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자전거 도둑'
1948년 이탈리아의 감독 비토리아 데시카가 만든 <자전거 도둑>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빈곤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고단한 현실과 따뜻한 가족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네오리얼리즘의 수작으로 평가를 받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여진 동명의 소설이 두 편이나 있습니다.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과 박완서의 <자전거 도둑>입니다. 두 작품 모두 '아버지, 자전거, 도둑, 가난'이란 핵심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영화와 완전히 다릅니다. 김소진의 소설은 자전거를 매개로 드러난 타인의 상처를 안아주기는커녕 그로 인해 더욱 멀어지게 되는 가혹함을 비정하게 서술합니다. 박완서의 소설은 16세의 소년이 서울에서 겪게 되는 윤리적 갈등을 통해 도덕적인 각성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학생이 읽기에는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삶의 경륜과 가슴에 박힌 못을 해학으로 단순화시켜 손자들에게 들려주듯이" 쓰여진 박완서의 소설이 보다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작가 박완서가 자발적으로 쓰고 싶어서 쓴 미발표 원고를 묶어낸 이 동화집에 실린 다른 단편들도 꽤나 수작들입니다. 모두 70년대라는 암울한 시대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들로 학생들이 당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여러 단편들을 읽어봄으로써 작가의 문제 의식이 무엇인지 통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업에서는 이 동화집에 실린 모든 작품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다루었습니다.
대립쌍을 찾으면 이해가 쉬워진다
소설을 읽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학생들은 '자전거 도둑'에서 16세의 청소년 수남이 학교를 다니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이 이해도 안 될 뿐더러 그가 일을 한다는 청계천 세운상가가 어떤 곳인지 모릅니다. 수남이 우연하게 사고를 낸 자가용이 그 당시는 드물었으며, 1975년에 최초로 국산차 포니가 생산되었고 80년대나 되어서야 자동차가 대중화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합니다. 자동차 주인이 수남에게 요구하는 수리비 5,000원이 지금 기준으로 얼마나 되는 금액인지 감도 오지 않습니다. 이런 디테일한 부분들이 이해되지 않을 경우 작품에 몰입하기 어렵고, 인물에 공감하기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수업에서는 학생들에게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최대한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아파트와 무허가 판잣집이 자주 등장하고 도시와 자연(농촌)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정확한 지적인 게 박완서 선생님의 이 작품집은 본격적으로 산업화에 돌입한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당대의 현실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단편들을 읽으며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반복되는 구조를 혼자의 힘으로 발견해내고, 자연스럽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금새 파악하게 됩니다.
주제를 파악하기 어려워 하는 학생들에게 흔히 권하는 방법으로 작품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요소를 찾아 보라고 합니다. 일종의 구조주의 방법론으로 그렇게 작품 속에서 대립쌍을 찾게 되면 이해가 한결 수월해집니다. 예를 들어, '자전거 도둑'에서 발견되는 대립쌍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 - 도시 - 영감님 - 풍요 - 부도덕 - 죽음
고향 - 시골 - 아버지 - 가난 - 도덕적 - 생명
이런 대립쌍이 올바른가는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바람'을 통해 검증할 수 있습니다. 서울 뒷골목에서 '귀신의 휘파람'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는 바람 때문에 전선도매상의 간판이 떨어지며 지나가던 아가씨의 정수리가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게 됩니다. 세운상가에서 부는 바람은 '지랄스런' 바람이자 '흉흉하고 을씨년스러운 횡액'으로 묘사됩니다. 반면 수남이 기억하는 시골의 바람은 '보리밭을 우아하게 흔들고' '큰 나무를 안달맞게 들까부는' 바람이며 게으른 나무들이나 잠든 뿌리들에게 '신기한 마술을 베풀고 지나가는' 생명의 전령입니다. 이 소설에서 바람은 주인공 수남이 자동차 접촉 사고를 당하게 하는 매개이자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되는 매개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도시에서 부는 바람과 농촌에서 부는 바람을 서로 다르게 묘사함으로써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삶이 더 좋을 삶일까?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자전거 도둑'에서 발견되는 이런 도식은 거의 다른 단편들에게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마지막 임금님'을 제외한 모든 단편들에서 도시 혹은 아파트는 '풍요롭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장소'이고, 농촌 혹은 무허가 판잣집은 '가난하지만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장소'로 묘사됩니다.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한 학생들은 작가의 이런 도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서울에서 살더라도 도덕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묻습니다. 학생들의 지적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보다 더 부도덕하지도 않고, 덜 순박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박완서 선생님은 이분법적으로 경직된 윤리관을 아이들에게 설파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시 이 소설들이 쓰여진 시대적 상황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는 한국 사회 전체가 산업화와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입니다. 농업 중심의 산업 구조와 그에 근간한 전통적 삶의 양식은 해체되고, 다수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몰려들어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모색했습니다. 작가는 이런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심성과 욕망의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했습니다. 작가의 눈에 당시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며 윤리나 도덕 같은 정신적 가치는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들이 마음을 잘 살게 하는 데 쓸모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은 과거에 비해 더 풍족해졌지만 '살맛'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작가는 도덕적 설교를 하는 자가 아니라 이처럼 자신의 마음 속 욕망을 반성하도록 하는 존재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도시와 농촌의 대비를 통해 '풍요롭지만 타락한 삶'과 '가난하지만 도덕적 삶' 중 어떤 삶이 더 바람직한 삶인가 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소설에서 그려진 일그러진 욕망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최고급 궁전 아파트에 살기만 하면 저절로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을 우리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지 않나요? 혹시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은가요?('옥상의 민들레꽃') 더 행복해지기 위해 더 좋은 학군과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 갈 궁리를 하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할머니는 우리 편') 마음을 잘 살게 하는 것보다 몸을 잘 살게 하는 데 쓸모 있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나요?('시인의 꿈') 요즘은 초등학생들조차 더 큰 집을 구입해서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 물었을 때 제대로 답을 했던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박완서 선생님이 질타하신 그릇된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듯합니다.
퇴행인가, 성장인가
수남의 자전거가 바람에 쓰러지면서 신사의 고급차를 긁게 되고 신사는 수남에게 수리비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동정심 많은 신사가 수리비를 절반으로 깎아줘도 가난한 수남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신사는 수리비를 가지고 올 때까지 수남의 자전거를 담보로 압수합니다. 하지만 수남은 수금일을 하기 위해서 자전거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남은 신사 몰래 자신의 자전거를 들고 도망을 오게 됩니다. 자신의 자전거를 들고온 수남의 행동은 도둑질일까요, 아닐까요?
학생들은 돈 많은 신사가 그깟 수리비 몇 푼 때문에 수남의 밥벌이 수단인 자전거를 저장잡은 것은 너무하다고 푸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남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자전거를 자물쇠로 채운 것은 잘못이기 때문에 자전거를 들고온 수남의 행동은 용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고를 당한 상대가 부유하다고 해서 사고를 낸 가난한 사람의 책임이 사라지거나 축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연한 사고였다고 해도 수남은 수리비를 물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이 가난한 청소년인 수남이 갚기에는 너무나 크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이야기의 주된 갈등이 수남과 신사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수남이 자전거를 갖고 도망칠 결심을 한 데에는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의 부추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수남의 편이 되어 "토껴라 토껴, 그까짓 것 갖고 토껴라."고 속삭였습니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주인 영감도 무릎을 치면서 통쾌해 합니다. "잘 했다, 잘 했어. 맨날 촌놈인 줄만 알았더니 제법인데, 제법이야." 그 순간 수남의 눈에 주인 영감은 흡사 "도둑놈 두목" 같아 보이고 "얼굴이 누런 똥빛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 소설의 갈등은 수남의 내면으로 이동합니다. 수남은 자전거를 갖고 달리면서 맛본 공포와 함께 "그 까닭 모를 쾌감"을 반성하면서 "자기 내부에 도사린 부도덕성"에 몸서리칩니다. 그리고 수남은 "도덕적으로 자기를 견제해줄 어른"인 아버지가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합니다.
수남과 신사, 혹은 수남과 주인 영감의 갈등은 수남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일 뿐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인물들 간의 외적 갈등이 아니라 수남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갈등입니다. 처음에는 주인 영감의 탐욕과 부도덕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에게 "육친애적" 친밀감을 느꼈던 순진한 수남이 점차 그의 속물적 속성을 깨닫게 되는 과정 자체가 성장의 과정입니다. 간혹 수남의 귀향을 아버지의 질서로의 복귀로 이해해서 각성을 통한 주체의 확립이 아니라 퇴행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수남의 행동을 결과론적으로만 해석하고, 그의 내면적 갈등과 고뇌를 도외시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점차 "장사꾼다운 징그러운 수"에 물들어 가던 수남이 메타인지를 통해 자신의 부도덕성을 깨닫게 되는 과정 자체가 성장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은 아버지의 도덕 세계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물질적 욕심에 도덕과 윤리가 마비된 세상에 대한 환멸과 비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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