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의 세계에서 사실의 세계로
<시튼 동물기>로 알려진 어니스트 톰프슨 시튼의 작품은 사실 <내가 알던 야생 동물들>(1898)을 비롯해 그가 동물들에 관해 발표한 수많은 글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제목입니다. 이솝 우화나 그림 동화 같은 옛이야기에서 등장한 동물들은 겉모습만 동물일 뿐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의인화된 동물들이었던데 반해, 시튼은 동물학자로서 오랫동안 동물을 직접 관찰하고 연구해서 글을 썼다는 점에서 '사실적 동물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시튼 역시 <내가 알던 야생 동물들>의 머리말에서 자신이 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동물 이야기들이 모두 비극적인 것은 실화이기 때문이다. 야생 동물은 언제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전세계 어린이들로부터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온 데에는 사실에 기반한 생동감 넘치는 묘사 외에도 야생의 동물들을 마치 '위대한 영웅'의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인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에 있습니다. 그래서 커럼포의 늑대 왕 로보는 마치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로맨티스트이자 동료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인해 파멸하고 마는 비극적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만약 한 동료 때문에 불운을 맞지만 않았다면, 로보는 지금까지 약탈을 일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보는 결국 역사 속의 수많은 영웅들과 똑같이 파멸하고 말았다. 혼자였다면 결코 무너지지 않았을 영웅이 믿었던 동료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몰락한 것이다."
"힘 잃은 사자나 자유를 빼앗긴 독수리, 또는 짝 잃은 비둘기는 상심해서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 타협을 모르는 이 무법자가 힘과 자유와 사랑을 모두 잃고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내가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동틀 무렵 로보는 여전히 차분하게 누워 있었지만 이미 영혼은 그에게서 떠났다는 사실뿐이다. 늑대 왕 로보는 죽은 것이다."
동물을 한 명의 영웅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시튼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동물은 그 종의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대표로서가 아니라 그 개체만의 개성과 매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로서 부각됩니다. "나의 주제는 무심하고 적대적인 인간의 눈에 비친 한 종의 일반적인 생태가 아니라, 각 동물의 진정한 개성과 삶의 관점이다."(시튼, <내가 알던 야생 동물들> 머리말에서) 그래서 늑대왕 로보는 '무법자'이자 '로맨티스트'이자 '비극적 영웅'이고, 산토끼 영웅 리틀워호스는 '자유의 투사'이며, 까마귀 실버스팟은 '지혜로운 현자'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튼의 동물기는 초등학생 독자들이 동화의 세계에서 사실의 세계로 넘어가는 문지방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화나 동화 속 말하는 동물들에 익숙한 아이들이 점차 그 세계를 벗어나 소통이 불가능한 타자로서 엄연히 삶 주변에 존재하지만 직접 접근하는 것이 녹록치 않은 야생 동물들에 친숙해지는 방편으로 시튼의 작품만큼 탁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동물의 야생성과 인간의 야만성
로보는 어깨높이가 90센티미터를 넘고, 몸무게도 68킬로그램이나 될 만큼 우람한 몸집을 지닌 늑대였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이유는 일반 늑대를 능가하는 엄청난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냥하려는 전국의 이름난 사냥꾼들을 번번히 좌절시킬 만큼 교활하고 영리했습니다. 인간이 놓은 독이 든 미끼와 덫을 귀신같이 알고 모조리 피했고, 입맛도 몹시 까다로워 사람이 죽인 가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갓 잡은 한 살배기 암소의 연한 살코기만 즐겼습니다. 문제는 로보 무리가 커럼포 일대의 농가를 습격해 죽여버린 가축만 2천 마리가 넘고, 시간이 갈수록 그 피해가 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로보는 지상에 현현한 악마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로보의 사냥에 성공한 시튼은 '약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로보의 아내인 블랑카를 포획한 후 그녀의 사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목장 주변에 냄새를 묻혀서 로보의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승리를 거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직접 대결해서 이기기 어려우니 정정당한한 대결을 피하고 상대의 연인이나 가족을 이용해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악당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일 뿐입니다. 포획 이전까지 선한 주인공과 파렴치한 악당의 위치에 있던 시튼과 로보의 관계는 어느새 뒤바뀌게 됩니다. 이런 자리 바꿈을 통해 시튼은 인간 내부에 도사린 야만성과 폭력성을 성찰합니다.
야생 동물 못지 않은 인간의 포악성은 토끼몰이로 무자비하게 토끼들을 사냥하는 장면이나, 붙잡은 토끼들을 경기장에 몰아넣고 사냥개들에게 잔인하게 물어뜯어 죽게 만드는 장면에서도 생생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마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의 튀는 핏방울과 흩어지는 살점들을 보고 환호하고 열광하던 광경이 토끼들과 사냥개들의 원형 경기장에서 재현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이 동물들에게 가하는 폭력성은 동물이 다른 동물에게 행사하는 그것과 다릅니다. 부엉이에게 희생당한 까마귀 실버스팟의 피투성이 사체는 안타까운 한숨을 자아내게 만들지만 부엉이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수반되지는 않습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그들은 엄격한 자연의 법칙에 종속되어 생과 사를 오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추방과 처벌을 통해 폭력성을 제거하고 스스로를 가축화하는 데 성공했기에 고도의 문명과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 의한 자연의 거의 완벽한 통제가 가능할 정도로 발달한 문명 사회에서 인간에 비해 턱없이 나약한 동물들에 가해지는 인간의 폭력은 아직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원시적 야만성을 상기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야만적 폭력성은 동물로 상징되는 연약한 다른 존재들, 가령, 외국인, 여성, 어린이 들에게 언제든 전이될 수 있다고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캐스케이도 지방에 사람들이 몰려와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총을 가진 사람과 개가 우르르 나타나자 코요테며 여우, 늑대, 오소리, 매의 수가 갑자기 줄어들면서 토끼들의 수효가 엄청나게 불어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곧 전염병이 돌아 토끼들이 무더기로 죽으면서 가장 튼튼하고 노련한 토끼들만이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매와 올빼미를 잡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어리석은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날개 달린 경찰관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자 토끼들이 엄청나게 불어났고, 그 결과 온 들판이 황폐해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법 때문에 피해를 본 농부들은 대대적으로 토끼몰이를 해서 토끼들을 몰살했습니다.
위 두 사례는 인간이 아무 생각없이 변화시킨 자연 환경이 인간과 자연에게 어떤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의 순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없이 내려진 인간의 부주의한 결정이 자연계를 교란시켰고, 그로 인해 생명체의 전면적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 역시 자연에 속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지구의 지배자로서 오만한 선택을 하게 된다면 인간 또한 토끼몰이를 당하는 토끼와 같은 운명을 조만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 비극적 운명을 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튼처럼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시튼은 까마귀들을 주의깊게 살펴본 후 그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섬세한 의사소통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숫자도 셀 수 있을 만큼 지혜로우며, 번갈이 보초 임무를 서서 무리를 보호하고, 어린 새끼들에게 체계적 교육을 시킬 만큼 체계적인 사회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합니다.
동물 해방 운동과 동물권 논의의 선구자인 피터 싱어는 인류가 동물을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과거 인종이나 성별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한 것과 마찬가지인 '종차별주의(speciesism)'라고 비판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동물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피터 싱어/김성한 번역, 동물 해방, 연암서가)
시튼과 피터 싱어의 생각을 이어받아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애완동물' 대신 '반려동물'로 불리게 되고, 펫샵에서 상품처럼 진열된 동물을 사는 대신 유기동물의 입양을 권장하는 것이 자연스런 문화로 자리잡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 동물의 권리에 대한 의식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동물을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는 사법 체계입니다. 우리나라의 민법 제98조는 인간 이외의 유체물을 물건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규정은 동물을 인간의 이익에 따라 마음대로 처분 가능한 물건으로 대해도 좋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로 인해 동물학대에 대한 처벌도 미약하고, 실험실에서 자행되는 동물학대나, 수족관이나 동물원에 전시되는 동물에 대한 동물권 침해도 심각합니다.(기사, 반려동물 그 너머, 동물권의 이면을 엿보다) 동물을 '물건'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생명'을 지닌 동등한 존재라는 인식이 확대될수록 우리 사회 역시 한층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해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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