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3학년

박운규, 버리데기, 시공주니어

ddolappa72 2025. 5. 4. 18:22

 

버리데기의 이름은 왜 버리데기인가?

자신의 재산과 벼슬을 물려줄 아들을 간절히 원하던 아버지는 내리 딸 여섯을 낳고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온갖 정성을 들인 끝에 부인은 청룡과 황룡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막힌 태몽까지 꾸고 일곱 번째 아이를 잉태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태어난 그 일곱 번째 아이마저 딸이었습니다. 몹시 화가 난 아버지는 갓 태어난 핏덩이를 밖에 내다 버리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은 '버리데기'가 되었습니다.

버리데기는 엄밀히 말해 이름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부엌데기, 새침데기, 푼수데기 등과 같은 단어를 만드는데 사용된 접미사 '-데기'는 '그와 관련한 성질이나 속성을 갖춘 사람'을 얕잡는 뜻을 더하는 보통명사를 형성할 뿐 홍길동과 같은 고유명사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버리데기는 우선 정당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버려진 아이'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일 뿐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버려진 아이는 버리데기입니다.

그런데 이 버리데기는 딸이란 이유로 버려졌다는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들을 원하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먼저 태어난 언니들과 달리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고 버려진 버리데기는 여자라는 이유로 이 땅에서 박해받고 멸시당해왔던 모든 딸들을 대표하는 집합명사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날 버리데기를 고유명사로 인식하는 것은 그녀의 특별한 결단에 있습니다. 버리데기가 저승까지 가서 구해 온 물과 꽃으로 아버지의 병이 낫자, 아버지는 그녀에게 금은보화와 나라의 절반을 보상으로 제안합니다. 그러나 버리데기는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대신 자신은 지상에서 고통받는 존재가 저세상으로 갈 때 무사히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샤먼이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게 될 부귀와 영화를 단호히 포기하고, 집밖의 너른 세상에서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자가 되겠다고 한 이 결단이 버리데기를 특별한 존재로 영원히 기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 무녀가 양주지노귀굿에서 바리공주를 구연하고 있다.



서천서역국은 어디에

신은 죽음을 초월한 존재로서 불멸자로 불립니다. 반면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은 필멸자로 유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존재의 비밀을 풀기 위해 반드시 해명해야만 하는 수수께끼입니니다. 신화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저승을 방문했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스는 힘으로 저승을 왕래했고, 시시포스는 지혜로 죽음을 속였고,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죽음을 뛰어넘고자 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풀고자 저승에 다녀온 버리데기 역시 문화적 영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다녀온 서천 서역국은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공간일까요?

다른 판본의 버리데기 무가에 따르면 높은 산을 서너 개 넘어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은 극락 가는 길, 왼쪽은 지옥 가는 길, 그리고 가운데 길은 서천서역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 무속신화가 상상하고 있는 저승은 이처럼 극락, 서천서역국, 지옥이라는 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기사, 우리 신화의 중간계) 이 서천서역국은 서천꽃밭으로도 불리는데, 버리데기는 이곳에서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을 꺾어 가서 이미 관에 실려 들려 나가던 아버지를 살려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천서역국은 죽음의 공간이자 생명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영웅들의 저승 방문기는 인간이 삶과 죽음 사이에 그어진 엄격한 경계를 함부로 위반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는 반면, 버리데기는 생명과 죽음이 서로 이어져 있다고 전합니다. 오늘 아름답게 피어난 꽃은 내일이면 시들어 떨어지고 죽고 맙니다. 그래서 서양에서 꽃은 죽음의 불가피성과 덧없는 인생을 상징하는 바니타스(vanitas)의 소재로 즐겨 애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시들어 죽음을 맞이한 꽃은 그대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태어날 다른 꽃들의 거름이 됩니다. 그래서 꽃이 떨어져 죽은 장소는 새로운 탄생의 자궁이기도 합니다. 버리데기가 저승을 방문해서 얻은 깨달음은 생명 속에 이미 죽음이 내재되어 있고,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된다는 진리가 아니었을까요? 버리데기의 이런 깨달음은 그리스의 저 남성 영웅들과 달리 자신의 몸으로 직접 생명을 잉태해본 경험이 있는 여성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버리데기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



버리데기는 왜 서천서역국으로 갔을까

수업 시간에 아이들한테 너희라면 버리데기처럼 널 버린 아버지가 약을 구하기 위해 저승에 다녀오라면 갔을지 물어 봅니다. 간혹 그래도 자신을 낳아준 아빠니까 다녀오겠다고 대답하는 아이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딸이라고 죽도록 내버린 후 한 번도 찾지도 않다가 자기가 죽을 때가 되니 아쉬워 찾아온 아빠를 위해 왜 희생을 해야 하냐고 되묻기까지 합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효도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그럼 왜 버리데기는 죽음을 마다하고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위해 저승에 갔을지 다시 물어 봅니다. 아이들은 순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답변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질문이 버리데기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버려진 아이가 부모 없이 자라며 무엇을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을 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의 엄마 아빠는 누구지? 왜 나를 버렸을까?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난 거지? 아마 이 아이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원망하기도 그리워하기도 하며 이와 비슷한 무수한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15세 사춘기 나이에 갑자기 자기를 찾아와 불가능한 부탁을 하는 염치없는 부모를 보고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 때문에 혹은 그래도 부모님한테 효도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버리데기는 과연 목숨을 건 모험을 떠났을까요? 차라리 그녀는 자신은 왜 이리 가혹한 운명을 타고 났는지 이해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치 지지리 불운하던 총각이 복을 타러 서천서역국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처럼 말이지요.

저승을 향한 여행길에서 버리데기는 길값으로 밭을 갈아 주고, 나무도 베어 주고, 빨래도 해 주고, 심지어 아들 셋을 낳아 주어야 했습니다. 평범한 아낙이 평생 묵묵히 했어야만 했던 일상의 반복적 노동을 하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루 빨리 서천서역국에 가서 약수를 구해와야 아버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데 어째서 나는 이런 하찮은 노동에 매여 있는 것일까? 그녀는 마치 지옥에서 산 정상에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던 시시포스의 심정이지 않았을까요? 너무나 사소해서 하찮게만 보이는 일상의 노동으로 점철된 삶이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여성이란 이유로 수시로 무시되고 학대받으며,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혹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존재의 가치마저 부정당하는 경험을 반복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버리데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버리데기가 길 위에서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이 경험들이 그녀를 이승에서 고통받는 서글픈 영혼들을 위로하는 샤먼이 되도록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그녀의 여행은 세상의 무의미와 고통에 신음하는 동료 여성들을 만나게 되면서 점차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보살피는 존재가 되겠다는 각성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버리데기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신비를 깨우치고 세상 풍파에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름 없는 존재들을 위로하고 보듬는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버리데기는 아버지의 부와 권력으로 가둘 수 없는 거대한 존재로 재탄생했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버려졌던 존재는 아버지의 달콤한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슬픔에 힘겨워 하던 이름 없던 존재는 슬퍼하는 영혼들을 위로하는 개별적 주체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 변화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녀가 과감하게 길을 떠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