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1

박홍순, 거꾸로 보는 이솝 우화, 마로니에북스

ddolappa72 2024. 10. 19. 16:58

 

읽기는 곧 쓰기다

'토끼와 거북이', '여우와 신포도', '북풍과 해님', '양치기 소년과 늑대' 등은 어린 시절부터 흔히 들어온 이솝의 우화입니다. 우화가 '삶의 지혜와 교훈을 재미있는 동물 이야기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보니 어린 학생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많이 읽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솝의 '우화집'을 직접 읽어보면 조금은 당황스런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교훈적 이야기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냉혹할 정도로 현실적이거나 냉소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른생활'용 우화들은 대개 이솝이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에서 빅토리아 시대에 도덕주의자들이 이솝 우화를 번역 출판하면서 기준에 맞지 않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그 대신 편집자 스스로 창작한 이야기를 삽입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주경철,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사계절) 우리가 알고 있던 이솝의 우화들은 이렇게 도덕적으로 색칠되어 소개된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 옆 인문학>의 저자로 유명한 박홍순은 이솝 우화가 '보편타당한 교훈을 담고 있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 노예 신분이던 이솝이 쓴 우화에는 당대의 시대적 한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노예노동에 기초한 신분제 사회의 논리, 강자의 입장에서 정당화된 약육강식의 냉혹한 논리, 심지어 성공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포함한 부도덕한 짓도 거리낄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왜곡된 도덕과 부당한 논리'가 반영된 이솝의 텍스트를 새롭게 읽고 우리 시대에 맞게 다시 쓰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고전 읽기는 항상 고전을 새롭게 쓰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모든 책읽기는 사실 독자가 책을 새롭게 써 내려가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수용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한 권의 책에서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수많은 텍스트들이 파생될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고 현재에도 그런 파생된 텍스트를 생산해낼 수 있는 책을 우리는 '고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활용한 성공회대학교 광고



토끼는 왜 거북이와 달리기 경주를 했을까?

토끼와 거북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흔히 이 우화에서 '능력보다 노력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읽어냅니다. 만약 곁을 지나가던 거북이의 소리에 잠이 깬 토끼가 열심히 달려 경주를 이긴 것으로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어떤 교훈을 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요? 토끼에 도전한 어리석은 거북이를 비웃으며 노력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처럼 짦은 서사를 지닌 우화는 몇 가지 조건을 바꾸면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습니다.

이 우화를 활용한 성공회대학교의 광고도 있습니다. 이 광고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이 광고는 잠을 자던 토끼를 깨우지 않은 거북이한테 페어플레이 정신이 부족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토끼를 깨워 함께 갔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학생들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경기 중에 잠이 든 것은 토끼 책임인데 왜 거북이가 깨워서 함께 가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둘이 함께 결승점에 들어가면 그것이 무슨 경기냐고 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광고와 학생들이 간과한 점이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육지에서 경주를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불공정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경주 중에 잠든 토끼를 깨우지 않은 거북이가 페어플레이를 안 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공정한 페어플레이를 할 수 없도록 설계된 경쟁 조건 자체가 문제입니다. 만약 이 둘의 경기가 절반은 육지에서, 또 절반은 강에서 하도록 규칙이 정해졌다면 어땠을까요? 서로 공정한 조건에서 정정당당한 대결을 펼쳐 승자와 패자와 결정되었더라면, 승자가 되더라도 패자를 깔보지 않고, 패자가 되더라도 아쉽지만 상대의 승리를 함께 기뻐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이솝의 원전을 꼼꼼히 살펴보고 거북이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찾아 보도록 합니다. 토끼는 느려 터진 거북이를 놀립니다. 발끈한 거북이는 트끼가 아무리 빨라도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토끼는 거북이가 무슨 꿍꿍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 하며 내기에 응합니다. 감히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려 하다니!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토끼는 당황스러워 합니다. 큰소리를 치던 거북이가 그저 평소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북이를 이긴다 한들 토끼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거북이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토끼는 어떻게든 이 경주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숨 자고 달리기로 결정합니다. 스스로 승리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서 이기게 된다면 이 무의미한 경주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토끼의 결정으로 승패는 불확실해지고, 거북이에게도 기회가 찾아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북이가 토끼를 상대로 경주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단순히 토끼가 방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수수께끼 같은 발언으로 토끼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거북이의 고도의 심리 전술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김태환, 우화의 서사학, 문학과지성사)



텍스트의 결을 거슬러 읽기
 
우화 '여우와 신포도'에서 여우는 포도송이를 따려 했으나 너무 높이 달려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직 익지도 않은걸, 뭐"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이 우화는 능력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해 놓곤 환경을 탓하는 사람을 조롱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우의 대사를 자기 변명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사를 긍정으로 해석해 볼 수는 없을까요? 설령 능력 부족으로 실패했다 하더라도 굳이 자신을 자책하며 궁지에 몰아넣을 필요가 있을까요? 차라리 자신을 위로하고 실현 가능한 다른 대상을 찾는 것이 여우 본인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결정이 아닐까요?

이번에는 바람에 쉽게 허리를 굽히는 갈대와 바람에 맞서는 참을성을 자랑하는 감람나무를 살펴 봅시다. 폭풍에 허리가 부러진 감람나무를 보며 살아남은 갈대는 무슨 말을 했을까요? 이때 감람나무는 갈대에게 뭐라고 변명했을까요? 이런 질문을 통해 학생들이 텍스트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텍스트의 주제나 메시지가 이미 텍스트 내부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 의해 얼마든지 다양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주어진 정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훈련을 받아온 학생들이 특히 어려워 하는 부분입니다.

학생들은 폭풍 같은 커다란 시련이 다가올 때 재빨리 순응하지 못한 감람나무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갈대가 지혜롭다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우화를 일제 시대에 읽었다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었을까요? 친일파들이 자신들처럼 시대 변화에 재빨리 순응하지 못하고 사라진 나라를 되찾겠다고 무모한 도전을 하는 독립 운동가들을 비웃을 때 사용되지는 않았을까요? 그리고 갈대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본인들의 유연함도 한 몫 했겠지만 갈대의 주변에서 허리가 부러져 가며 바람을 막아주던 감람나무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텍스트 읽기는 주어진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텍스트의 결을 거슬러 가며 독자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는 활동입니다. 


우화를 창조적으로 다시 쓰기

아이작 아시모프는 우화 '거위의 간'을 공상과학 소설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거위가 황금알을 낳는 방식은 매우 과학적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거위의 간은 산소-18 동위원소를 섭취하여 철-56을 거쳐 금으로 변환시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산소를 금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방사선이 뿜어져 나와야 하지만 거위의 몸 속에 있는 미지의 효소가 방사능 물질을 무해하게 변화시킨다는 점입니다. 만약 그 원리만 알아낼 수 있다면 인류는 방사능으로 인한 위협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X선이 거위의 간을 투과하지 못해 X선 검사를 할 수가 없고, 거위가 모든 방사능을 흡수하여 변환하기 때문에 방사능 동위원소 검사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주인공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우화에서처럼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했을까요?

주인공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 소설의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아이디어를 공모받을 것을 제안합니다. 과학 소설의 독자들은 상상력이 풍부하므로 좋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고, 어차피 소설이라 생각할테니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관한 기밀 유지도 문제가 없습니다.

아시모프의 이 소설은 이솝 우화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화를 과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독창적인 이야기로 재탄생시켰습니다. 그는 현대의 독자들이 관심을 갖도록 방사능 문제를 텍스트 안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어리석게 거위의 배를 갈랐던 원작과 달리 그는 소설의 허구성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읽기는 쓰기로 끝나야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마음에 드는 우화 하나를 골라 희곡이나 소설 형식으로 각색해 보도록 합니다. 게으르다고 놀림을 받던 베짱이는 유명 아이돌이 되머 큰 성공을 거두지만, 일중독에 빠진 개미는 과로로 급사하는 불운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우화를 다시 재구성해 보면서 학생들은 우화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더 잘 알게 됩니다. 또 어떤 방식으로 의미가 생산되고 있는지도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허구적 이야기를 써 봄으로써 학생들은 텍스트의 구조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그것은 그들에게 더 나은 독서로 안내하게 됩니다. 곧 읽기는 쓰기이며, 쓰기는 더 나은 읽기로 향한 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