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엔 '호두까기 인형'을
해마다 연말이 되면 '호두까기 인형'의 발레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거리마다 붙어 있는 광경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12월을 알리는 전령처럼 되어 버린 그 공연을 직접 관람하지는 못했더라도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1840∼1893)가 창조했다는 '사탕 요정의 춤', '중국인의 춤', '꽃의 왈츠' 등은 분명 어디선가 한 번쯤을 들어봤을 겁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에게 영감을 준 원작이 독일의 작가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1776~1822), 줄여서 에.테.아 호프만이 쓴 <호두까기 인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호프만의 문학은 차이코프스키 외에도 슈만이나 오펜바흐 등 수많은 음악가들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을 만큼 음악가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호프만은 법관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한 들끓는 열정 때문에 낮에는 법관으로 일하고 밤에는 예술가들과 어울리는 이중생활을 해서 '밤의 호프만', '도깨비 호프만'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던 그는 물의 요정을 소재로 한 오페라 <운디네>를 작곡하기도 했고, 교향곡이나 발레곡, 피아노곡도 작곡했습니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기괴함과 섬뜩함, 유머와 풍자가 뒤섞인 그의 작품 스타일은 <모래 사나이>,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에서뿐만 아니라 <호두까기 인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어린 소녀 마리가 머리 일곱 개를 가진 생쥐 왕과 싸우는 호두까기 인형을 도와주고 그 보답으로 인형의 나라를 여행한다는 줄거리를 가진 동화는 발레나 음악과 또다른 매력으로 아이들을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환상과 현실의 현란한 저글링
이 동화는 현실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가 서로 교차하는 구조로 짜여져 있습니다. 마리가 드로셀마이어 대부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는 이야기(1장~3장) 다음에는 마리가 한밤중에 호두까기 인형이 생쥐 왕과 전투를 벌이는 광경을 목격하는 이야기(4장~5장)가 이어집니다. 드로셀마이어가 부상을 당한 마리에게 병문안을 와서(6장) 단단한 호두에 대한 동화를 들려줍니다.(7장~9장) 마리는 호두까기 인형이 사실은 마법에 걸린 대부의 조카라고 생각하고(10장) 그를 도와 생쥐 왕을 물리치고 그 보답으로 인형의 나라로 여행을 다녀옵니다.(11장~13장) 대부를 찾아온 조카는 마리에게 청혼을 하고 그 둘은 결혼을 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14장)
수업에서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액자구조로 씌어진 이야기로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드로셀마이어 대부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마리가 대부로부터 피를리파트 공주 이야기를 듣고 점차 꿈과 현실을 혼동하게 되는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액자 테두리에는 인형을 선물받고 혼란스러워 하는 마리의 이야기가 있고, 액자 안 그림에는 단단한 호두에 대한 동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액자 밖 현실은 액자 안 환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현실은 다시 환상에 영향을 끼쳐서 그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작가는 마치 현실이란 공과 환상이라는 공을 현란하게 저글링하면서 독자들에게 이 두 공 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 묻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드로셀마이어가 마리를 실제와 상상을 구분할 수 없는 경계 지역으로 내몰아가듯 독자 역시 점차 두 세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회색 지역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것이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에 대한 동화란다."로 끝맺음하는 동화의 마지막 문장 역시 두 영역들 간의 경계를 지우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 직전에 마리와 대부의 조카가 결혼하게 되는 결말을 읽은 독자는 저 마지막 문장을 보고 지금껏 자신이 읽은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아이들은 드로셀마이어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고등법원 판사이기도 한 드로셀마이어는 직접 시계를 만들 수도 있을 만큼 손재주가 많은 사람이면서, 언제나 아이들을 위해 신기한 물건들을 호주머니에 넣어 올 만큼 아이들을 사랑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친절해 보이는 그의 이면에는 섬뜩하고 기괴한 면모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 "마리는 겁이 났다. 드로셀마이어 대부가 올빼미 대신 벽시계 위에 앉아서 노란 외투의 양쪽 옷자락을 마치 날개처럼 내려뜨리고 있는 걸 보았을 때는 너무 놀란 나머지 달아나 버릴 뻔했다."
(나) "대부는 평소보다 훨씬 더 못생겨 보였으며, 마치 줄 달린 인형처럼 누가 잡아 당기는 듯이 오른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다른 한편 드로셀마이어는 마리가 환상의 세계에 빠져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는 마리에게 이렇게 말해서 마리가 호두까기 인형을 자신의 조카가 저주받은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너는 피틀리파트 공주처럼 타고난 공주란다. 왜냐하면 아름답고 찬란한 왕국을 다스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네가 그 불쌍한 호두까기 인형 편을 들면, 여러 곳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추격하고 있는 생쥐 왕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될 거야. 그러나 네가 아니라, 너, 오직 너 혼자만이 호두까기 인형을 구할 수 있단다." 하지만 그 뒤에 마리가 그에게 호두까기 인형은 대부의 조카이고, 자신이 그를 도와 생쥐 왕을 물리쳐서 저주에서 풀어주었다고 말하자 그는 단호하게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라며 그녀의 말을 부정합니다. 드로셀마이어의 이런 이중적 태도는 환상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기면서도 냉철한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작가 호프만의 문학적 신념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 결과 마리는 자신이 경험한 멋지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그것을 함부로 타인들에게 발설하지 않는 신중함을 갖춘 인물로 변화합니다. 작가는 이 동화에서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묻습니다. 변화한 마리의 모습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환상을 추구하지만 이성적인 존재이며, 상상력을 통해 누구나 찬란한 왕국을 다스리는 공주나 왕자가 될 수 있다.
늘 선물을 받기만 했던 아이는 호두까기 인형을 보호할 줄 아는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호두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갖가지 문제를 뜻합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어렵고 해결하기 힘든 일을 두고 "그건 정말 너무 단단한 호두였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두까기 인형은 망가지고 못생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갖가지 호두를 깨다가 다치고 상하고, 외모마저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어 갑니다.
'학년별 책읽기 > 4학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니스트 시튼/햇살과나무꾼 번역, 시튼 동물기1, 논장 (1) | 2025.02.09 |
---|---|
이청준, 흥부가_놀부는 선생이 많다, 문학과지성사 (8) | 2024.11.17 |
오카 슈조/김난주 번역, 우리 누나, 웅진주니어 (3) | 2024.11.03 |
에리히 캐스트너/김서정 번역, 5월35일, 시공주니어 (8) | 2024.10.26 |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유혜자, 깡통소년, 미래엔아이세움 (2) | 2024.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