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세월이 흘러 그 사람의 얼굴이나 몸짓은 기억의 저편으로 희미하게 바래가도 이상하게 어떤 냄새는 갑작스레 시간을 거슬러 그 사람을 또렷하게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냄새를 맡고 불연듯 유년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었듯이 가장 모호하고 불투명한 것처럼 느껴졌던 후각이란 감각은 다른 감각들보다 강한 기억의 힘을 지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첫사랑은 어떤 향기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는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합니다. 그에게 풋풋한 첫사랑은 싱그러운 비누 내움으로 기억됩니다. 세련되고 깔끔하면서도 지적인 인물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실제로 이 소설이 발표된 1960년에 비누는 귀하고 값도 비싼 물건이어서 비누향은 '고급 향기'나 '멋쟁이 냄새'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자연적인 체취를 제거하고 그 자리를 인공적 향기로 대체한 비누 냄새는 너무나 유혹적이라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결코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첫사랑의 설렘과 안타까움을 도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동백꽃 향기는 자연친화적이지만 투박하고 향토적인 색채를 띄고 있습니다. "산 중턱에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사소한 오해로 아옹다옹 다투던 남녀는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 더미 속으로 함께 뛰어들고나서가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인공 '나'에게 모질게 굴던 점순이의 저돌적인 구애의 몸짓과 '알싸한' 동백꽃 향기가 퍽이나 잘 어울립니다.
사실 김유정의 소설에 등장하는 노란 동백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남쪽지방의 빨간 동백꽃이 아닙니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나 '동박나무'로 부르며, 이 나무 잎이나 꽃을 비비면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동백꽃'을 표준어로 고치면 '생강나무꽃'입니다. 이처럼 표준어가 아닌 지역 사투리가 쓰여 혼란을 유발한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김동인의 소설 <감자>가 실제로는 '고구마'를 소재로 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하튼 '알싸한 동백꽃' 향기는 비누 냄새와 더불어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문학적 소재로 오래고 기억될 듯 합니다.


플롯의 창조자로서 소설가
김유정의 <동백꽃>은 화자인 '나'가 나무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선 순간 사흘 전에 점순이와 있었던 사건을 회상하고 다시 닭싸움이 일어난 현재로 돌아오는 시간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이 소설은 '현재 - 과거 - 현재'의 시간 순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왜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한 것일까요?
우선 '스토리(story)'와 '플롯(plot)'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토리는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열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플롯은 작가가 문학적 형상화를 위해 인과관계에 따라 사건들을 배치한 것입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다고 했을 때 실은 작가가 미학적 의도를 갖고 교묘히 사건들을 배치한 플롯을 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난 후 친구에게 간단한 줄거리를 전달할 때는 이 플롯을 시간 순서로 정리한 스토리를 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설을 정교하게 읽기 위해서는 작가가 어떤 의도로 플롯을 배치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김유정의 소설로 돌아오면 첫 장면에서 독자는 왜 점순이가 주인공 '나'의 닭을 못살게 괴롭히는지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회상 장면에서 독자는 '나'에 대한 점순이의 애정 표현을 눈치채고 그 사실을 모르는 주인공을 비웃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와 점순이의 갈등이 어떻게 해결될 지 궁금해 하게 됩니다. 즉 작가는 독자에게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것을 끝까지 지속시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도록 하기 위해 정교하게 플롯을 배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플롯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고 스토리를 파악하는 것이 소설 읽기의 전부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작가가 미학적 의도를 갖고 배열한 플롯들 간의 논리적 관계를 따져 묻고, 그것이 독자에게 어떤 미적 효과를 유발하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비로소 성숙한 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점순이의 사랑 고백은 왜 실패했는가
점순이는 '나'에게 귀하디 귀한 구운 감자 세 알을 몰래 디밀며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나'는 점순이의 호의를 매몰차게 외면하고, 무안해진 점순의 가무잡잡한 얼굴을 홍당무처럼 새빨게 집니다. 왜 '나'를 향한 점순의 사랑 고백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 원인은 점순이 무심코 내뱉은 "느 집엔 이거 없지?"라는 대사에 있습니다. 점순은 '이거 귀한 거니까 어서 먹어'라는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나'의 귀에는 가난한 자신을 무시하는 말로 들렸을 뿐입니다. 점순의 입장에서는 호의의 표시로 발화된 표현이 '나'의 입장에서는 경멸의 표시로 곡해되어 이해되었기 때문에 오해가 싹 트게 된 것입니다. 동일한 표현이라도 그것이 전달되는 상황에 따라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에 따라 발화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오해의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 '나'는 왜 점순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일까요? 작가는 이들 간의 경제적 차이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마름의 딸인 점순은 이성적 호기심을 갖고 접근한 반면, 소작농의 아들인 '나'는 점순의 접근을 계층적 관점에서 해석해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즉, '나'는 마름의 딸인 점순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완고한 당부 때문에 처음부터 그녀를 이성으로 바라볼 여지가 차단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순의 모든 말과 행동을 계층적 관점에서 해독할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의도를 유일하게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조선 사회는 극심한 식민지 착취로 인해 농촌 경제가 붕괴되고 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이 첨예화되던 시기였습니다. 김유정은 소설 <만무방>에서 응칠과 응오 형제를 통해 장리쌀, 도지, 색초 등의 각종 세금을 변제하고 나면 '빈 지게'밖에 남지 않아 유랑민이 되어 떠돌거나 범죄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농촌의 황폐함을 사실적이고 비판적으로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동백꽃>이나 <봄봄>에서 이런 현실적 갈등은 해학적으로 채색되어 수면 아래로 은폐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김유정이 이 소설에서 웃음을 유발시키는 전략은 화자와 독자 간의 정보 차이에 기반한 것입니다. 독자는 점순의 행동이 주인공 '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아는 반면, 화자인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주인공 '나'는 독자의 눈에 여자의 속마음을 몰라주는 어리석고 순진한 시골총각으로 인식되어 웃음을 유발하게 됩니다.

사랑의 (불)가능성
'나'와 점순은 그 뒤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들은 향긋한 동백꽃 속에 파묻혀 풋풋한 첫사랑에 눈을 뜨게 되지만, 곧바로 잔뜩 역정이 난 점순 엄마의 목소리에 혼비백산해서 점순이는 산 아래로 내려가고, '나'는 엉금엉금 기어 산 위로 도망치게 됩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이제 막 시작되는 첫사랑의 순간을 그려낸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의 사랑이 계층적 차이에 의해 좌절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회적 금기와 갈등 속에 이제 막 싹이 튼 그들의 사랑은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무자비한 현실의 질곡 아래 무참히 좌절되고 말까요?
나아가 작가 김유정이 작품에서 즐겨 구사하는 해학과 유머는 비극적 현실을 은폐하고 망각하게 하는 장치일까요, 아니면 식민지 현실에서 유발된 극도의 긴장과 초조를 해소하고 초월할 수 있게 해주는 기제일까요?
소설의 열린 결말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결정도 손쉽게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주인공 '나'를 보고 웃기 위해서는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떠올려야 하고, 당시 상황을 알고 나면 주인공을 더 이상 비웃을 수 없는 역설적 상황이 결말에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시작되었으나 비극적 결말이 예견된 사랑을 우리는 축하해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안쓰럽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다양한 해석을 유발하는 이런 미결정의 소설 구조는 아마도 김유정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사후의 삶을 유지하도록 하는 요체 중 하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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