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기대가 어린 영혼을 잠식하다
누구나 어릴 적에는 멋지게 성장한 미래의 자신을 상상해 보곤 합니다. 자신 앞에 아무 것도 그려넣지 않은 순백의 캔버스가 펼쳐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캔버스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해 보면 어린 시절 꿈꾸던 자신과 얼마나 닮아 있던가요? 동화 속 주인공인 우로의 아빠도 어린 시절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에선 포목점 주인으로 생계를 이어갑니다. 우로의 아빠는 포목점 주인이란 자화상에 만족했을까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빠는 미술에 소질있는 딸 우로가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로에게 이름난 화가 선생님을 붙여 가르치고, 최고급 캔버스를 마련해 줍니다. 마치 자신의 못 이룬 꿈을 우로를 통해 대신 이루려 하는 듯이. 그런데 이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과한 욕심이 아닌가요? 자식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지만, 자식을 통해 자신의 좌절된 꿈을 자식에게 투사해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욕망은 자식과 부모 모두를 힘들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빠의 기대와 열망은 우로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물리쳐야 했던 고난의 첫 장애물이었습니다. 우로와 이름이 같은 우로마(雨露麻·Yulu linen) 캔버스는 최고급 캔버스로 미술계의 거장 서창 선생이 주문했지만 돌아가시는 바람에 화방에 남게 된 것입니다. 우로는 그 캔버스 위에 멋지게 자화상을 그리려 하지만 캔버스는 번번히 우로를 밀쳐내고 그림을 흘러내리게 합니다. 대가의 화구(畵具)가 되어야 했을 자신의 운명이 어린 소녀의 습작으로 전락한 것이 못내 못마땅했던 것일까요? 최고급 캔버스 우로마는 심술궂은 사물이 되어 어린 우로를 괴롭히고 좌절시킵니다. 정확히는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와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우로의 열망이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우로는 과연 어떻게 이 고난을 헤쳐나갔을까요?
등장인물의 마음 읽어내기
이 동화는 인물들의 내면을 자세하게 서술하는 대신 그들의 외적 행동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이 읽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각 상황에서 주인공 우로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질문해서 아이들이 인물의 마음을 추측해 보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우로의 마음이 변화하는 과정을 꼼꼼히 읽어내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방에서 우로마 캔버스를 처음 만났을 때 우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막상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잘 그려지지 않았을 때 어떤 기분일지 질문해서 아이들이 우로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아이들이 의외로 우로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우로처럼 처음 태권도나 피아노를 배울 때 힘들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꾸준히 하다보니 재미있어 지고 지금을 잘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그리고 우로 아빠가 수풀에 캔버스를 버린 장면을 보고 '그 값비싼 캔버스를 버리다니 우로 아빠는 바보인가 봐.'라고 말해 저를 웃음짓게 만들기도 합니다.
책 읽기는 이처럼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우로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을 보면 아이들이 평소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자신의 마음도 돌아보게 됩니다. 인물을 이해하게 될수록 그에 공감하게 되고 세상과 자신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게 됩니다.
아이는 실패를 딛고 성장한다
우로가 그림 그리기에 계속해서 실패하자 밥도 먹지 않고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부모는 걱정된 나머지 우로의 캔버스를 수풀에 버립니다. 우로는 어둠을 헤치고 아빠가 버린 캔버스를 필사적으로 찾아 옵니다. 이때 우로의 엄마와 아빠는 우로가 울면서 쓰레기통을 뒤지는데도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볼 뿐 결코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 동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이가 힘들어 하거나 괴로워 하는 것을 치우거나 없애주는 것을 부모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는 것은 세상의 어두움을 경험하고 혼자의 힘으로 이겨낼 때만 가능합니다. 실제로 과잉보호를 받은 아이들이 제 나이에 맞게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몸은 자연의 순리대로 커졌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해 친구들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고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아이가 올바로 자라도록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우로의 부모처럼 멀지 않은 곳에서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다치지 않도록 지켜주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가 실패하고 좌절할 때 스스로 그것을 이겨내도록 기회를 주고 용기를 북돋우는 것입니다. 네 발로 기던 아이가 두 발로 일어서서 걷기 위해서는 무수히 넘어지고 일어서는 연습을 했을 것입니다. 아이가 넘어져서 아파하고 운다고 부모가 개입하게 되면 아이는 영영 혼자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자화상 그리기가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노먼 로크웰의 '세 명이 있는 자화상'은 자화상 그리기의 어려움을 유쾌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나'는 빼꼼히 거울을 들여다보는 '나', 거울에 비친 나를 그리는 '나' 그리고 화폭에 담긴 '나'까지 세 명입니다. 정확히는 이렇게 분열된 자화상을 그린 그림 밖의 '나'까지 네 명의 '나'가 존재합니다. 이들 중 어떤 것인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의 모습이 이처럼 분열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도 매번 다른 데다 자신을 바라 보는 타인의 시선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를 이상화시키고 싶은 욕망과도 싸우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도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이 힘들다고 자화상을 그리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우로마는 추운 지방에서 비, 바람, 서리 등을 맞으며 자란 아마로 만들어진 리넨천입니다. 혹독한 환경을 견디고 자란 아마는 보통 리넨보다 훨씬 값비싼 고급 원단의 재료가 됩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이겨낸 어려움의 크기만큼 그 아이의 영혼도 성장할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의 자화상을 잘 그려나갈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는 지혜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이 그렇긴 하지만 이 책은 아이와 부모가 함께 읽어볼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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