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3학년

방정환, 만년샤쓰, 보물창고

ddolappa72 2025. 5. 25. 19:30

 

 

100년 전 어린이들은 어떻게 살았나

고등보통학교(일제 강점기에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에 다니는 한창남은 반에서 제일 인기 좋은 쾌활한 소년이었습니다. 우스운 말도 잘할 뿐 아니라 비행가 같이 시원스럽고 유쾌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비행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 해어진 모자나 궁둥이에 조각조각 기워진 양복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집안이 구차한 것도 같지만 그의 집안 사정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십 리 밖에서 학교를 다녀서 그가 정확히 어디에 사는 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창남이는 자기 집안일이나 신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살이 터지게 추운 날 체조 선생님은 양복저고리를 벗고 셔츠만 입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까지 벗었는데 창남이만 옷을 벗지 않고 얼굴을 수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다그침에 창남이는 '만년 샤쓰'도 괜찮냐고 되물었습니다. 성화에 못 이겨 양복저고리를 벗자 창남이의 "샤쓰도 적삼도 아무것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맨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때서야 선생님의 무섭던 눈에 눈물이 고였고, 친구들의 웃음 소리도 뚝 그쳤습니다. '가난! 고생! 아아, 창남이네 집은 그렇게 몹시 구차하였던가.'하고 모두들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창남이의 저 '벌거숭이 맨몸'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어린이들이 감내해야 했던 척박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님이 창간한 잡지 <어린이>에는 당대 어린이들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수난과 고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물을 뜨러 가다 실족사한 어린이나 계속 굶는 것을 견디다 못해 지붕 추녀에 목을 맨 어린이, 일본인 집에 있는 빈 맥주병을 가져가다 걸려 구타당한 어린이 등 우울하고 불행한 이야기" 등은 창남이 놓인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기사, [어린이날 특집] ‘어린이’ 잡지에 일제 검열이 집요했던 이유) 

창남이 자신의 '벌거숭이 맨몸'을 '만년 샤쓰'라고 눙치며 넘어가려도 해도 그의 곤궁과 궁핍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신발을 빌린 새끼로 둘둘 감아서 퉁퉁해진 구두, 얄따랗고 해어져 뚫어진 조선 겹바지, 맨발에 신은 짚신 등은 창남의 신체를 감싸고 있던 의복은 그의 경제적 상황을 폭로하는 기호들로 작용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몰골을 하고 창남은 왜 어떻게든 학교에 오려고 했던 것일까요? 체조 선생님은 창남의 반 아이들에게 창남이처럼 용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셔츠가 없다고 부끄러워 하며 학교에 안 오는 것보다 무엇이든 배우려고 학교에 오는 것을 선택한 그의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는 것입니다. 교육만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방정환 선생님의 계몽주의적 신념이 읽히는 지점입니다.

 

일제 강점기 농촌 어린이들의 모습
1928년 강릉에서 촬영된 어린이날 기념 사진



우리는 어린이들을 '쳐다보고' 있는가

현재의 많은 아이들은 '어린이 날'을 그저 선물을 받고 놀이공원에 가는 날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애초의 취지가 시간이 지나며 많이 퇴색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 날'을 제정할 당시 어린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조금이나마 느껴 보기 위해 이런 동화를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100년 전 어린이들은 '어린 것', '아이', '애새끼', '사내', '계집' 등으로 마구잡이로 불렸으며 아동의 인권이나 권리에 대한 의식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방정환 선생님은 이들을 격식있게 부리기 위해 '어린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고,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자고 제안했습니다. 참고로 방정환 선생님은 20세 이하를 '어린이'로 정의했습니다. '어린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순간 현실에 실재하지만 모호했던 대상들이 명확한 의미를 갖는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잡지 <어린이>에 실린 100년 전 어린이의 글에는 '윽박지르지만 말고 좀더 자유롭게' 자신을 대해달라는 간절한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어머님 아버님께 우리 어린 목숨을 좀더 뜻있게 귀엽게 사랑해 달라는 말입니다. 저는 금년 얼마 안되는 나이를 먹은 어린이입니다마는 오늘날까지 자라오는 그 짧은 동안에 저는 어른들의 무수한 비난과 권리에 눌리어 자라났습니다. 그 일례를 들어보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어머님 돈 십 전만 주세요’ ‘돈은 해 또 무엇하니?’ ‘저 잡지 책을 사보겠어요’ ‘아이고 학생이 잡지책이 무어냐 할 공부나 하지 않고’” (1928년 <어린이> 제6권 제3호, ‘윽박지르지만 말고 좀더 자유롭게’ 이정구 어린이)(기사, [어린이날 특집] 여전히 유효한 100년 전 어린이 해방 선언문)

방정환 선생님은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했습니다. 3.1운동 등을 계기로 어린이들을 새 나라의 주체로 존중하기 위한 취지였습니다. 어린이들을 새로운 나라의 주체로 성장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잡지 <어린이>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어린이들을 위해 방정환 선생님은 읽고 쓰는 능력, 즉 '리터러시'를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원활한 의사소통 능력이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 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잡지 <어린이>는 교유적 목적만큼이나 어린이의 '놀 권리'를 보장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린이를 단순히 학습과 교육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잡지의 편집인들은 어린이들의 '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야 자율성과 창의성을 신장시킬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 국가를 꿈꿀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기사, [어린이날 특집] 100년전 잡지 ‘어린이’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그런데 현재 우리가 100년 전 방정환 선생님이 품었던 비전만큼이나 어린이들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4세 고시'와 같은 과도한 선행학습으로 영유아 및 아동들의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급증하는 현실이 100년 전 선각자가 꿈꾸었던 미래였을까요? 1923년 5월에 발행된 '어린이 해방 선언문'에는 '어른에게 드리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 글에서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봐 주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쳐다보는' 대신에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겐 꿈이 필요하다

동화 속 주인공의 별명이 '비행가'이고 그의 이름이 '한창남'인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안창남을 모델로 했기 때문입니다.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비행사가 된 안창남은 당대에 김연아나 손흥민 같은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체제에서 2등 시민으로 살며 민족 차별의 모멸감을 감내해야 했던 민중들에게 안창남은 손상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켜준 영웅이었습니다. 

1922년 12월 10일 여의도에는 안창남의 '고국 방문 대비행'을 구경하기 위해 5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서울과 인근의 각급 학교는 아예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내보냈으며, 철도국은 '비행열차'를 편성하여 할인 요금으로 운행할 만큼 대중적 관심이 높았습니다. 안창남은 이때의 비행 소감을 잡지 <개벽>에 기고했습니다. 그 글을 보면 안창남은 자신의 비행이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문 위에 떴을 때 서대문감옥에서도 자기네 머리 위에 뜬 것으로 보였을 것이지마는, 갇혀 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거기까지 찾아간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기사,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식민지 조국 하늘을 날다)

방정환 선생님이 당대의 대스타 안창남을 모델로 동화를 창작한 의도는 명백해 보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결코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용기를 북돋기 위함입니다. 꼭 실현시키고 싶은 간절한 꿈만 있다면 창남이처럼 남루한 현실도 웃음으로 이겨낼 용기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아이들한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처럼 각자가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