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1

태 켈러/강나은 번역,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돌베개

ddolappa72 2025. 3. 1. 23:57

 

 
새로운 옛 이야기

전래 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떡과 아낙을 집어삼키고도 채워지지 않아 그녀의 자식들마저 잡아먹으려 했던 호랑이의 근원적 결핍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리고 호랑이에게서 도망친 오누이는 왜 하필 해와 달이 되었을까요? 그후 오빠와 누이 동생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또 만약 오누이가 아니라 형제나 자매가 주인공이었더라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이 전래 동화에는 이처럼 대답되지 않은 수많은 빈틈과 질문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남겨진 여백을 듣는 이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채워 읽으며 옛 이야기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게 되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야기들이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오래된 민간 설화는 마치 그 자체에 영혼이 담겨 있어서 누군가 자기를 발견해서 세상에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세계 곳곳을 떠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오래된 '해와 달' 이야기의 최신 버전은 2021년에 미국 최고 권위의 청소년 문학상인 뉴베리 메달(Newberry Medal)을 수상한 작품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입니다. 이 소설의 저자는  자칭 '4분의 1 한국인'인 태 켈러입니다. 작가의 이름은 하와이 이민 1세대인 할머니 이름 '태임'에서 따온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들려주신 다양한 한국의 전래동화를 들으며 성장한 작가는 전래 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매개로 본인의 가족사와 한국의 역사를 연결짓는 독창적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주인공 릴리는 할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호랑이와 위험한 거래를 맺고 할머니가 두려워한 나머지 꼭꼭 숨겨둔 이야기의 비밀을 파헤치는 모험을 시작하게 됩니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여정을 거치며 릴리는 점차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라는 가면을 벗고 '호랑이'로 상징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내 자신이 맹렬하고 강한 것 같다. 천하무적 같다. 내 이빨이 칼날이 되고 내 손톱이 호랑이 발톱으로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스스로를 위해 일어설 수 있고 누구도 감히 날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누구일까? (....) 아마도 제멋대로인 여자애. 절반은 호랑이." 

태 켈러는 호랑이를 '지혜롭고 강인한 여성'의 이미지로 재해석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할머니에게서 시작되어 엄마와 릴리에게 이어진 문화적 정체성의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한 호랑이는 이야기가 지닌 강력한 마법을 상징합니다. 호랑이가 릴리의 할머니가 훔쳐간 이야기를 되찾으려 하는 이유는 호랑이가 강력한 힘을 지닌 이야기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나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탐구는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의 본원적 마법에 대한 추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국 호랑이 이야기로 미 최고 아동문학상 '뉴베리 메달' 수상한 태 켈러




릴리, 호랑이와 거래하다

릴리는 남의 눈에 안 보이는 초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을 만큼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의 소녀입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그녀는 자신의 한국적 뿌리에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할머니의 임박한 죽음은 그녀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할머니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엄마와 두꺼운 아이라인으로 아시아계 여성의 정체성을 가리는 언니 샘보다 자신이 더 할머니와 밀접한 친연성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 릴리에게 할머니의 부재는 곧 자신의 존재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릴리 눈에만 호랑이가 보이는 이유는 가족 중 할머니와 그녀만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기 때문입니다. "네 엄마는 이런 거 한 개도 안 믿어. 네 엄마 세상은 좁아. 하지만 '너는' 알아. 세상이 보이는 것보다 크다는 거." '보이지 않는 세계'는 곧 '이야기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릴리는 할머니와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굳게 믿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호랑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 릴리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는 릴리에게조차 차마 말하지 못하고 숨겨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어야만 했던 가슴 아프고 억울한 사연들.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의 기분이 나빠지고 행동이 나빠지기 때문에 꼭꼭 숨겨두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녀가 어린 시절 호랑이한테 훔쳐서 병에 담아 두었다고 말한 이야기란 바로 이런 '나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호랑이가 자신이 숨겨둔 이야기 단지를 못 찾도록 수시로 '고사'를 지냅니다. 마치 다가오는 죽음의 눈길을 속임수로 회피하려는 듯이. 그녀의 맹목적 믿음은 자신의 병을 과학적으로 치료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도 표현됩니다. "나 안 가고 싶어. 너 두고 가기 싫어. 준비 안 됐어. 그래도 그거 내가 결정하는 거 아니야. 내가 결정하는 거 '지금' 어떻게 사느냐뿐이야. 그러니까 너 그거 뺏지 마." 자신의 인생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는 아직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수긍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릴리 앞에 나타난 호랑이는 할머니가 숨겨놓은 바로 그 이야기 때문에 할머니가 병들었다고 일러줍니다. "이야기를 가두어 놓으면 그 마법은 더욱 커져. 그리고 때로는 상해 버리기도 해. 마법이 일종의 독으로 변하는 거야." 그래서 릴리에게 할머니가 숨겨둔 유리단지를 찾아주면 할머니의 병을 치유해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릴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호랑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할머니가 숨겨둔 이야기 단지를 찾아주어야 할까요? 아니면 호랑이을 덫으로 포획해서 더 이상 할머니한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까요? 다시 말해 릴리는 할머니가 침묵과 망각 속에 방치하기로 결정한 그녀의 슬픈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과제를 받은 것입니다. 

수많은 번뇌와 고민 끝에 릴리는 결정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할머니가 없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할머니를 치유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해서라도 할머니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어두운 이야기를 꼭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릴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운 진실을 향해 용감하게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2021 뉴베리 메달 수상자 테이 켈러와 가족 왼쪽부터 동생 선희, 켈러, 어머니 노라, 외할머니 태임



이야기를 통해 성장하다

릴리는 도서관 사서 조 아저씨한테 이야기란 물과 같은 것이란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그에 따르면 이야기는 "우리가 꽉 잡아 보려 해도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에 물과 같은 것입니다. 문자로 기록된 이야기는 항상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도 많아지고 다양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면서 이야기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레 이야기가 변화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그에 따르면 이야기는 물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기도 하며, 우리 스스로를 비춰 볼 수 있는 잔잔한 수면이 되기도 합니다. 조의 조언은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로 결정한 자신의 선택을 불안해 하는 릴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 자체로 위험한 이야기는 없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수용하는 사람의 태도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릴리는 리키를 위로하면서 자신이 위로받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 릴리는 마치 시험을 망치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던 리키의 행동을 보며 의아해 했습니다. 그런데 리키의 기행은 사실 자신을 아빠에게 남겨두고 떠나버린 엄마를 붙잡아두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왜곡되어 표출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리키는 엄마가 숙제를 도와줘서 성적이 오르고 엄마의 도움을 필요하지 않게 되자 자기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리키의 곁을 떠났다고 믿어왔던 것입니다. 리키의 고백을 듣고 릴리는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 맘 같아선 아무리 계속 함께 있고 싶어도, 누군가를 그냥 보내 주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아." 이 말은 곧 할머니와의 이별을 격렬히 거부하는 자신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을 릴리는 깨닫게 됩니다.

언니 샘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 있었습니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여덟 살이었던 샘은 다섯 살이었던 동생 릴리에 비해 아빠에 대한 기억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샘은 릴리에게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해 버리면 아빠에 대한 추억이 사라질까 봐 그 동안 일부러 동생을 멀리 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샘이 그 동안 숨겨 왔던 진실을 꺼내 놓자 릴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야기는 누구 한 사람 게 아냐. 이야기되려고 있는 거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독점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샘은 자기 자신은 물론 동생과의 관계마저 망쳐왔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욱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지닌 치유의 힘

처음에 릴리는 '치유'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치유라는 게 꼭 질병이 치료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릴리는 차츰 할머니의 슬픈 과거 이야기는 물론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치유는 할머니에게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항상 할머니의 말을 듣기만 하고 그녀가 옳다고 생각해 왔던 릴리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반기를 듭니다. "그래도요 할머니, 슬픈 이야기를 숨기는 건 안 좋은지도 몰라요.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숨긴다고 해서 과거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에요. 갇혀 있는 것뿐이지." 릴리의 말에 할머니도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 이야기 꼭꼭 숨기니까 그 이야기가 날 잡아먹었어. 그래서 사랑 안 보였어. 내 주위에 사랑이 가득한데." 그리고 더 이상 도망치는 일을 그만 두기로 결심한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지막 용기를 내게 됩니다. "때로 가장 강한 일은 도망을 그만 가는 거야. 나는 호랑이 안 무섭다, 나는 죽는 거 안 무섭다, 말하는 거야."

결국 이야기를 통한 치유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마저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는 태도는 유아적인 것이며, 듣기 싫은 이야기라도 필요하다면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성숙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숙은 사람들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릴리가 잘 보여 줍니다. 서로 가슴 속에 묻어둔 슬프고 고통스런 이야기를 꺼내서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 받으며 우리는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치유란 성장이며, 성장은 존재의 변화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릴리는 이야기의 마법에 접근해 가며 자신의 문제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정체성을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 또는 고정된 무엇'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호랑이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는 "우리가 다들 하나 이상의 존재일 수 있다는 걸. 강하기만 하다면 우린 가슴에 하나보다 더 많은 진실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즉 정체성은 주어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들 중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야기가 물처럼 끊임없이 변해가듯이 우리의 존재 역시 인생의 이야기를 따라 흘러가며 하염없이 변화해 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써가는 작가이자 우리 삶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릴리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