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2학년

이규희,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보림

ddolappa72 2024. 10. 18. 11:26

 
호랑이는 무엇이었을까?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을 쓴 한국계 여성 작가 태 켈러는 어릴 적 할머니로부터 호랑이가 등장하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한국의 전래 동화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 넣어 창작한 이 책으로 그녀는 2021년 미국의 아동문학상인 뉴베리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그녀의 문화적 정체성이자 해방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습니다. 태 켈러의 사례는 왜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같은 전래동화를 반복해서 읽혀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간직된 이야기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함께 자라나 그 아이의 영혼을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뿌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이와 이야기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굳이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필요한 것을 이야기에서 꺼낼 수 있도록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하는 대화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랑이는 왜 한꺼번에 어머니를 잡아 먹지 않고 조금씩 나눠서 빼앗아 먹었을까요? 아이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습니다. 이 호랑이는 장난기가 많아서 엄마를 놀려가며 빼앗아 먹은 것이다. 한 번에 잡아먹으면 체할 수 있어서 천천히 잡아 먹은 것이다. 맛있는 음식은 맨 나중에 먹으려고 엄마를 아껴둔 것이다. 등등.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호랑이를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호랑이를 가끔씩 집에 들려 아내에게 노름돈을 강탈해가는 남편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요? 조금씩 아내를 갈취하던 남편은 마침내 노름에 미쳐 그녀를 팔아버린 것일까요? 혹은 이 민담이 '호랑'이란 말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 전에 생긴 것이므로 '호랑이' 대신에 '범'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귀가하기 위해 그녀가 고개를 넘을 때마다 점점 어두워져서 마침내 '밤'이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까요?(윤구병, 내 생애 첫 우리말, 천년의 상상) 

우선 이 민담은 엄마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전반부와 오누이가 호랑이한테서 도망치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엄마가 가지고 있는 것을 호랑이에게 점차 빼앗기며 마침내 신체마저 강탈당하는 하강 구조로 되어 있고 공포를 증폭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후반부는 슬기로운 오누이가 꾀를 내어 다가오는 호랑이의 마수를 피해 하늘로 올라가는 상승 구조로 되어 있어 긴장감을 상승시키다가 안도감을 주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전반부를 반복하는 듯 보이지만 차이를 발생시켜 독자들에게 예상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서사 구조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더라도 그 정체는 여전히 불명확합니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힌 것이 아니라 그녀가 호랑이 자체로 변신한 것으로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그녀는 왜 호랑이로 변했을까?

오누이마저 잡아먹기 위해 엄마로 변장한 호랑이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아이들은 진짜 엄마인지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합니다. 오누이와 호랑이의 문답을 통해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찬바람을 쐬고 다녀서 목은 잔뜩 쉬었고, 추위와 싸우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손은 꺼칠해졌습니다. 취위를 이겨내기 위해 겹쳐 신은 버선은 호랑이 발만큼이나 큼직합니다. 남편 없이 오누이를 부양해왔던 그녀의 고된 삶이 고스란히 대화에 묻어납니다.

그렇게 힘겨운 삶을 살아오던 엄마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요? 저 아이들만 없다면 내 삶은 지금보다 더 행복할텐데. 저 아이들만 없다면 어디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을 텐데. 이런 상념에 사로잡힌 엄마는 한 고개 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점차 호랑이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귀여운 오누이를 보게 되자 호랑이 엄마는 다시 생각을 고쳐 먹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자상하고 따뜻한 하늘로 변신해서 어린 남매에게 생명의 동아줄을 내려 보내주게 됩니다. 그 아이들은 그녀의 탯줄을 통해 세상을 나온 귀한 생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브루노 베텔하임에 따르면 아이들은 한 인물에는 한 가지 면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착한 엄마'가 불 같이 화를 낼 때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됩니다. 이때 아이들은 '착한 엄마'는 사실 다른 곳에 있고 지금 저기에 있는 '나쁜 엄마'는 '새 엄마'(계모)라고 상상하면서 모순된 상황을 견디게 됩니다.

이 동화에서도 아이들은 자신들의 '진짜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다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사라진 '진짜 엄마'는 하늘에서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동아줄을 내려 보냈다고 상상함으로써 '착한 엄마'의 이미지를 보존하게 됩니다. 

실제로 학생들은 엄마가 때로는 '호랑이'처럼 무서워 질 때도 있지만 그 바탕에는 자신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 깔려 있다는 것을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엄마는 항상 하늘 같은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삶에 시달리고 고통받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며, 그들로부터 독립된 엄마 개인의 삶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아이들이 엄마에 대한 일방적 의존성에서 벗어나게 될 때 엄마와 아이들 모두 좀더 행복한 관계에 들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누이는 왜 해와 달이 되었을까?

학생들에게 왜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었을지 물어 봅니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이런 질문은 아이들이 상상을 키우는데 도움이 됩니다. 많은 대답들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답은 '하늘이 된 엄마가 항상 볼 수 있게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엄마들한테 아이들은 세상을 밝게 비추는 '해와 달'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다른 관점에서 오누이가 엄마로부터 분리되면서 해와 달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호랑이로 변한 엄마를 피해 달아나면서 그들은 해와 달이라는 독립된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은 엄마의 품을 떠나서 홀로 설 수 있어야 아이들이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비록 자신의 속으로 세상에 내놓은 존재이지만 아이는 자신과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엄마가 수긍하고 인정해야만 아이는 건강한 성인으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민담은 아이들과 엄마 모두에게 교훈을 전하고 있는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엄마도 엄마만의 독자적 삶이 있다고 전하는 한편, 엄마들에게는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 그들의 독립성을 존중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개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될 때 엄마와 아이들 모두 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요? 아이들한테 엄마는 항상 자애로운 '하늘'이고, 엄마에게 아이들은 늘 삶을 밝게 비추는 '해와 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