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4학년

에리히 캐스트너/김서정 번역, 5월35일, 시공주니어

ddolappa72 2024. 10. 26. 09:28

 
상상력을 찾아서

장난스러운 삼촌 링겔후트와 수학을 잘하는 조카 콘라트는 말하는 검은 말 네그로카발로와 함께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콘라트가 남태평양에 대해서 작문을 해 오라는 숙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한테는 상상력이 없다고 단정하고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 모두한테 그 과제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뛰어난 수학자이자 작가이기도 했던 소피야 코발레프스카야(1850~1891)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붙같이 화를 냈을 법합니다. 그는 “수학이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없었던 이들은 수학을 산술과 혼동하며 건조하고 메마른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사실 가장 큰 상상력을 요구하는 건 과학이야. (중략) 영혼의 시인이 되지 않고서는 수학자가 될 수 없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사라 하트/고유경 번역, 수학의 아름다움이 서사가 된다면, 미래의창)

아마도 이 책의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는 '수학'을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성적 사고만 강요하는 교육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인 아이를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정답을 찾아내는 기계로 길러내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우리 사회가 생각해볼 주제입니다.

그래서 남태평양을 향한 삼촌과 조카의 여행길은 상상력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모험의 길이기도 합니다. 상상의 세계는 달력에 존재하지 않는 날짜인 '5월35일'처럼 규범과 규칙에서 벗어난 일탈의 시간이자, 여행의 출발지인 커다랗고 낡은 옷장처럼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예외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런 일탈과 예외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가 전복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게으름을 허하라!

그들의 첫 번째 방문지인 게으름뱅이의 나라에는 많은 신기한 물건들이 등장합니다. 버찌와 사과랑 배랑 무화과가 함께 열리는 나무, 손잡이만 당기면 깎은 사과 한 조각, 설탕에 절인 여러 가지 과일, 생크림이 든 무화과 과자가 나오는 자동 판매 장치, 꽁무니에 조그만 프라이팬을 달고 있다가 사람이 원하면 팬에 소시지를 곁들인 달걀 프라이나 아스파라거스 한 쪽이 장식된 오물렛을 낳는 닭 등. 이처럼 상상력은 기존의 것들을 융합하고 연결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게 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뒤섞고 혼합하면서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카오스야말로 창의성의 원천인 셈이지요.

그런데 왜 작가는 상상력을 찾아나선 삼촌과 조카가 게으름뱅이의 나라를 맨처음 방문하도록 했을까요? 게으름과 상상력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상상력을 키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여가 시간이 필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시간이 있어야 지혜가 깃들게 됩니다. "말하자면,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물러났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 들어주기, 꿈꾸기, 글쓰기 따위처럼 사람들이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버려진 순간에 깃들여 있다."(피에르 쌍소/함유선 번역, 게으름의 즐거움, 호미) 

게으름은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쓸모없어 보이는 활동 전부가 게으름입니다. 책읽기나 글쓰기도 그런 게으름의 목록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책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한국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믿음처럼 순수한 재미로 책을 읽는 것은 성적을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공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방영된 한 다큐멘터리는 서울대에 입학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시험과 상관없는 책들을 꾸준히 읽어 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다큐멘터리 K – 독자생존’ 3부 ‘공부의 힘’) 이것은 대다수의 한국 어머님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고, 독서가 공부의 기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하기를 원한다면 무조건 학원으로 내몰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사색할 시간을 더 많이 허락해야 합니다.

다큐멘터리K 3부 '공부의 힘', 출처:EBS



왜 상상력이 필요할까

게으름뱅이 나라는 사실 나라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치명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곳 주민들은 몸무게가 350Kg에 못 미치게 되면 쫓겨 나야 하는데, 타고난 성격이 활달한 사람들은 지루한 나머지 살이 빠져서 나라의 인구가 줄어드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뚱보 자이델바스트는 이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상상하는 것을 현실로 변하게 하는 장치를 개발해서 사람들이 지루할 틈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상상력은 문제 해결 능력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 변화나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같은 전대미문의 문제들을 해결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어진 정답이 없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그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이 꼭 필요합니다. 

상상력은 과거를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위대한 과거로 가는 성'에는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카를 대제, 바르바로사 황제, 나폴레옹 등과 같은 위대한 영웅들이 모여 살면서 포환 던지기나 테니스 시합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니발과 주석 병정 놀이에 몰두하던 발렌슈타인은 군인들이 불쌍하다며 말리는 콘라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정말 멍청한 아이로구나. 이런 때는 군인이 얼마나 쓰러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예비 부대가 얼마나 더 있느냐가 문제다." 사실 위대한 영웅들에게 병사 개개인의 목숨은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그저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영웅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작가의 상상력은 우리가 왜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 지를 효과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석 병정을 갖고 놀았던 콘라트에게 던지는 검은 말의 질문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힙니다. "그렇다면 너도 내일이면 저 장미 덤불 아래에 죽어 누워 있는 병정 중의 하나가 되고 싶니?"

상상력은 현재를 되돌아 보게 합니다. '거꾸로 나라'에서 아이들은 직장에 다니고, 자기 아이들을 못살게 굴거나 벌주는 나쁜 부모들이 학교에 다닙니다. 수학을 못한다고 아들을 몇 시간이나 발코니에 가둬두었던 아빠나, 딸이 배가 고프다고 해도 식사를 제대로 차려주지 않았던 엄마가 이 학교에서 재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뒤바꿔서 작가는 아이들한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상상력은 미래를 예측하게 합니다. 완전히 자동화된 도시인 '엘렉트로폴리스'는 먹고 사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기계가 조달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1931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그려낸 미래 사회에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움직이는 무빙워크나 무선 전화기가 등장해서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소들이 기계 속으로 들어가 도살되어 가공된 뒤 버터, 가죽 신발, 치즈, 깡통 등으로 자동 생산되는 장면은 공포스럽습니다. 자동화로 인해 노동에서 해방된 인류의 미래가 풍요롭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비인간적인 잔혹함이 숨겨져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천안문 광장의 '탱크맨'(1989년 6월5일), 출처:위키피디아



5월35일을 상상하기

이 소설에서 5월35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신기한 날입니다. 하지만 이 날짜는 어떤 불행한 사건을 연상시키는 숫자가 되었습니다.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친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은 군대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학살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중화권에서는 보통 '육사' 혹은 '육사사건'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6월4일'이라는 날짜와 '육사'라는 말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5월35일이라는 가상의 날짜가 대신 사용되었습니다.(기사, [성민엽의 문학으로 세상읽기] 5월 35일에 다시 읽는 그 시 - 베이다오, ‘회답’) 나치에 의해 박해받고 책이 불태워지기도 했던 에리히 캐스트너의 개인적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5월35일에 다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작가는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상상은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대신 "뭔가 더 아름다운 걸 상상하고 다른 사람들 위해서 좋은 걸" 상상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달력에 없는 '5월35일'을 아름다운 상상으로 가득 채우고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변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