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2

스탕달/손현숙 번역, 적과 흑, 푸른숲주니어

ddolappa72 2024. 9. 16. 09:54

 

위대한 소설의 시대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은 신분제 사회를 지탱하던 왕정을 무너뜨리고 근대 민주주의 사회를 개시한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무려 100여 년이나 지속된 사회적 실험의 과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앙시앵 레짐(구체제), 삼부회 소집, 테니스 코트의 서약, 바스티유 감옥 습격, 자코뱅, 지롱드, 공포 정치, 테르미도르의 반동, 제정의 성립, 빈체제 등 서로 뒤엉킨 복잡한 사건들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루이 16세, 마리 앙투와네트, 시에예스, 장폴 마라, 조르주 당통,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조제프 푸셰,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등 암기해야 할 이름들이 쏟아집니다. 여기에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인 계몽주의 전통과 미국의 독립 선언(1776) 등 세계사적 연관까지 배우다 보면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 됩니다.

그런데 워낙 중요한 사건이다 보니 프랑스 혁명을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뛰어난 소설들도 많이 존재합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1859),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1862),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1835), 그리고 스탕달의 '적과 흑'(1930)이 대표적입니다. 소설의 고전들로 손꼽히는 이 작품들은 어떤 역사서나 사회 연구서보다 더 훌륭하게 당시 프랑스의 모습들을 종합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감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사회적 갈등의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그 시대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세상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고전 소설들을 많이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과 흑 사이에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1862)과 마찬가지로 스탕달의 '적과 흑'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부르봉 왕정의 복고 기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위고는 퇴행의 시대에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윤리를 탐구하고 있는 반면, 스탕달은 자신의 시대를 혁명을 통해 신분의 제약에서 벗어난 개인의 욕망들이 분출된 시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개인의 능력을 제약하던 신분제는 사라지며 누구나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이 물러난 후 프랑스 사회는 다시금 성직자와 귀족이 지배하는 낡은 체제로 복귀했다는 점입니다. 스탕달의 소설은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제도가 충돌할 때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고전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쥘리엥 소렐은 가난한 목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라틴어 성경을 암송하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출세하지 못할 바에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커다란 야심을 가진 청년입니다. 평민 신분인 그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나폴레옹처럼 붉은 제복을 입은 군인이 되거나, 왕정복고 세력의 주축인 신부가 되어 검은 제복을 입는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그의 비극은 그가 열렬한 나폴레옹 추종자임에도 불구하고 신분상승을 위해 반혁명적 종교 권력에 의탁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왕정복고체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 결과적으로 가장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만다는 것이 이 소설의 아이러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흙수저 청년 소렐이 나폴레옹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나폴레옹이 능력만으로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에게 자신도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만들었습니다. 소렐에게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이 무너뜨린 신분 질서 이후의 세상에서 개인이 꿈꿀 수 있는 최대치의 꿈에 도달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꿈을 간직한 인물이 프랑스에서 어디 소렐 한 명뿐이었겠습니까.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능력만 있다면 신분과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개인들의 욕망을 분출시킨 신화적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탕달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 사회가 개인들의 분출하는 욕망으로 들끓게 되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습니다.

수업에서는 학생들에게 롤모델로 삼고 있거나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성공할 수만 있다면 쥘리엥처럼 자신의 적성이나 신념과 상관없이 아무 것이나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도 물어 봅니다. 나아가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질문합니다. 그런데 수업을 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요즘 아이들한테 롤모델은 거의 없고,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소위 SKY라 불리는 대학에 진학하면 정말 사회적 성공이 보장되는 것인가요? 정말 의대에 진학하기만 하면 성공한 인생인가요? 붉은 색 군복을 입거나 검은 색 사제복을 입는 방법밖에는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없었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우리 사회가 경쟁이 치열한 이유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단조롭기 때문인지, 아니면 획일화된 욕망 때문에 경쟁이 치열해진 것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쥘리엥은 책에서 자신의 영웅 나폴레옹이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매우 승수능란했고, 애정 문제에는 늘 과감하게 접근했다는 구절을 읽고 현실에서도 그대로 실천합니다. 그는 가정교사로 일하던 레날 씨의 부인을 유혹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는 건방진 귀족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레날 부인을 굴복시킵니다. 그의 사랑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분적 열등감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비록 그를 짝사랑한 하녀 엘리자의 밀고로 부인과의 관계가 탄로나서 쫓겨나지만 그는 다시금 파리의 대귀족 라 몰 후작의 딸 마틸드를 유혹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마틸드의 아버지인 후작의 도움으로 신분 세탁에 성공해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귀족의 지위를 얻기 직전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오직 사회적 성공을 위해 사랑마저 수단으로 삼았던 쥘리엥의 태도는 경악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사랑마저 저버리는 남자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나라의 드라마에서도 종종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50년대를 배경으로 상반된 성격의 두 형제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사랑과 야망'(1987)이 있습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1964)의 주인공 윤희중도 자신의 욕망 때문에 사랑을 포기한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소설의 제목 '적과 흑'은 쥘리엥의 사랑을 상징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쥘리엥은 겉으로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검은 속셈을 감춘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쥘리엥과 결혼까지 약속한 마틸드의 사랑 역시 문제적입니다. 그는 주변의 귀족 남자들과 다른 쥘리엥에게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그녀가 속한 귀족 사회의 권태로움으로 탈출할 수단일 뿐입니다. 그녀는 신분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에 심취한 채 낭만적 사랑을 꿈꾸게 됩니다. 즉 그녀의 사랑은 자신의 허영심을 채워줄 수단일 뿐이라는 점에서 쥘리엥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레날 부인에게 권총을 쏜 후 감옥에 갇힌 쥘리엥은 자신과 결혼을 약속한 마틸드가 아니라 레날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출세에 대한 욕망이 좌절되자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되면서 레날 부인의 순진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입니다. 

쥘리엥이 왜 마틸드가 아닌 레날 부인을 선택했는지 살펴보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만약 레날 부인과의 관계를 폭로하는 투서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쥘리엥과 마틸드는 행복하게 살았을지 상상해 봅니다. 또 쥘리엥이 운좋게 무죄로 석방된다면, 레날 부인과 마틸드 중 누구를 선택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그때에도 쥘리엥은 감옥에서 깨달은 것을 실천하며 그 전과는 다르게 살았을까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주체-욕망 매개자-대상'이라는 삼각형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자발적으로 욕망한다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항상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며 욕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쁜 모델이 광고하는 건강음료를 마시고 싶어하는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건강음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라르는 그녀가 실제로 욕망하는 것은 건강음료가 아니라 그 모델이라고 말합니다. 그 여성은 건강음료를 마시고 모델처럼 예쁘고 날씬해 지고 싶은 것이지 건강음료 자체를 욕망한 것은 아닙니다. 이때 소비자는 주체이고, 모델은 욕망의 매개자이고, 건강음료는 대상인 셈입니다. 즉 지라르는 우리의 욕망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타인에 의해 '매개된 욕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욕망의 주체라고 착각하는 '낭만적 거짓'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소설은 그런 '낭만적 거짓'이 가득한 사회를 일깨워주는 '소설적 진실'을 제시해 왔다고 지라르는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위대한 기사가 되고 싶다는 돈키호테의 욕망은 그가 추종하는 전설의 기사 아마디스로부터 온 것입니다. 돈키호테가 전설 속 인물을 모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우스꽝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기사, 르네 지라르 "오직 소설가들만이 욕망의 모방적 성격을 드러내준다")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쥘리엥에게 적용시켜 보면, 출세하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처럼 여성들을 정복하고, 자신의 능력만 믿고 신분상승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질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감옥에 수감되어 욕망이 좌절되자 자신이 그 동안 타인이 심어 놓은 허상을 좇고 있다는 씁쓸한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의 종말이 다가오는 순간이 되어서야 쥘리엥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부탁하건데 지금의 내 생활을 방해하지 말아 줘. 그런 세속의 이야기들은 내 기분을 망치기만 할 뿐이야. 나는 내 방식으로 죽을 거야. 남들이 뭘 하든 아무 상관없어."

학생들과 스탕달의 '적과 흑'을 함께 읽은 이유도 바로 쥘리엥의 마지막 깨달음에 있습니다.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변의 강요된 욕망을 제것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쥘리엥을 보면서 자신의 욕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성찰해 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해본다면, 아이들 각자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