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2학년

이상, 황소와 도깨비

ddolappa72 2024. 11. 23. 12:30
실린곳 : 권정생, 이상, 정휘창, 원숭이 꽃신, 여우오줌

 
'황소와 도깨비'는 누가 쓴 동화인가?

지금까지 '황소와 도깨비'는 <날개>와 <오감도>로 유명한 천재 시인 이상이 쓴 유일한 동화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근대 동화 연구자인 김영순 씨는 이 동화가 이상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193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황소와 도깨비'는 그보다 13년 전인 1924년 일본 아동문예지 「아까이토」에 처음 발표된 일본작가 토요시마 요시오(豊島與志雄)의 동화 '천하제일의 말'을 번안한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두 작품을 비교했을 때 줄거리, 구성, 전개 방식, 어휘 등이 상당히 일치한다고 밝혔습니다.

더 나아가 김씨는 '황소와 도깨비'가 이상이 쓴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상의 글쓰기 특징인 "도시스런 매개어의 사용"과 작품의 산골이미지는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문장도 조잡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작가의 이름 표기도 의심스럽다고 합니다. 이 동화는 우리말 신문 <매일신보>에 5회에 걸쳐서 연재되었는데 첫음에는 작가의 이름을  김해경(金海卿)으로 표기했으나 2회분부터 마지막 5회까지는 김해향(金海鄕)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이상이 일본에서 죽기 한 달 전인 1937년 3월 매일신보에 5회 연재됐다는 당시 정황도 설득력이 없다는 것입니다.(기사, 천재시인 유일한 동화로 알려진 '황소와 도깨비' "사실.. 이상 작품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김영순 씨가 '황소와 도깨비는 이상의 창작인가'라는 제목으로 2003년 <창비어린이>에 발표한 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별다른 후속조치 없이 이 동화가 이상의 유일한 동화로 표기되어 출판되고 있는 것은 뭔가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동문학계나 문학계에서 보다 정확한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이 작품을 이상의 것이라 소개하는 출판물이 사라져야 정상이 아닌가요? 

'황소와 도깨비'를 둘러싼 논란과 연관해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같은 작가가 쓴 동일한 제목의 작품이라도 출판사마다 표기법이나 표현방식이 다른 경우가 종종 발견됩니다. 특히 마해송, 방정환, 이원수, 강소천 등 원로 아동문학가의 작품일수록 그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것은 아동문학계와 출판업계가 정교한 문헌학적 작업을 통해 결정본을 만들지 않고 필요에 따라 아무렇게나 작품을 출판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아이들이 읽는 책일수록 맞춤법은 물론 편집도 더 신경써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이런 기본도 갖추지 못한 출판물들을 보면 화가 날 지경입니다. 독일의 경우 작가의 사후 연구자들의 세심한 연구를 바탕으로 비판본이 나오면 이것을 근거로 다양한 출판물이 제작되는 풍토가 정착되었습니다. 한국의 아동문학이 지금보다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본을 갖추려는 노력이 절실해 보입니다.
 



돌쇠와 황소와 새끼 도깨비

이 동화는 돌쇠와 황소 그리고 새끼 도깨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각 인물들의 성격과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먼저 돌쇠는 부모도 친척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며, 먹을 것이 떨어지면 그제야 나무를 해서 팔러 나갈 만큼 게으른 인물입니다. 황소는 돌쇠가 재산을 몽땅 털어서 산 귀중한 재산이자 돌쇠의 유일한 친구로 그려집니다. 이들 사이에 산오뚝이로 불리는 새끼 도깨비가 끼어들게 됩니다. 아기 도깨비는 친구들과 놀러 나왔다가 사냥개에 물려 꼬리가 잘리는 바람에 산속에 버려진 상황입니다. 도깨비는 돌쇠가 애지중지하는 황소의 몸 속에 두 달만 살게 해주면 황소의 힘이 지금보다 열 배 세어지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만약 돌쇠였다면 도깨비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고. 의외로 상당수의 아이들은 도깨비의 제안을 거절했을 거라 답을 합니다. 그 이유는 황소는 돌쇠의 유일한 가족인데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라 답한 아이는 아기 도깨비의 처지가 불쌍해서 그렇게 했을 거라 대답합니다. 간혹 황소의 힘을 열 배나 세지도록 해주겠다는 도깨비의 제안이 매력적이라 도깨비의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도깨비의 제안을 수용한 아이한테 다른 친구들이 반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도깨비가 약속을 지킬거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니?"

이처럼 돌쇠가 도깨비에게 황소의 몸을 빌려주기로 결정한 행동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자신과 황소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지만, 양심 때문에 새끼 도깨비의 불쌍한 처지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윤리적 갈등의 한복판으로 아이들을 인도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려보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묘미입니다. 이때 아이가 도깨비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동정심이 부족하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돌쇠가 처음 만난 도깨비의 불쌍한 처지보다 자신과 황소가 맺고 있는 관계를 더 소중하게 생각해서 내린 결정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할 수 있나요?

'도덕'으로 번역되는 'moral'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행하도록 가르칩니다. 그것을 따라야 할 이유는 그것이 공동체의 의무이자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서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고 말하는 도덕은 규칙을 지키는 것을 '선'이라 하고 그것을 어기는 것을 '악'으로 규정합니다. 도덕은 이처럼 '선과 악'이라는 범주에 의해 작동합니다. 이와 달리 '윤리'로 번역되는 'ethic'은 '좋음'과 '나쁨'이란 범주를 기초로 작동합니다. 초월적 규칙을 전제한 도덕과 달리 윤리적 규칙은 상황에 따라 변경되거나 폐기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이 우리에게 '기쁨'이나 '이득'을 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윤리적 선택은 상황이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내재적'입니다.(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그러므로 불쌍한 도깨비를 무조건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도덕적 규칙이라면, 돌쇠가 자신과 황소의 관계를 고려해서 도깨비의 제안을 수용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올바른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체적 인격으로 성장하는데 더 유익하다고 믿습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

돌쇠와 도깨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작 몸을 빌려줘야 할 당사자인 황소가 소외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황소의 입장에서 판단을 내려보도록 합니다. 돌쇠가 도깨비에게 황소의 몸을 빌려주기로 결정했을 때 황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또 그 대가로 자신의 힘이 평소보다 열 배나 세어졌을 때 황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이들은 아무리 주인이라도 돌쇠가 황소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도깨비에게 몸을 빌려준 것은 옳지 못했다고 항의합니다. 꼼꼼하게 책을 읽은 아이들은 황소가 눈빛으로 돌쇠에게 동의한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도깨비가 약속을 지켜 황소의 힘이 세어졌으니 공정한 거래였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황소의 뱃속으로 들어간 도깨비가 두 달 뒤 너무나 살이 쪄서 황소의 몸 밖을 빠져나오기 곤란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이 순간 황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또 자신의 주인 돌쇠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요? 다행히 이 문제는 황소가 돌쇠의 하품을 따라하며 목구멍을 크게 벌리자 도깨비가 빠져나오게 되며 해결됩니다.

중요한 점은 아이들이 아무리 돌쇠가 황소의 주인이더라도 황소의 의견을 무시하고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나, 심지어 도깨비 같은 영적 존재와의 관계마저 수평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지닌 이런 사고 방식을 학자들은 '신화적 사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종종 사물들과 대화를 하거나 친구처럼 여기는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화적 사고'는 인간의 환경 파괴로 인해 전지구적 위기를 겪고 있는 현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른들이 아이들로부터 배워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한 워즈워드의 시가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