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흥부가>는 왜 특별한가
놀부와 흥부의 이야기는 형제간의 우애와 권선징악을 다룬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읽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린이 책으로 꾸며진 '흥부와 놀부'는 대부분 경판본 소설 '흥부전'에서 화소를 끌어와 임의로 각색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흥부전', '홍보전', '박타령', '박홍보가', '연의 각' 등 다양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 '흥부가'의 이본이 약 37종이 넘지만 신재효의 판소리 창본 '박타령'의 멋과 맛을 살린 책은 거의 드믑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설가 이청준이 신재효의 판본에 바탕을 두고 판소리의 세계관과 미학을 제대로 살린 동화를 각색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입니다.
(가) 비단옷 가게에 물총을 쏘아 대면 어찌 되나? 옹기짐을 받쳐 놓은 지게 작대기를 걷어차 버리면 어찌 되나? 똥 누고 있는 아이를 그 자리에 주저앉히면 어찌 되나? 길 가는 나그네를 재워줄 듯 붙들었다가 해가 진 다음에 내쫓으면 어찌 되나.... ?
(나) 가난이야, 가난이야, 서러운 가난이야. 이 가난을 어찌 한 번이나 벗고 살 수가 있을 거나. 뒷산 산신령님네가 이 소원을 들어주실는가, 높은 하늘 북두칠성님네가 그걸 들어주실는가. 우리 서방 언제 한 번 배불리 먹어 보고, 우리 자식들 언제 한 번 따뜻이 입혀 볼고, 애고애고 무정하고 서러운 가난이야....
이 동화의 첫머리인 (가)는 판소리의 해학과 골계미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분명 심술맞은 놀부의 못된 행동들이지만 익살스런 문장을 읽다 보면 슬금슬금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흥부 아내가 신세한탄을 하는 (나)의 지문은 판소리의 서글픈 가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애절한 리듬감이 문장 전체에 휘몰아칩니다. 소설가 이청준은 '흥부가'의 원뜻만 충실하게 되살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달되는 판소리의 형식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재현해놓고 있습니다.
https://youtu.be/bNRubopHnk4?si=1UWvglQpHz4baIAs
놀부는 악하고, 흥부는 선한가
흔히 고전소설 속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이해해서 놀부는 악당이고 흥부는 착한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청준은 고전 소설의 단순한 이분법을 지양하고 흥부와 놀부를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흥부는 착하기는 하지만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오지랖은 넓은 인물로 그려집니다. "장가를 들고서도 집을 따로 나가 살 생각을 하지 않고 해마다 줄줄이 아이를 낳아 대어 식량을 크게 축내는가 하면, 어디 가서 돈 한 푼 벌어들이는 일이 없이 도리어 제 집안 물건 들어다 이웃 갖다 주기나 좋아하고, 별 상관도 없는 남의 일 돌봐주러 다니느라 제 집안일은 일 년 가야 손 한 번 대어 볼 틈 없이 지냈다."
놀부 역시 악당이긴 하나 머리가 썩 좋지 못하고 무식해서 웃음을 주는 캐릭터입니다. "가만있자, 이것이 뭐라더라? 끄트머리에 무슨 '장'자가 붙었었던 것 가튼데, 된장, 고추장, 초간장? 아니여, 아니여, 그것도 아니여. 그러면 송장, 구들장, 모기장? 아니여, 아니여, 석 자 가운데 '화'자도 하나 들어 있었제. 그렇다면 화순장, 화개장, 화장장.... ?"
실제로 수업 시간에 왕기철과 왕기석이 연기한 '화초장 대목'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면, 놀부를 욕심이 많지만 어리석은 인물로 이해하고 무척이나 재미있어 합니다. 적어도 놀부가 완전히 비호감인 악당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악한 인물이나 선한 인물 모두 인간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어 인간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는 점이 판소리가 갖고 있는 독특한 인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부는 왜 부자이고, 흥부는 왜 가난할까
놀부가 탄 박씨에서 나온 집안의 상전 노인은 종이었던 놀부의 선조들이 자신의 집안 재물을 훔쳐 달아나 부자가 된 것이라고 고발합니다. 박에서 나온 또 다른 거지 패거리 속 인물은 놀부의 조부 되는 덜렁쇠와 아비 되는 껄떡쇠 부자가 '가난 구호소'의 돈 삼천 냥을 빌려다 쓰고 드대로 도망쳐 자신들이 헐벗고 굶주리게 되었다고 비난합니다. 이것은 놀부의 재산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부정한 것임을 뜻합니다.
게다가 놀부는 아우 흥부의 게으름을 핑계로 동생네를 내쫓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과 재산을 몽땅 독차지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놀부는 동네에서 제일 가는 부자로 살면서도 흉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으로 돈을 불리고, 어린 머슴의 새경도 떼어먹고, 주막거리 외상 술값까지 떼어먹는 등 옷갖 편법을 동원해 부를 축적합니다.
이에 반해 흥부는 가난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선 그가 돈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놀부한테서 쫓겨난 이유는 그의 심술 때문이 아니라 17세기 이후 장자상속제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장남을 제사의 주관자로 확고하게 인정하는 종법이 보편화되고, 재산의 균분상속이 집안 경제력을 축소시킨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장자 중심 상속이 일반적인 것으로 자리잡게 됩니다.(기사, 균분상속서 장자 우대로 바뀐 조선시대 상속제도 조명)
그리고 재산 축적에 골몰하는 놀부와 달리 흥부는 '어디 가서 돈 한 푼 벌어들이는 일이 없이 도리어 제 집안 물건 들어다 이웃 갖다 주기나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흥부는 최소한의 경제적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 낡은 헌 갓에 누덕누덕 기워 댄 거지 꼴 도포 차림으로 간신히 양반 집안의 체면'을 갖추려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흥부를 조선 후기 몰락한 양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흥부가 가난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제 논밭 한 뙈기'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는 많은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신삼기, 새끼꼬기, 남의 논 모내기와 김매기, 산간 무덥 벌초하기, 새 각시 가마 메기, 방구들 놓기와 담쌓기, 초상난 집 부고 돌리기와 만장 들기, 대장간의 풀무질하기 등' 기회가 생기는 대로 품을 팔러 다니지만 그것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급기야 곤장을 대신 맞아 매값을 벌어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현대의 '워킹 푸어'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흥부의 가난이 그의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조선 후기 흉년, 질병, 세금 등으로 농지를 팔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은 높은 수작료와 삼정의 문란 같은 각종 수탈로 인해 생존의 극한까지 내몰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놀부는 부농이나 지주를 상징한 인물이고, 흥부는 가난한 소작농이나 몰락한 양반을 상징한 인물로 해석하면, '흥부가'는 단순히 형제간의 우애를 권장하는 교훈적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 후기 농민의 계층 분화와 삶을 풍자하는 사회 비판 소설로 읽을 수 있습니다.
흥부는 왜 복을 받고, 놀부는 왜 벌을 받았나
놀부가 악당인 이유는 그가 심술맞은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재산 불리기에 몰두하는 그의 물질만능주의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 관계를 황폐화시킨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사람의 도리와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는 사람'으로 '이웃에 대한 체면이나 마음의 부끄러움 같은 것과는 아예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은 부자로 살면서도 '남의 어려운 사정에는 도대체 눈이 멀어 지'내는 그는 동생 흥부를 경제적 궁핍으로 몰아넣을 뿐 아니라 공동체적 삶을 박살낸다는 점에서 위험한 인물입니다. 흥부가 구렁이로부터 어린 제비를 구해낸 반면, 놀부는 스스로 구렁이가 되어 제비 가족을 파괴하는 것은 그가 지닌 파괴적 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놀부의 박에서 나온 갖가지 풍각쟁이, 놀이패들, 초라니패, 남사당, 각설이패들이 놀부가 평소 구박하고 괄시하던 부류의 사람들인 것 역시 그로 인해 고통받고 쫓겨난 민초들의 분노를 반영한 것입니다.
이와 달리 흥부는 극빈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비 가족을 돕습니다. 그는 비록 말을 못하는 날짐승에게도 감정이입하여 '그 외롭고 아픈 처지'를 공감할 만큼 뛰어난 공감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없는 살림에도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정성스럽게 치료해주고, '제 죽은 아비, 어미를 대신하여' 날개짓 연습까지 도와 줍니다. 흥부가 복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그가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보다 연약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돌보려는 공동체적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제비로부터 받은 세 개의 박씨에서 나온 선물들은 모두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들뿐입니다. 재산을 축적하는데 혈안이 된 놀부가 이웃들을 착취하고 공동체를 파괴한다면, 흥부는 물질을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으로 족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모두가 풍족해질 때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흥부전'이 쓰여질 당시 민중들이 온몸으로 체감했던 빈부격차는 제비의 박씨라는 환상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을 만큼 해결불가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놀부라는 시장 경제의 원리가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조상들은 흥부라는 공동체의 원리가 재건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 말미에 과연 놀부가 개과천선한 것인지, 그 뒤에 두 형제가 어떻게 지냈을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떠한가요? 그 시절보다야 훨씬 물질적으로 풍족한 사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가난으로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면 사회가 풍족해진다는 근거 없는 경제이론인 '낙수효과이론'을 굳게 신봉하고 이를 제도로 고착시키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면 그뿐이라는 놀부심보를 가진 사람들을 뉴스에서 종종 보기도 합니다. 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 경제 원리에 따라 재편되면서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더 심해졌고, 가난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놀부는 그렇게 호되게 혼이 나고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여전히 마수를 뻗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경제 정의를 실현해줄 제비의 박씨를 오늘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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