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이 그린 한 시대의 거대한 벽화
'레 미제라블'을 읽는다는 것은 빅토르 위고라는 위대한 작가가 그려 놓은 한 시대의 거대한 벽화를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은 공화제로 안정화되기까지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위고가 이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6월 혁명은 그 과정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장발장을 비롯하여 미리엘 주교, 자베르, 팡틴, 코제트, 마우리스, 가브로슈, 테나르디에 등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혼란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생생한 숨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위대한 작품의 제목은 '장발장'이 아니라 '레 미제라블'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단순히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 아니라 '동정할 만한 사람들, 죄지은 사람들, 경멸할 만한 비열한 인간들'조차 시대의 얼굴로 새겨 넣고 있기 때문입니다.(데이비드 벨로스/정해영 번역, 세기의 소설 레미제라블, 메멘토)
그래서 장발장의 인생역전을 프랑스 역사의 진행 과정과 교차시켜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 장발장은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이듬해인 1796년에 가족들을 위해 빵을 훔치다 체포되어 '노역형'에 처해집니다. 그는 밀렵과 불법 무기 소지의 죄목 외에 2번의 탈옥시도까지 포함해서 무려 19년을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수부로 일을 하게 됩니다. 혁명으로 왕은 사라졌지만 전근대적 형벌제도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고로 장발장이 훔친 빵은 '팽 드 캄파뉴(Pail de campagne)라 불리는 것으로 무게가 1.8~5.4Kg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의 빵입니다.
(나) 장발장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완전히 몰락해 버린 1815년에 출소하게 됩니다.
(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외국으로 망명했던 루이 16세의 동생들이 귀국해 차례로 즉위하지만 점차 과거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프랑스 국민들은 1830년 7월 다시 혁명을 일으켜 루이 필리프를 새 왕으로 추대합니다. 이 시기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대에 마련된 법 제도와 안정된 정치질서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합니다. 이 시대가 '레 미제라블'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장발장은 마들렌으로 이름을 바꾸고 구슬공장을 차려서 막대한 부를 쌓고, 시장으로 추대되기까지 합니다.
(라)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는 수많은 도시 빈민들을 생산했고, 그들은 거지와 부랑아, 알코올 중독자, 그리고 매춘부의 모습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작품 속 팡틴, 가브로슈, 테나르디에는 이러한 시대의 산물인 셈입니다.
(마) 1832년 프랑스 리옹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거대한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빈민과 노동자들, 공화주의 성향의 학생들이 7월 왕정에 등을 돌리고, 라마르크의 장례식을 계기로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장발장은 부상을 입은 마리우스를 구해낸 사건은 이 폭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공동체는 어떤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하나
소설 초반에 국민의회 의원은 주교에게 프랑스 혁명은 '불완전한 혁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구체제는 무너뜨렸지만 구체제의 사상과 악습은 완전히 뿌리 뽑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의 매춘, 인간의 노예제도, 어린이의 불행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악습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도덕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민의회 의원의 이러한 문제 의식이 이 작품을 통해 위고가 탐구하고자 했던 바였다고 생각합니다. 무너진 구체제의 질서를 대신할 정신적 토대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세워질 새로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작가는 자신의 사고실험을 탐구할 대상으로 장발장이란 인물을 선택합니다. 그는 자베르에게는 '24501번 죄수', 시민들에게는 '마들렌 시장', 그리고 마리우스에게는 '포르슈방'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시대의 다양한 층위들을 관통하게 됩니다. 장발장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하지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화두는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우선 출소 직후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장발장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친절을 베풀어준 주교의 은그릇을 훔치게 됩니다. 그러나 주교는 헌병 대원들에게 붙잡혀 온 장발장을 위해 그가 훔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용서를 합니다. 그는 범죄자를 정직한 시민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관용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이와 달리 자베르는 범죄자는 무조건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고 믿고 장발장을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작가는 도덕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엄격한 법과 관용의 정신 중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인지 묻고 있습니다.
시장이 되어 마들렌이란 이름으로 살던 장발장은 자신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상마티외란 인물이 곧 사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괴로워 합니다. 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곤경에 처한 수많은 사람을 돕고 있던 장발장이 자수를 하게 된다면, 상마티외란 개인은 살릴 수 있지만 그의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 장발장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지 물으면 대다수가 상마티외를 포기하는 것을 택합니다. 그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사회에 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양적 공리주의 윤리에 익숙한 탓입니다.
하지만 장발장은 자수를 해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누명을 쓴 상마티외를 감옥에서 구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왜 이런 결정을 한 것일까요? 그는 '양심'에 따라 사는 삶이 더 가치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누리던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잃고, 자신이 돕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곤란을 겪게 되더라도 양심을 지키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에도 규정되어 있는 '양심의 자유'는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한 것입니다.
죄수 장발장이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관용'과 '양심' 이외에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코제트를 딸로 받아들여 기른 것은 단순히 죽어가던 팡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주교가 삶의 지평에 미덕의 새벽빛을 비춰 주었다면, 코제트는 사랑의 새벽빛을 비춰" 주는 존재였습니다. 사랑이라곤 해 본 적도 없고, 누구의 아버지, 연인, 남편, 친구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장발장에게 그녀는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열정과 애정을 일깨우는 존재이자 그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수십 년 간 지속된 프랑스의 혼란과 폭력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가올 새로운 사회는 사랑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작가는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일제 시대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너 참 불쌍타', '애사', '장발장의 설움' 등으로 번역되어 왔습니다. 장발장 개인이 겪어야 했던 수난에 초점을 맞춘 이런 제목들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참된 메시지를 우리 시선에서 놓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장발장의 선택을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서만 다루는 것은 그를 통해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공동체 윤리의 문제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장발장은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수많은 '레 미제라블'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이 작품을 읽어보면 이 작품이 지닌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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