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과 허구의 '일그러진' 만남
이문열의 단편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다수의 교과서에서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시험에서도 종종 출제될 정도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 책으로 학생들과 토론을 진행해 보면 결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작품이라는 사실이 새삼 절감됩니다. 일반적인 독자들은 작가의 분신이라 여겨지는 주인공 한병태에 감정이입해서 책을 읽게 될 가능성이 많은데 성인이 된 그가 절대악으로 여겨지는 엄석대를 그리워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며 당황하게 됩니다. 엄석대는 악한 인물이고 그에 대항하는 한병태는 선한 인물이라 생각했던 학생들은 병태의 갑작스런 변심에 어리둥절해 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이 작품을 우리의 정치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와 작품에서 서술된 시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럴 만한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우선 이 작품은 1986년에 39세인 '성인 병태'가 27년 전인 1959년 당시 12세인 '5학년 병태'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1960년에 4.19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87년 6월에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발표되었습니다. 발표 당시 1948년생인 작가 이문열의 나이는 성인이 된 주인공과 거의 같습니다. 작가 이문열은 1987년 4.13 호헌조치를 바라보는 한국 지식인들의 당혹감과 절망을 남아내 한국 사회가 가진 진실의 모퉁이를 보여주고 싶어서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기사, "1987년 한국 지식인의 당혹감 담아")
위의 사실들을 종합하면 작가는 부당하게 권력을 탈취한 군부독재가 한국을 지배하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집필 당시는 아직 민주화선언이 이루어지기 이전이라 작가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어른 나'가 '어린 나'를 회상하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학년 병태가 시골의 학교에서 겪은 이야기는 성인 병태가 살고 있는 현실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작가는 이러한 작품 구조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간적적으로 발화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고 있지 않다는데 예술적 탁월함과 문제성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 나'의 경험이 소설 속 화자인 '어른 나'의 현실을 환기시키지 못하며, 그로 인해 이 작품을 알레고리로 읽기 어렵게 만듭니다. 엄석대의 몰락을 독재자 이승만이 4.19혁명에 의해 추방된 사건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경우 성인이 된 화자가 살아가는 현실에는 석대에 해당하는 인물이 부재하기 때문에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빗대어 표현했다는 해석은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석대는 새로 부임한 6학년 담임 선생님이라는 우연한 사건에 의해 쫓겨나기 때문에 시민들이 독재자를 축출한 4.19혁명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작가는 엄석대라는 희대의 인물을 창조해서 독재 권력의 메카니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 빼어난 성취를 거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소설의 주인공이 절대악으로 묘사되는 석대보다 그런 '일그러진 영웅'을 만들어낸 '우리들'을 더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불신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석대를 고발하는 아이들을 보며 "느닷없는 그들의 정의감이 미덥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그 경험으로 인해 "변혁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불행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항변을 합니다. 그가 독재 권력에 빌붙어서 '굴종의 열매'나 탐닉하던 '우리들'이 갑작스레 정의로운 투사로 돌변한 것을 보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도 한때는 '우리들'에 속했다는 사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철저한 반성은 작품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우상을 끌어내린 변혁적 시도에 회의적이면서 잘못된 권력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모순적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독자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병태는 왜 석대에게 저항했을까
석대가 학교에서 내쫓긴 이후 병태는 "일류와 일류, 모범생과 모범생의 집단"을 거쳐 자라며 점차 석대를 잊게 됩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의 과정은 "재능과 노력, 특히 정신적인 능력과 학문에 대한 깊에로 모든 서열이 정해지고, 자율과 합리에 지배되는 곳들"이었기에 '억눌림이나 가치 박탈의 체험'은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그가 석대를 다시 떠올린 것은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가) 실업자가 되어 한 발 물러서서 보니, 세상이 한층 잘 보였다. 내가 갑자기 낯설고 이상한 곳으로 전학 온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전 학교에서의 성적이나 거기서 빛났던 내 자랑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들만의 질서로 다스려지는 어떤 가혹한 왕국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엄석대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되살아 나왔다. '이런 세상이라면 석대는 어디선가 틀림없이 다시 반장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공부의 석차도 싸움의 순위도 그의 조작에 따라 결정되고, 가짐도 누림도 그의 의사에 따라 분배되는 어떤 반. 때로 나는 운 좋게 그 반을 찾아 내 옛날처럼 석대 곁에서 모든 걸 함께 누리는 꿈을 꾸다가 서운함 속에 깨어나기까지 했다.
성인 병태가 석대를 떠올린 이유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자유와 합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자유와 합리'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면 자신처럼 일류대를 나오고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별볼일 없이 살리는 없을 거라 그는 믿고 있습니다. 대단히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유 구조는 어린 병태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그가 믿고 있고 경험한 서울의 '합리와 자유'란 집안이 넉넉하거나 운동을 잘 해서 얻은 '인기'로 반장이 될 수도 있으나, 대개는 성적순으로 반장이 결정되고, 그 역할도 학생과 선생님 사이의 심부름꾼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일류 학교에서 공부도 잘 했고, 읍에서 손에 꼽을 만한 높은 지위의 공무원 아버지를 둔 자신이 당연히 높은 서열을 손쉽게 차지할 거라 믿었지만 '새로운 성질의 반장'인 엄석대를 만나서 갈등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병태'와 '어른 병태'가 공유하고 있는 '합리와 자유'에 대한 믿음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나 정의에 대한 열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성공했다면 그에 따른 사회적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어른 병태'가 엄석대를 떠올린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이런 '능력주의'의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고, '어린 병태'가 석대가 통제하고 있는 질서를 "불합리와 폭력에 기초한 어떤 거대한 불의"라고 비판하고 저항한 것도 '능력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계층이동을 어렵게 만들면서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에 따르면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능력에 따른 성공이라 믿고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반면에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정상에 설 수 없었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끼게 되면서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게 된다고 합니다.(마이클 샌델/함규진 번역,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어른 병태'가 '어린 병태'와 '엄석대' 간의 대립을 '합리와 자유' 대 '불합리와 폭력에 기초한 거대한 불의'의 싸움으로 근사하게 정식화하지만, 이것은 거짓 대립일 뿐이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갈등도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학업 성적이나 아버지의 직업이나 집안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가 합리적이고 자유롭다고 믿는 한병태는 5학년 담임 선생님과 반친구들이 자신의 '자랑거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야속해 합니다. 하지만 엄석대가 자신의 마음 속을 읽기나 한 듯 서울 학교에서의 성적과 아버지의 직업 등을 물어주고 관심을 갖자 그에게 감탄하고 강하게 이끌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은 병태가 강력한 권위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강한 인물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병태는 비록 석대가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만 해준다면 언제든 그가 만들어준 '공정한 링'에 오를 준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왜 성인 병태가 석대를 그리워 했는지도 쉽게 이해가 됩니다.

석대는 어떻게 권력을 잡게 되었나
철학자 한병철은 "결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이 권력이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권력을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폭력적으로 억압해 자신의 의지를 따라오게 만드는 강제적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대적 권력은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복종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대한 이런 이해는 '권력은 자유를 억압한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어긋납니다. 그는 폭력이나 억압에 의해 유지되는 권력은 불안정하고 쉽게 부서지는 반면, 자신과 타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해서 '자유로운 복종'을 이끌어내는 권력은 더 큰 안전성을 유지한다고 설명합니다.(한병철/김남시 번역, 권력이란 무엇인가, 문학과지성사)
한병철이 설명하는 권력에 대한 이해는 엄석대가 그에게 투항한 이후 한병태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는 병태가 무엇을 주더라도 잘 받으려 하지 않았고, 어쩌다 받게 되면, 반드시 그 몇 배로 돌려 줘서 오히려 병태가 그에게서 무엇을 얻어 쓴 것 같은 기억을 갖게 합니다. 또, 석대는 병태에게 강제적으로 무슨 일을 시키지도 않았고, 그가 베픈 은총의 대가로 병태가 자신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병태는 석대에 대한 복종과 봉사를 "그의 왕국에 안주한 한 신하로서의 도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석대가 지배력을 획득하고 행사할 수 있는 정당성은 5학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5학년 담임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들이 직접 나서서 아이들이 부리는 반보다 훨씬 더 빨리, 그리고 번듯하게 우리 반에 맡겨진 일을 끝내게" 하는 그의 통솔력을 맹목적으로 신임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그 지지란 것이 실상은 석대의 위협이나 속임수에 넘어 간 거짓일지라도 마찬가지야. 나는 어쨌든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석대의 힘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어."라고 단언합니다. 극단적인 효율성과 성과제일주의를 추구하는 정신이 독재를 배양하고 유지하는 뿌리입니다. 이런 욕망이 팽배한 곳에서 민주적 절차나 윤리적 결단은 수시로 무시될 뿐입니다. 성인이 된 친구들이 건달이 된 석대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돈을 휩쓸고 있다며 부러운 듯 감탄조로 말하는 모습은 그들 역시 5학년 담임 선생님과 동일한 '일그러진 욕망'에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석대와 같은 카리스마적 지배자의 등장은 강한 권력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병태가 엄석대의 짓거리를 아버지에게 토로했을 때, 아버지는 '감탄 석인 오조로' "나중에 큰 인물이 돼도 큰 인물이 되겠다."라고 석대를 두둔하고 병태의 나약함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어째서 너 자신은 반장이 될 수 없다고 믿냐'고 아들을 질타합니다. 병태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석대가 전교에서 일등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아들의 불만을 질투와 시기 정도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수단과 방법이야 어쨌든 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공부만 잘하면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맹목적 믿음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병태도 이 야만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석대가 전교 1등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리를 알아채게 되자 그도 '일그러진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억눌려 참고는 있어도 실은 괴로워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아이들에게 나는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를 것이고, 쓰라림으로 포기해야 했던 자유와 합리의 지배가 되살아날 것에 대해서도 나는 분명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시 한 번 병태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와 합리'가 민주주의적 가치나 사회적 정의와 무관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엄석대가 반장인 학급에 전학을 갔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질문하면, 거의 대부분이 그에게 복종하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용의주도하게 행해지는 석대의 사악함이 그를 마치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악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병태가 반년 넘게 석대를 상대로 집요하게 투쟁했지만 결국 굴복하고 만 것은 결과적으로 석대의 악마적 절대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석대는 개별적인 독재자라기보다 그 독재자가 개인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동원하고 있는 권력 메카니즘의 알레고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한 저 질문은 석대 같은 권력자가 지배하는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피질문자 대부분이 저항이나 투쟁보다는 회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병태는 왜 석대 대신 친구들을 비난했을까
석대의 절대 권력은 사범 대학을 나오신 지 몇 해 안 되는 젊은 6학년 담임 선생님에 의해 붕괴되고 맙니다. 그는 석대의 부정 반장 선거와 시험 비리를 눈치채고 그의 권위와 권력을 사정없이 무너뜨립니다. 그의 덕택에 병태는 석대가 부리던 권력의 허구성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어제까지의 크고 건장했던 우리 반 반장은 간 곳 없고, 우리 또래의 평범한 소년 하나가 볼품없이 벌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 비해 담임 선생님의 키와 몸짓은 갑자기 갑절이나 늘어난 듯했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석대의 전횡과 횡포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영웅'이라 부를 만 합니다. 하지만 병태는 석대의 비행를 고발하라는 선생님의 요구에 "저는 잘 모릅니다."라며 거절합니다. 그는 석대를 고발하는 아이들에 대한 반발과 오기로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해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석대의 비리를 까발리고 들춰 내는 데 가장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아이들은 대개 두 부류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석대의 총애를 받기 원했으나 실패한 부류였고, 다른 하나는 석대의 곁에 붙어 수족 노릇을 하며 '굴종의 열매'를 탐닉하던 부류였습니다. 그는 '느닷없는 그들의 정의감이 미덥지 않아' 반발로 오기를 부렸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추가로 병태의 시선에서 무자비한 폭력으로 석대를 무너뜨린 새로운 선생님의 방식은 '자유와 합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듯합니다. 그래서 그의 관점에서 석대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준 6학년 담임 선생님 역시 '일그러진 영웅'일 뿐입니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병태의 이런 선택을 이해하기 어려워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절대악인 석대를 몰아내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인데 병태는 석대의 비리를 폭로하는 아이들을 기회주의자들로 더 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이 상황에서 부정한 권력을 몰아내는 일과 부정한 권력에 빌붙어 향락을 누리던 세력들을 처벌하는 일 중 어떤 것이 더 우선하는 과제일까요?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전자가 우선적으로 해결할 과제로 판단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병태는 왜 후자를 선택한 것일까요?
병태가 석대를 비난하는 아이들을 미덥지 못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그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부정한 권력을 원했거나 그로부터 이득을 향유했던 자들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부정적 욕망에 대한 자기 고백과 반성 없이 새로운 권력으로 재빠르게 옮겨가는 것은 '정의'와 무관한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오기' 때문에 석대 대신 석대의 비리를 까발리는 친구들을 불신하는 태도는 '정의'로운 태도일까요? 병태가 그들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자신이 비난하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요? 혹시 병태가 '오기'를 부린 것은 자신은 석대에게 다른 친구들과 달리 끝까지 저항해본 경험이 있다는 우월감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요? 더 비판적으로 보자면 병태는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것이 자신을 '영웅'처럼 보일 거란 '일그러진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 소설의 화자는 믿을 만한 인물인가
소설은 그것이 전달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본래의 주제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경우 엄석대라는 막강한 카리스마를 뽐내는 마키아벨리적 인물에 압도되어 그를 중심에 놓고 소설을 읽어내는 경우가 많지만, 정작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는 등안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고 있는 이 화자는 과연 믿을 만한 사람일까요? 그가 거짓된 이야기를 지어서 말한다거나 과거에 있었던 일을 부풀려서 전달하고 있어서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무나 지적이고 논리정연하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그 화자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소설 전체는 성인 화자가 어린 시절 어떤 경험을 통해 '변혁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행한 성격'을 어떻게 지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설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화자를 '믿을 수 없는 화자'라고 읽을 경우 이 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일그러진 영웅'이 아니라 그런 지도자를 원하는 '우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병태는 석대와 대립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그 역시 달콤한 '굴종의 열매'를 원하는 세속적이고 소시민적 욕망을 간직한 인물일 뿐이고, 작품은 바로 그런 '일그러진' 욕망을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이렇게 읽기 어려워 하는 까닭은 병태가 그런 '우리들'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작가가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소설은 성장소설의 외관을 띠고 있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나'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전혀 변화하거나 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글이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나'와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인 '성인 나'가 공유하고 있는 굳건한 신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합리와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미 살펴 보았듯 화자가 말하는 '합리와 자유'는 민주주의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능력주의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을 단순히 독재 권력을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이야기로 읽는다면 크나큰 오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교실이 배경이라 해서 5학년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게 하는 경우도 봤는데 과연 그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작가 이문열의 보수적 정치관을 근거로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책은 반복해서 읽을수록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좋은 텍스트임에 분명합니다. 다만, 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까다롭게 쓰여진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 동안 주목받지 못한 점들에도 신경을 써 가며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 작품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이나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등과 비교해서 읽으며 시야를 넓혀가는 독서 방법을 추천합니다. 혹은 이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을 보고 소설과 영화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 찾아 보는 것도 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학년별 책읽기 > 중1'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 켈러/강나은 번역,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돌베개 (0) | 2025.03.01 |
---|---|
김유정/신두원 엮은이, 봄봄, 사피엔스21 (0) | 2025.01.12 |
박완서, 자전거 도둑, 다림 (5) | 2024.12.14 |
레프 톨스토이/이순영 번역,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문예출판사 (5) | 2024.11.22 |
정재윤, 14살에 시작하는 처음 심리학, 북멘토 (4) | 2024.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