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시기를 헤쳐가는 지혜의 보고
친구들과 유명한 왕돈가스를 먹으러 남산에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A가게에 갔더니 가격이 8,000원입니다. 너무 비싸다고 생각해 B가게로 갔더니 그 가게는 원래 10,000원짜리 돈가스를 8,000원으로 인하해 판매 중입니다. 여러분이라면 A와 B 가게 중 어떤 곳에 가서 돈가스를 먹겠습니까?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B가게로 가지 않을까요?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10,000원짜리를 8,000원에 판매한다고 하니 2,000원 가량 더 이득을 본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미리 주어진 정보를 기준으로 이후의 사태를 판단하려는 경향을 현상을 닻 내리기 효과라고 합니다. 앞의 사례에서는 B가게가 제시한 10,000원이라는 가격이 이후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한 셈입니다.
그런데 B가게의 돈가스가 A가게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업체로부터 공급받은 것인데, 단지 B가게 주인이 손님들을 유혹하기 위해 심리적 트릭을 사용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B가게 주인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거나 탁월한 사업적 전략에 감탄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심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면, 이처럼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크고 작은 속임수을 피해서 보다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요?
이외에도 중학생들이 심리학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도박사의 오류, 방관자 효과, 동조현상, 포러 효과, 인지부조화 현상, 확증편향, 피그말리온 효과 등 수많은 인간 심리를 설명하는 방식들을 쫓다 보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게 되고,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할 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요동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지침서를 손에 넣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MBTI를 믿으시나요?
학생들 사이에서 MBTI가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학교에서 MBTI 검사를 하고 이에 근거해서 진로탐색 시간을 가진 이후에 더 그런 경향이 커졌습니다. 방송이나 언론에서도 MBTI를 모르면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라 하니 우리 사회 전체가 MBTI광풍에 싸여 있다고 봐도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MBTI가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약자인 것은 혹시 알고 계셨나요? 그리고 마이어스와 브릭스가 딸과 엄마의 이름이란 것도 아셨나요? 농업대학을 졸업한 소설가 캐서린 쿡 브릭스(Katharine C. Briggs)와 캐서린의 딸이자 정치학을 전공한 미스터리 소설가 이자벨 브릭스 마이어스(Isabel B. Myers)는 1944년에 자기보고형 성격 유형 검사를 개발합니다. 이들은 칼 구스타프 융의 초기 분석심리학 모델을 바탕으로 인간을 크게 두 가지 유형, 즉 지각을 중시하는 사람과 판단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전자는 감각을 좋아하는 사람과 직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누고, 후자는 생각하는 사람과 느끼는 사람으로 나눕니다. 이 네 자기 유형을 다시 태도에 따라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구분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람의 성격을 16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MBTI의 대립적 유형 범주가 형성됩니다.(기사, MBTI, 왜 할 때마다 결과가 다를까)
학생들과 왜 MBTI가 최근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 그리고 MBTI의 문제점은 없는지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우선 이 심리 테스르를 개발한 사람들이 심리 전공자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심리를 전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마추어 심리학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한 데이터 역시 통제된 실험이나 검증된 자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융의 이분법적 성격 유형론에 토대를 둔 것입니다. 한마디로 MBTI는 사이비 과학일 뿐입니다. 게다가 총 16개의 유형으로 제시된 인간의 성격은 혈액형에 근거한 성격 분류에서 조금 더 나간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점은 테스트를 할 때마다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이 단시간에 변하는 것도 아닌데 결과값이 일정하지 않다면 테스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MBTI 검사가 큰 인기를 끌게 된 시기가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활동이 제약된 때였다는 사실도 시사적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막막해 했고, 사회적 거리두기 등으로 인해 고립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시기에 자신과 같은 성격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사회적 안정감을 줄 수 있었습니다. 느슨해진 사회적 소속감으로 인해 불안해 하던 사람들은 가상의 심리적 공동체를 발견하고 그곳의 주민으로 살아갈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MBTI는 손쉽게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줄 수 있는 '최고의 심리상담가'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점을 보러온 사람에게 점쟁이가 무슨 우환이 있냐고 묻기만 해도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사회 곳곳에서 유행처럼 번져나갔습니다. 심지어 상대의 MBTI를 알기만 하면 낯선 상대를 탐색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와 시간을 줄일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 쟤는 T라서 그렇구나.'하고 생각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코로나가 완화된 현재에도 MBTI가 유행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여줄 만한 요인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지적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할 만한 장치가 부족했고, 코로나로 인해 그러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MBTI 같은 사이비 과학에 열광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사실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요?
심리학을 공부하는 것은 이처럼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줍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배운 것을 이용해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 해석해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의 아이히만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 재판소에 참석해서 아이히만의 판결과정을 관찰하고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로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자신은 단지 상급자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며 변명을 했는데, 아렌트는 그가 악마였기 때문에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인간도 자신의 행동을 반성적으로 성찰할 능력이 결여된 경우 언제든 추악한 범행을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1963년 미국의 사회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1984)은 '복종 실험'이라 불리는 밀그램 실험을 진행하며 한나 아렌트와 유사한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밀그램은 가짜 전기충격 장치에 미리 훈련된 연기자를 앉혀 놓은 후,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가 질문을 잘못 대답할 때마다 전기충격을 주되 강도를 점점 높이도록 했습니다. 이 실험에서 연기자의 고통스런 비명을 듣고도 "계속 하라"는 실험자의 명령에 150볼트까지 전기충격을 가한 사람이 전체 참가지의 82.5%가 돼서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기사, 당신은 권위로부터의 '복종'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밀그램의 실험에서 실험 참가자들은 왜 실험자의 명령에 따랐던 것일까요? 우선 실험 참가자들은 괴로워 하는 연기자를 보며 심리적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자기 때문에 실험을 망치기 싫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자신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판단이 앞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군인이나 경찰의 제복처럼 대학 교수가 입은 하얀 가운은 그들을 주눅들게 하는 권위로 작용해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의도가 있어서 이런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라고 믿게 했습니다.
아이히만과 밀그램의 실험 참가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상관이나 권위자의 명령이 타당한지 의심하고 따져보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시키는 것을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희생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공감능력이 부족했습니다. 타인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한 '생각 없음'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초래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Sapere aude!
학생들한테 수업을 마무리하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 것 같냐고 질문해 봅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은 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합니다. 오히려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합리성을 포기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며 인간의 약점으로 인해 저지른 범죄가 용서될 수 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심리학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겸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전후 관계를 깊이 생각한다면 실수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고 일러줍니다.
이 수업을 진행하며 매번 느낀 점은 아이들이 심리학을 매우 흥미롭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낯선 용어와 어려운 개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되었다는 것에 지적 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리학을 통해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이해가 깊어져야 더 상급의 책들을 읽고 공부를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과정에서 이런 토대를 마련해 놓지 않고 <사피엔스>나 <총, 균, 쇠>와 같은 책들을 갑자기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넛지> 같은 행동경제학 서적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심리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낯설기 때문에 어려워 보이지만 조금만 용기를 내서 도전해 본다면 심리학 공부는 학생들이 기존 공부에서 느끼지 못했던 '꿀잼'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Sapere aude!(감히 알고자 하라!)
'학년별 책읽기 > 중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완서, 자전거 도둑, 다림 (5) | 2024.12.14 |
---|---|
레프 톨스토이/이순영 번역,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문예출판사 (4) | 2024.11.22 |
로이스 로리/장은수 번역, 기억 전달자, 비룡소 (4) | 2024.10.27 |
박홍순, 거꾸로 보는 이솝 우화, 마로니에북스 (17) | 2024.10.19 |
조현범, 삼국유사 : 끊어진 하늘길과 계란맨의 비밀, 너머학교 (1) | 202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