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1

찰스 디킨스/왕은철 번역, 위대한 유산, 푸른숲주니어

ddolappa72 2025. 5. 3. 23:17

 

인물 관계를 알면 소설이 한눈에 보인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처럼 분량이 제법 많고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은 단순히 줄거리를 요약한다고 해서 소설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요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파악하게 되면 소설의 주제나 작가의 의도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사건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배열한 줄거리와 달리 인물들의 관계망은 소설의 전체 얼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 핍은 부모님을 일찍 여읜 탓에 그들에 대한 기억조차 갖고 있지 못한 고아 소년입니다. 그는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누나와 그녀의 남편인 대장장이 조의 보살핌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갑니다. 주목할 점은 누나는 핍을 모질게 대하는 반면, 매부 조는 핍에게 친구이자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군다는 것입니다. 

핍을 말벗으로 고용한 해비샴은 남자에 대한 배신감으로 모든 것을 결혼식 한 시간 전의 상태로 멈춰 놓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녀는 에스텔라를 양녀로 입양해 매력적이지만 상처를 잘 주는 성격으로 길러냄으로써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성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핍이 이런 에스텔라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에게 걸맞는 신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핍의 소망은 뜻밖의 우연에 의해 실현됩니다. 어느 날 재거스라는 변호사가 그를 찾아와 익명의 후원자가 남긴 막대한 유산으로 런던에서 신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핍은 이것을 에스텔라와 자신을 짝지으려는 해비샴의 배려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익명의 후원자는 그가 예전에 늪지대에서 만난 매그위치였습니다. 감옥선을 탈출한 탈옥수였던 그는 핍이 가져다 준 줄칼과 먹을거리 덕택에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고, 그 일을 감사하게 여겨 막대한 부를 쌓은 뒤 핍을 후원했던 것입니다.

이 소설의 반전은 핍의 후원자로 알려진 프로비스의 정체가 사실 매그위치였고, 그가 에스텔라의 친부였다는 것입니다. 매그위치가 경찰에 체포되고 그의 재산마저 몰수됨으로써 핍은 더 이상 신사 수업을 받을 수 없게 되고, 에스텔라도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어 사랑마저 잃게 됩니다. 

인물들 간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 이 소설에서 반복되고 있는 어떤 패턴이 발견됩니다. 우선 부모가 없는 핍에게는 유독 아버지 역할을 하는 많은 인물들이 주변에 포진해 있습니다. 선량한 매형 조나 핍에게 헌신적인 매그위치는 물론이고 핍의 런던 생활을 도운 변호사 재거스나 그의 서기인 웨믹조차 핍의 대부로서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핍의 신사 되기가 바람직한 남성으로 성장하는 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다음으로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은 선과 악으로 전형화되지 않고 양가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남자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온 해비샴은 악독한 악녀이면서 동시에 남자들에 피해를 입은 불쌍한 희생자이기도 합니다. 매그위치는 감옥선을 탈출한 흉악한 범죄자이면서 핍을 아들처럼 사랑하는 자상한 남자이기도 합니다. 조는 가난하고 무식한 하층민이지만 아내의 동생인 핍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런던의 신사들보다 더 고귀하고 품위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인물들이 지닌 이런 양가성은 내러티브를 전개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자상했던 매형 조를 존경했던 핍은 에스텔라에게 매료된 이후로 점차 그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핍이 런던에서 화려한 사교계 생활을 하면서는 심지어 조를 경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핍은 에스텔라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그녀가 속한 지배층에 동조되어 그들의 시선으로 자신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평가하는 과오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그가 런던에서 신사 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해비샴의 배려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핍의 이러한 자기 기만 혹은 허위의식은 자신의 후견인이 다름 아닌 범죄자 매그위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섬세한 연출과 뛰어난 영상미가 돋보이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위대한 유산>(1946)



가난이란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핍은 어린 시절부터 '죄의식'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탈옥수들의 협박에 굴복해 줄칼과 먹을 것을 훔쳐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걸핏하면 손찌검을 일삼는 누나는 핍의 그런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감옥선에 대해 캐묻는 핍을 향해 "감옥선으로 갈 팔자"라고 저주합니다. 그는 마치 탈옥수들과 공모라도 한 듯 점차 죄의식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래서 도랑과 강둑마저 그를 노려보며 "도둑놈이다! 붙잡아라!"라고 아우성치는 듯한 환청을 듣게 되고, 마치 족쇄를 찬 것처럼 발목이 시큰거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경찰관이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집에서 기다라고 있을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몇 년 후 누나가 공격을 받아 쓰려졌을 때도 범죄 현장에 있던 '줄칼로 절단된 족쇄'를 보고 핍은 범인이 올릭임을 직감했음에도 그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그 무기와 자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핍의 이런 죄의식은 이중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때문에 스무 살 터울의 누나에게 '얹혀사는' 처지의 핍은 어머니이자 누나에게 부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채권자로서 누나가 행사하는 폭력을 핍은 채무자로서 묵묵히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누나가 마치 독재자처럼 자신과 매형을 닦달하는 가정은 마치 죄수들이 수감된 감옥선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핍이 탈옥수들을 도운 이유는 그들의 협박이 주된 동기였겠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핍이 누나를 공격한 범인에 대한 침묵한 이유도 어쩌면 누나의 폭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올릭이 대신 이루어주었기 때문이지도 모릅니다. 올릭에 의해 핍은 누나에게 갚아야 할 빚과 그녀가 행사하는 폭력으로부터 단번에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핍의 죄의식은 특수한 가정상황과 부채의식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니체는 '죄(Schuld)'라는 도덕개념이 '빚(Schulden)'이라는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되었다고 파악했습니다. "따라서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는 바로 이 영역에서, 즉 채무법에서 생긴 것이다."(니체/박찬국 번역, 도덕의 계보, 아카넷) 다시 말해 인간이 갖게 되는 죄책감은 경제적인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할 때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갚아야 할 채무를 제때 갚지 못하게 되면 우선 법적인 문제가 생겨나게 되며, 그것이 심리적으로 내면화된 것이 '죄의식'이라는 것입니다.

핍은 해비샴의 새티스 하우스에서 다시 가난한 자로서 죄인인 자신의 신분을 절감하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나를 두러싼 환경이 전보다 훨씬 초라하다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해비샴 댁에 가서 얻은 유일한 것이었다." 동시에 해비샴의 저택은 그에게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영감을 제시해 준 곳이기도 합니다. '누구든 이 집을 갖게 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된다'는 뜻을 지닌 새티스 하우스에서 핍은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유혹하는 듯한 에스텔라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대장장이의 집을 떠나 새티스 하우스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에스텔라와 결혼을 통해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어울릴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신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즉 핍에게 신사가 된다는 것은 가난이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셈입니다. 문제는 신사가 되려는 핍의 욕망은 진지한 내면적 성찰이 결여된 속물적 출세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속물에서 진정한 신사로

해비샴의 저택을 방문하기 전까지 핍은 매형 조처럼 대장장이가 될 생각이었고, 그의 진실된 모습에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에스텔라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의 결정과 자신이 속한 계층의 모든 사람들을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안마당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나는, 내 거친 손과 낡은 신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에 갑자기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조가 조금만 잘살았더라면 내 모습도 지금보다는 나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핍은 이미 에스텔라가 속한 부유층의 시선에 동조되어 자신과 주변을 평가했던 것입니다. 왜곡된 그의 가치관은 런던에서 신사 수업을 받으며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실제로는 돈에 쪼들리는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조의 방문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부유층 친구들이 자신을 얕잡아 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의 신사 되기는 사실 속물 되기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원래 '신사(gentleman)'라는 단어는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며 신사의 범위는 부농, 상공업자, 전문 직업인 등 부유한 중간 계층까지 확대되었고, 마침내 '재산이 넉넉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품위를 지닌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디킨스는 생산적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과시적 소비에만 집착하는 유한계층으로 전락한 신사 계층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 행동하면서도 돈을 위해 범죄조차 마다하지 않는 콤페이슨이나 드러믈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입니다. 진정한 신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충분한 유산만 갖고 있다면 신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핍의 모습에서 신사에 대한 작가의 냉소와 조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디킨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새커리는 <허영의 시장>이나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에서 허영과 위선에 물든 중산층을 '속물(snob)'로 지칭하고 풍자적인 글을 썼습니다. 원래 지위가 낮은 사람을 일컫는 말인 '속물'은 새커리의 공로로 '유행만 좇는 귀족'이나 '잘난 체 하는 어리석음과 겉치레'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바뀌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기사, [서재에서]'속물' 권장하는 사회) 디킨스가 이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신사' 개념은 사실 새커리의 '속물'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원제인 'The great expectations'를 '위대한 유산'으로 번역한 것은 핍이 보여주는 속물적 근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입니다. '막대한 유산 상속의 기대'로 직역하는 것이 오히려 돈만 있으면 신사가 될 수 있다는 핍의 헛된 바람을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위대한 유산'이란 번역을 용납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진정한 신사'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후견인의 정체가 탈옥범 프로비스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신사가 되려는 핍의 속물적 욕망도 좌절하게 맙니다. 그 이전까지 핍은 해비샴이 에스텔라와 짝을 지어주고 위해 자신을 후견해 주고 있다고 오인했기에 그 충격은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핍의 욕망이 좌절되는 이 순간이야말로 그의 깨달음이 시작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제야 핍은 자신의 눈을 감싸고 있던 거짓된 굴레에서 벗어나 맑은 눈으로 주변과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핍은 자신을 친아들과 진배없다고 여겨서 체포의 위험을 무릎쓰고 영국으로 돌아온 프로비스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미 누나는 죽었지만 자신을 여전히 가족이라 생각하며 그가 진 빚의 일부를 갚아준 매형 조에게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 그 동안 숨겨 왔던 비밀을 털어놓고 철저히 회개하게 됩니다. 빈털털이가 된 핍에게 남은 '위대한 유산'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범죄자' 프로비스와 '무식한 노동자' 조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신사'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하던 시절 그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조망하고 있습니다. 비약적인 생산력의 증가로 물질적으로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빈부 격차는 더 극심해지고, 팽배한 물질만능주의는 가족이나 사랑 같은 전통적 가치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급기야 인간성마저 상실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시대 진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디킨스가 살았던 시대와 완전히 다르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우리 역시 압축적 근대화의 혜택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고 있지만, 핍처럼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정신적으로는 더욱 빈곤해져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디킨스가 핍을 통해 '진정한 신사'의 품격을 질문하고 있듯이 우리 역시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 궁리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