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2학년

프란치스카 비어만/김경연 번역, 책 먹는 여우, 주니어김영사

ddolappa72 2024. 9. 29. 12:38

 
여우의 책 먹기

이 책에 등장하는 여우 아저씨는 책을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책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는 책에 소금과 후추까지 뿌려가며 집어 삼킵니다. 그에게 책은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킁킁 냄새도 맡고, 쪽쪽 핥아도 보고, 번개처럼 빠르게 소금과 후추 병을 꺼내 톡톡 양념을 치고, 덮석 책을 베어 물고 꼭꼭 씹어 먹습니다.

작가 프란치스카 비어만은 '마음의 양식'인 책을 축어적으로 해석해서 독서에 대한 유머러스한 동화를 창작해 냈습니다. 즉, 주인공 여우에게 책 읽기는 책 먹기로 이해되는 활동입니다. 독서를 육체적 활동으로 표현하자 오히려 독서가 우리에게 지닌 의미가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육체를 지탱하기 위해 매일 밥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의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꼬박꼬박 책을 읽어야 합니다.

주인공이 여우인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꾀가 많은 여우는 온갖 것을 알지만, 가시 바늘을 세우는 것 말고는 특별한 재주가 없는 고슴도치는 대신에 강력한 한방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그리스 시인의 말에 착상을 해서 고슴도치형 인간과 여우형 인간을 구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고슴도치형 인간은 다양한 현상들 속에서 모든 일을 관통하는 명료하고 일관된 원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와 달리 여우형 인간은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일들을 이해하지만 그것들을 꿰뚫는 유일한 자리에 도달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는 예술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벌린/강주헌, 고슴도치와 여우, 애플북스)

동화 속 여우도 수많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킬 뿐 그 안에서 하나의 진리를 찾으려 애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우가 먹을 책을 고르기 전 반드시 코로 냄새도 맡고 혀로 핥아보는 탐색의 과정을 갖고, 또 책을 먹을 때는 반드시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우는 아무 책이나 먹는 것이 아니라 섬세한 감식력을 동원해 자신의 식성에 딱 맞는 책을 고르고, 그렇게 선별한 책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꼭꼭 씹어 먹습니다. 독서를 할 때는 자신에게 맞는 책을 골라 자신만의 시선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세계이다

어디서 읽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이들이 하나의 단어를 익히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넓혀주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면서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간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어휘력이 풍부한 아이들이 책도 잘 이해하고 더 오래 기억하고, 주변 환경에 대해 다채로운 반응을 보입니다. 

이 책에도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잘 모를 법한 단어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허기, 송두리째, 샅샅이, 교도관, 전당포, 베스트셀러, 사서, 퉁명스럽게, 이러쿵저러쿵, 으름장, 게걸스럽게 등등. 이런 단어들을 영어 단어 외우듯 그냥 외우게 한다고 해서 아이들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문장 속에서 단어의 뜻을 유추해 보기도 하고, 단어를 이용해 문장도 만들어 보고, 끝말잇기 게임이나 빙고 게임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재미있게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책 읽기 교육의 핵심은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학년일수록 책 읽기가 재미있는 활동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수업은 혼자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책 읽기의 재미를 찾아주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책이라는 신비한 여행 장치

여우는 책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책을 가까이 하지만 아이들은 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써 보라고 합니다. 크게 엄마나 선생님이 읽으라고 해서 읽는다고 답하는 아이들과 책읽기가 재미있고 지식을 넓힐 수 있어서 좋다고 대답하는 아이들로 나뉩니다. 전자에 속한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서 후자에 속하게 되면 다행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책읽기 수업도 그만두고 공부와도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독서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면 공부에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또 다시 아이들에게 책이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문장으로 써 보라고 합니다. 책은 선생님이다, 책은 엄마다, 책은 맛있는 음식이다, 책은 놀이터다 등 다양한 답변과 그럴듯한 이유들이 쏟아집니다. 저는 아이들한테 책이 친구가 되길 원합니다. 나와 함께 낯선 세계로 여행을 가서 슬프고 기쁜 다양한 경험들과 삶의 지혜를 선물해 줄 수 있는 속깊은 친구.

알베르토 망겔은 <은유가 된 독자>에서 책 읽는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눠서 사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여행자로서의 독자'입니다. 이 유형의 독자는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진 세상을 탐험하고 관조하면서 세계의 근원을 향해 여행을 떠납니다. 두 번째 유형은 '상아탑에 갇힌 독자'입니다. 이 유형은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칩거해 세상으로부터 등을 지고 책의 세계로 도피한 채 세상의 의무를 기피하는 자입니다. 마지막 유형은 '책벌레로서 독자'입니다.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과식으로서 독서는 자신에게 살과 피가 되기는커녕 과식으로 몸에 탈이 나게 합니다. 다행히 이 책의 여우는 책벌레 유형이긴 하나 '소금과 후추'로 간을 쳐 먹을 만큼 분별력이 있고, 본인이 직접 책을 쓰게 되면서 마구잡이로 책을 읽는 습관을 버리게 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추천하는 독서자의 유형은 당연히 '여행자로서의 독자'입니다. 책은 일종의 신비한 여행 장치입니다. 그 장치에 올라 타는 순간 우리는 수 천 년 전의 그리스로 갈 수도 있고,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의 배로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을 직접 참관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알쏭달쏭 신비한 사람의 마음 속을 탐사할 수도 있고, 저 멀리 수 백 광년 떨어진 행성에 살고 있는 외계인들과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유형의 독자는 책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책에서 길어올린 경험과 지혜를 현실 세계에 적용시켜 해결할 줄도 아는 영민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책 속으로의 신나는 여행을 통해 그런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행운을 만나게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