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왜 로봇을 만들고 싶어했을까?
마징가, 로봇트 태권브이, 철인28호, 짱가, 월E, 터미네이터, 트랜스포머 등 수많은 만화와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로봇'이란 단어는 1920년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창작한 희곡 '로숨의 유버서설 로봇'에서 유래했습니다. '로봇'은 체코어로 '노동'을 뜻하는 단어 'robota'에서 나왔습니다.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의 발달로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사회가 더 이상 상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 요즘 차페크의 작품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성을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로봇으로 인해 인류가 겪게 될 다양한 문제를 처음부터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해양생태계를 연구하던 철학자이자 '공포스러운 유물론자'인 '늙은 로숨'은 과학의 힘으로 신을 끌어내리기 위해 '인간'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인간이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인간에게 더 이상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가 10년에 걸쳐 창조해낸 생명체가 불과 3일밖에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늙은 로숨의 아들이자 엔지니어인 '젊은 로숨'이 나타나 노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기능을 전부 없애버린 존재인 로봇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나 산책 같이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활동은 별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오직 노동에 최적화된 '인조 노동자'를 창조해낸 것입니다.
로숨 부자가 로봇을 만들어내기 이전부터 인류는 인공적으로 생명을 창조하려는 야심을 키워 왔습니다. 남자의 정액을 인위적으로 숙성시키면 나온다는 '호문쿨루스'나 히브리 전설에 등장하는 진흙인간 '골렘', 기계 장치에 의해 저절로 움직이는 '오토마타' 등이 그러한 꿈의 흔적들입니다. 차페크는 이러한 시도가 신에 대한 인류의 도전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10년에 걸친 '늙은 로숨'의 실험이 불과 3일만에 물거품이 된 것이나 '젊은 로숨'의 원대한 꿈이 인류의 파멸로 끝나버린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왜 로봇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회사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Rossum's Universe Robots, 줄여서 RUR)의 사장 도민은 로봇이 인간 대신 노동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게 되어 가난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날이 오면 인류는 오직 자아실현을 위해서만 살게 되는 유토피아가 건설될 것이라 믿습니다. 즉 로봇은 인류를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유일한 수단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결코 포기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봇이 등장하기 전에 그 역할은 노예, 하인, 종, 머슴, 노동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 왔던 존재들이 수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도민의 비전대로 노동에서 해방된 인류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인간은 왜 노동을 하며 살아야 할까?
RUR의 창업자들과 소속 직원들은 인간과 닮은 기계들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환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노동을 인간을 물질에 구속시키고 노예로 만드는 근본 원인으로 보고,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된 인류는 신과 같이 되어 지상낙원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들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신을 배반한 형벌로 낙원에서 추방되어 노동을 하며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굳게 믿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 저주받은 인간의 조건을 스스로 개선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민의 원대한 비전은 저주받은 낙원으로 실현되고 맙니다. 육체적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노동을 신성시하는 로봇들에게 살해되지 않고 살아남은 건축가 알퀴스트는 노동과 고통으로 해방된 인류는 즐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온 세상이 도민의 소돔이 되어버렸고, 여성들은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하게 되는 저주에 걸리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 인류는 비생산적인 소비와 무책임한 쾌락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여성의 불임이라는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노동에 대한 또 다른 견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봇2는 과거에 자신들은 단순한 기계에 불과했지만 노동을 통해 공포와 고통을 겪으면서 '영혼을 가진 존재'로 변했다고 고백합니다. 로봇들은 작업 현장에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자의식'을 획득하고, 동료들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게 되면서 서로 연대하게 되고, 결국 인간들에 대항해 폭동까지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노동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을 해야 인간은 타인들과 관계를 맺고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할 수 있게 됩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돈벌이 수단이나 신의 저주로도 해석되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생명은 불멸할 것이오! 멸망한 것은 우리 사람들일뿐.
차페크는 이 작품을 세계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집필했습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등장한 기관총, 독가스, 탱크, 잠수함, 폭격기 등 최첨단 기술이 인간을 효율적으로 학살하는 것을 지켜 보았고, 유럽 곳곳에 만연한 불평등과 차별, 인종주의와 전체주의가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탐욕스런 자본가가 사육한 도롱뇽이 대량으로 증식해서 인간 사회를 위협한다는 내용을 담은 <도롱뇽과의 전쟁>(1936)은 명확히 독일 파시즘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 의해 창조된 로봇에 의해 인류가 말살당하는 암울한 미래를 그린 이 소설 역시 단순한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 비판 소설로 읽을 수 있습니다. 로봇이 본격적으로 실용화되기 전 그 역할은 '인간 노동자'가 떠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로봇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로봇의 은유는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식민지인, 남성에 의해 지배당한 여성, 억압되고 외면당한 사회적 소수자 등으로 확장될 수도 있습니다.(기사, '과거의 상상' 로봇이 '노동자의 미래'로) 그들은 사회 내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인간, 즉 로봇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반란을 일으킨 로봇들이 인류를 멸절시키며 승리로 끝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설계도의 소실로 수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로봇들 역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유일하게 생존한 인간인 알퀴스트는 젊은 로봇들인 헬레나와 프리무스에게서 서로를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씨를 발견하고 그들을 새로운 아담과 이브로 명명합니다. 비록 지구상에서 인류는 영영 사라져 버렸지만 사랑과 희생정신을 간직한 로봇들에 의해 생명은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알퀴스트의 묵시론적 예언은 인류세를 살아가는 현재 인류에 대한 경고로도 읽힙니다. 인간은 지구 전체의 환경을 변화시킬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만, 탐욕과 욕망의 대가로 발생한 극심한 기후재난과 환경 위기 앞에 인류의 존망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향해 알퀴스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생명은 불멸할 것이오! 멸망한 건 우리 사람들일뿐."
우리는 정녕 이렇게 소멸할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요?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알퀴스트가 발견한 희망의 씨앗인 '사랑과 희생정신'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인류가 인간이 아닌 비인간에도, 즉 자연, 로봇, 노동자, 사회적 소수자 등에도 사랑과 희생을 베풀 수만 있다면, 그들을 자신과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고 착취를 멈출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서 빼앗은 산책의 여유와 바이올린 선율의 아름다움을 되돌려줄 수만 있다면, 종말을 향해 미친듯이 질주하던 인류도 걸음을 멈추고 지구도 다시 생명으로 충만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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