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1

트리나 폴러스/김석희 번역, 꽃들에게 희망을, 시공주니어

ddolappa72 2025. 3. 22. 17:07

 
다가오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친구와 약속을 잡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걸거나 공중전화로 친구의 '삐삐(페이저)'에 음성 메시지를 남겨 놓아야 했습니다. 소풍이나 여행을 가서 추억을 남기기 위해 필름을 사고 값비싼 사진기를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촬영된 필름을 사진관에 맡겨서 인화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디 이것뿐인가요. 신나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노래가 저장된 카세트 테이프나 시디(CD)를 가지고 가서 워크맨이나 시디플레이어에 재생시켜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작업들을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전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스마트폰은 그 전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가능하게 해 주었고, 과거에는 없었던 수많은 직업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드론, 자율주행차 등 곧 상용화를 목전에 둔 최첨단 기술들이 현실화되었을 때 우리의 일상과 사회 구조는 또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혹자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4차 혁명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 특징을 '디지털 혁명에 기반하여 물리적 공간, 디지털 공간 및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기술융합의 시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4차 혁명'이란 정의가 모호하며, 정보와 통신의 혁명인 '3차 혁명'에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급격한 기술 발달로 인해 우리는 이전 세대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사회적 환경 속에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겨납니다. 급격한 사회 변동이 임박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젊은 세대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산업화 세대인 부모 세대가 받아온 암기식, 주입식 교육만으로 자식 세대가 사회적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초등학교부터 코딩 기술을 가르치고, 인공지능 관련 수업을 개설하면 미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충분히 육성할 수 있는 것일까요?

현재 우리 교육은 대개 교사가 가진 지식을 학생에게 전달하고, 시험을 통해 학생이 전수받은 지식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습득한 지식을 빠르고 정확하게 산출하는 학생을 우리는 우수한 학생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이 교육 모델의 최종적인 형태가 인공지능입니다. 인공지능은 어떤 사람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지식을 요약 및 정리해서 사람이 원하는 답을 내놓습니다. 과연 전통적인 교육 모델로 수업을 받은 학생이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기술 발달로 인해 앞으로 어떤 직업이 사라지고, 또 어떤 직업이 새로 생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수의 과학자들과 미래 전문가들은 미래의 사회 변화를 대비하기 위해 특정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습니다. 예를 들어, 나란 누구인지,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와 같은 근원적 고민으로 회귀해서 고민을 해야 주체적인 대응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다 거시적으로는 학생들이 당장의 직업을 얻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기초를 놓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진로 탐사 과정으로 함께 읽은 책이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철학적 우화인 이 책은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학생들이 진로란 정해진 직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방식과 방향을 정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애벌레들은 왜 꼭대기에 오르려고 했을까

이 책에는 수많은 은유와 상징이 등장합니다. 그러한 비유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작품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가령 수많은 애벌레들이 애써 기어오르려 했던 애벌레 기둥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기둥은 꼭대기에 오르고자 하는 애벌레들의 욕망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아무도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모두들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기둥이 만들어 졌습니다. 문제는 일단 기둥에 오르기 시작하면 오직 남을 딛고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어 옆에 있는 다른 애벌레들을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장애물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불평하는 다른 애벌레에게 "삶이란 원래 험난한 거야.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라며 모진 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둥은 혹독한 경쟁 시스템이 적용된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애벌레들은 위로 기어오르려 하는 것일까요? 호랑 애벌레는 어느 날 먹는 일을 멈추고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해.' 즉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위를 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슬로우(Maslow)의 욕구단계이론(hierarchy of needs theory)를 떠올리게 합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의식주 및 성욕에 관한 생리적 욕구, 안전한 직업이나 교육 보장을 지향하는 안전 욕구, 사랑, 우정, 친목 등을 도모하고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소속 욕구, 명성이나 명예, 사회적 지위 등을 원하는 존경 욕구, 그리고 잠재능력, 창의성, 도전적 과업, 보람 등을 원하는 자아실현 욕구. 그는 하나의 하위 욕구가 총족되면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생겨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애벌레들의 상승 욕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벌레들이 만든 사회 체제에서 소속 욕구 이상의 고등한 욕망을 애초부터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직 "높이 오르려는 본능"만이 중요한 사회에서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관계는 수시로 무시되고 존경이나 자아실현 같은 욕구는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높이 오르려는 본능'을 기둥을 통해서 충족시키려는 대신 다른 방법이 없는지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비가 된다는 것

호랑 애벌레와 달리 노랑 애벌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나서 대화를 나눈 뒤 나비가 되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처럼 삶은 우연한 만남과 기회들이 뒤엉켜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무늬를 디자인해 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비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나비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합니다.

우선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믿어야 합니다. 노랑 애벌레도 처음에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나비로 변태 중인 늙은 애벌레를 '솜털투성이 벌레일 뿐'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기둥의 꼭대기에 도달한 호랑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들에게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우리 모습을 봐! 어느 구석에 나비가 들어 있겠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전부라 믿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화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긍정하고 변화에 열린 태도를 갖지 못한다면 불만족스런 현실에 투덜거리며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는 고치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겉모습'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참모습'을 찾기 위한 궁리와 모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단계입니다. 여행 등을 통해 직접 체험한 지식과 책을 통해서 획득한 지식을 내면화하고,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며 내실을 기하는 단계입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 원해야 합니다. 그런 간절함은 과거의 자신과 완벽한 결별로 표현됩니다. 더 이상 과거의 모습으로 살지 않겠다는 결단 없이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신의 음성을 듣고 정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에 젖은 유대 민족을 이끌고 광야로 떠나지 않았다면 현재의 이스라엘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작가는 왜 하필 나비를 선택해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일까요? 그리스어 프시케(Psyche)는 '영혼'과 '나비'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나비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영혼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는 프시케를 만나기 전에는 함부로 화살을 쏘아대던 철부지 장난꾸러기였지만, 그녀와의 만남 이후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고 함께 고통을 극복하려는 성숙한 청년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비가 된다는 것은 진정한 자아가 무엇인지 깨닫고 성숙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오직 정답 맞추기로 청소년을 보낸 사람이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저 좋은 성적을 받는 일에만 골몰하고, 칭찬받기만 좋아하고, 타인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며, 자기만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여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면 그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리고 애벌레로 꼭대기에 기어오르는 것과 나비가 되어 날아 오른다는 것은 정상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삶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전자는 높이 오르기 위해 누군가를 끊임없이 짓밟아야 하지만, 후자는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원하는 높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애벌레는 꽃들이 열매를 맺는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지만, 나비는 사랑의 씨앗을 나르는 전령사가 되어 모두가 함께 풍요로운 결실을 나눌 수 있게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젊은 세대에게 애벌레로 살도록 강권하기보다는 나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