린을 죽을 만큼 사랑했지만, 그녀가 한없이 차갑고 냉정하게 그를 대할수록 그녀에게 더 집착하게 되는 자신을 죽고 싶을 만큼 증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증오'라는 표현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갖는 모호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미오가 "영혼의 아버지"로 모시는 로렌스 신부 역시 모순어법을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연의 어머니인 대지는 자연의 무덤, 그녀의 장지는 그녀의 자궁."이라고 말하며 이 세계는 삶과 죽음이 맞물려 있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변화하는 자연의 시간 속에서 약초는 때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고 믿는 그는 로미오를 돕기로 결정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혼으로 두 집안의 지독한 원한을 순수한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렌스의 선의는 두 연인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의 선의가 최악의 결과를 불러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더 큰 힘이 우리의 계획을 뒤틀어 버렸소."

결국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결혼식 잔치를 위해 마련했던 것은 검은 장례식으로 바뀌고, 악기는 조종으로, 축가는 만가로, 신부를 단장해줄 꽃들은 시체를 덮을 꽃으로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납골당에서 비로소 다시 만나게 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죽음의 장소를 새로운 탄생의 신혼방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기도 하며, 사랑은 죽음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들이 첫눈에 서로에게 반해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무덤가에 모여 독약과 칼로 목숨을 끊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사회와 관습이 그들의 사랑을 허락하고 용인해 주었더라면 그들 역시 다른 연인들처럼 지리멸렬해진 사랑에 따분해 하며 또 다른 연인을 찾아 헤매였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모순어법을 통해 묘사하고자 했던 사랑은 죽음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나는 제 정신이 아니니 이곳에 없네"라고 말할 만큼 격정과 광기에 빠져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에서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잠식된 영혼은 '나는 더 이상 카풀렛 가문사람이 되지 않겠어요.'라고 선언할 만큼 아버지의 법과 기존 질서에 저항하고 일탈할 만큼 심각한 범죄자가 된다는 점에서 스스로 사형수가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개인과 사회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생명과 창조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함께 죽음을 선택한 장소에 세워진 황금동상은 증오와 폭력이 가득했던 도시에 '어두운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광기 어린 사랑의 힘을 믿고 죽음의 문턱조차 돌파하려 했던 그들의 격정적 사랑이 없었더라면 우리 모두는 따분한 사랑 놀음에 허송세월을 보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