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와 함께 하는 윤리 수업
톨스토이의 단편 모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작가가 러시아에서 구전된 전설이나 민담을 각색해서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해 쓴 글입니다. <전쟁과 평화>, <부활>,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그의 대표작들과 달리 소박한 언어와 평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흔히 '동화'로 분류되며 학생들에게 권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 책을 학생들에게 읽어보라고 하면 '동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설교를 따분하게 늘어놓는 '재미없는 책'으로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책은 마치 기독교의 종교적 가르침을 윤리적으로 각색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가르침의 내용이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처럼 하품만 나오게 합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존재라니요?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에는 톨스토이의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구두장이로 성실하게 살아온 마르틴은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어느 날 마르틴은 자신의 고향에서 온 노인에게 자신의 슬픔을 모두 털어놓고 조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지 점차 깨닫게 됩니다. 그는 매일 밤 성경을 읽었고, 읽고 나서 이해되지 않은 구절을 반복해서 생각했고, 성경의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이해했고, 그렇게 깨우친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마르틴의 이러한 독서법은 '거룩한 독서'라 불리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입니다. '렉시오'(읽는다) '메디타티오'(묵상한다) '오라티오'(기도한다) '콘템플라티오'(산다)의 4단계 독서법인 렉시오 디비나는 11세기 귀고1세라는 수도사가 형식화한 것으로 온몸으로 성경을 읽는 방법입니다.(기사, '거룩한 독서' 렉시오 디비나란 무엇인가.. 온몸으로 느끼며 성경 읽기) 이 독서법은 책을 단순히 지식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독서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성찰의 매체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마르틴의 독서법을 톨스토이의 책에 적용시켜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자 수업에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너희는 불쌍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라는 신의 명령을 따랐을 것 같니, 아니면 미하일처럼 어겼을 것 같니? 너는 얼마만큼의 '돈'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니? 이웃과 사이가 좋지 못한 아들 이반에게 왜 아버지는 상대의 잘못을 용서해 줘야 한다고 말했을까? 등장인물이 갈등하고 고민했던 질문을 아이들에게 똑같이 던져서 스스로 윤리적 선택을 하도록 하자 다양한 답변이 쏟아졌습니다. 서로의 대답들을 비교하고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아이들은 톨스토이가 제시한 해답과는 다른 대답들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윤리와 도덕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가르침을 주는 학문입니다. 전통적으로 한 사회나 공동체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관습적인 질서를 잘 준수하는 것을 흔히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라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근대와 더불어 '내면의 진실성'이 강조되며 예법의 격식이나 범절을 잘 지키는 것은 형식주의나 위선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게 되었습니다. 근대적 주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윤리적 규범을 찾아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서영채, 인문학 개념 정원, 문학동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이 책에서 그의 가르침을 읽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제기한 질문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각자가 윤리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가르침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자신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지 성찰하도록 해서 윤리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그의 책을 생산적으로 수용하는 한 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노동과 죽음과 병'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조건을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이 단편에 따르면 인간이 힘들게 일을 하도록 태어난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자기만 생각하며 살게 될까봐 신이 배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언제 죽을지 모르도록 만들어진 것도 삶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으며 사는 것 역시 서로 돕고 살라는 신의 뜻이라 합니다.
아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는 왜 힘들게 일을 해야만 할까요? 아이들은 인간이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게을러지고 나태해져서 오늘과 같은 문명을 이루지 못했을거라 합니다. 그리고 큰 바위를 옮기거나 거대한 나무를 자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협동을 해야 해서 함께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을 거라 합니다. 제가 들었던 가장 멋진 대답 중 하나는 사람은 힘들게 일을 해야만 얻은 것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식물처럼 광합성을 해서 양분을 얻게 되었다면 굳이 힘들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일도 없게 되었을 거라 상상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두고두고 곱씹어 볼 만한 상상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톨스토이가 제기한 질문에 대해 아이들 각자가 자유롭게 대답하도록 해봅니다. 나름대로 기발하고 재기발랄한 답변이 쏟아집니다. 이외에도 인간은 왜 먹어야만 살 수 있는지나 인간은 왜 잠을 자야만 하는지 같은 문제들로 만들어서 토론해 봅니다.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다양한 조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인간은 사랑으로 사는 존재라 대답했다면, 아이들은 인간이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할까요? 한 아이가 인간은 행복 때문에 사는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자기는 엄마 아빠와 여행을 가거나 친구들과 어울릴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하며, 자신은 그런 행복한 순간들 때문에 사는 것 같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아이는 인간은 꿈 때문에 사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우주의 신비를 탐험하는 과학자가 꿈인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꿈이 인간의 삶을 의미있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만약에 톨스토이가 살아 있어서 아이들의 답변을 듣게 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자신과 다르게 대답한 아이들이 틀렸다고 지적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수준에 맞게 각자 가치있는 것을 찾아낸 아이들을 칭찬했을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소작농인 바흠은 '땅만 널찍하다면 악마도 무섭지 않다'고 이야기해서 악마의 호승심을 자극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흠의 저 대사는 당시 러시아의 지주들이 악마보다 더 혹독하게 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단편 '촛불'에서 톨스토이는 당대의 참혹한 현실을 윤리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농민들을 못살게 되롭히는 관리인 미하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를 놓고 미허예프와 비살리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미허예프는 악을 악으로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며 신이 그를 벌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달리 바실리는 그런 개만도 못한 인간을 죽이는 건 신의 명령이며, 잠자코 있으면 맞아 죽을 뿐이라며 반박합니다. 과연 미허예프와 비살리 중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맞을까요?
윤리 공부는 단순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추상적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인 활동이 아니라 이처럼 현실의 구체적 갈등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를 반성해 보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미허예프의 주장대로 무던히 참고 기다리면 저절로 해결이 되는 것일까요? 그러다 또다른 희생자가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아니면 바실리의 주장에 따라 악덕 관리인을 살해한다면 이 문제가 해소될까요? 그렇다면 누가 그를 죽일 것인가요? 그리고 그를 없애더라도 지주가 그보다 더 악독한 관리인을 보내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매순간 윤리적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제품을 소비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서부터 어떤 정치인을 지지할 것인지 말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내리는 크고 작은 결정들 속에는 윤리적 가치 판단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무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결정들을 의식 차원으로 끌어올려 성찰해 봄으로써 우리는 보다 윤리적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문학을 통한 윤리 교육은 도덕적 설교를 꼰대의 잔소리로 여기는 젊은 세대에게도 흥미로운 수업 모델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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