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 무비에서 로드 무비로
<톰 소여의 모험>(1876)의 대중적 성공 이후 마크 트웨인이 그 속편으로 내놓은 소설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입니다. '톰 소여'는 톰과 헉 주연의 버디 무비라면, '허클베리 핀'은 톰이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흑인 노예 짐과 헉의 로드 무비라 할 수 있습니다. 짐과 헉이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모험'의 성격 역시 다릅니다. 3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톰 소여'는 성인이 된 소설가가 자신의 개구진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모험 역시 악동적 상상력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헉의 1인칭 시점으로 사건들이 서술되는 '허클베리 핀'은 노예제와 흑인 노예 짐과의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헉의 내면 풍경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기 때문에 보다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트웨인은 이 작품이 갖는 본질적인 주제는 "건전한 마음과 기형적 양심이 갈등을 일으키고 양심이 패배의 고배를 마시는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헉이 친구 짐을 지키려는 '건전한 마음'과 법과 종교가 가르치는 '기형적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다 전자를 택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질문 때문입니다. 법과 양심 사이의 갈등은 이미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등의 고전 작품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진지하게 다루어져 왔습니다. 실정법을 어기면서도 양심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물음에 대답해 보면서 우리는 윤리적 인간으로 탄생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훌륭한 작품이란 인간에게 어떻게 살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이 인간다운 삶인지 사색해 보도록 하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수업에서는 헉이 그러한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며, 그의 선택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토피아를 찾아서
소설 초반 헉은 이중의 압박으로부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전작 '톰 소여'에서 막대한 황금을 획득하게 된 헉은 더글라스 아주머니에게 입양되어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헉을 교양인으로 만들기 위해 더글라스 부인이 늘어놓는 끊임없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때 갑자기 등장한 헉의 아버지는 양육권을 주장하며 헉을 데려가 강변 오두막에 가두어 놓고 주정과 폭력을 일삼습니다. 더글라스 부인의 집은 안전하지만 따분하기 그지없습니다. 반면에 아버지의 오두막은 유쾌하지만 거친 폭력이 횡행합니다. 금욕과 방탕 사이에서 고통받던 헉은 마침내 자유를 찾아 탈출을 결심하게 됩니다.
잰슨 섬으로 도망친 헉은 그곳에서 흑인 노예 짐을 만나게 됩니다. 짐은 주인인 왓슨 부인이 자신을 남부의 노예 상인에게 팔아 넘기려 한다는 말을 엿듣고 탈출해서 이 섬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짐은 헉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용의자로 지목된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짐의 사정을 알게 된 헉은 노예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알려진 자유주까지 동행을 결심합니다.
여기에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설의 시대는 남북전쟁(1861~1865년) 이전인 대략 1840~50년대로 추정됩니다. 미국은 1819년까지 노예주(남부)와 자유주(북부)가 각각 11개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쪽에 위치한 미주리가 노예주로 연방 가입을 신청하게 되면서 지역 간의 갈등이 커졌습니다. 미주리는 남주 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개척한 지역이라 대부분의 가정이 흑인 노예를 거리고 있었지만, 합중국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는 미주리의 연방 가입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주리가 고향인 트웨인은 남북전쟁 초기에 노예제에 찬성하는 남군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곧 환멸을 느끼고 광산노동자와 저널리스트를 거쳐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기사, 자본주의는 자유와 낭만을 먹고 자란다)
바로 이처럼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에 헉과 짐은 자유를 찾아 나선 모험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뗏목을 띄운 미시시피(Mississippi) 강은 원주민의 말로 '위대한 강', '아버지의 강'을 뜻합니다. 공교롭게도 그 거대한 강줄기는 자유주와 노예주를 잇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는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헉과 짐의 여정은 곧 자유와 노예를 인위적으로 나누는 경계선에 대한 탐사이기도 합니다. 피부색에 따라 인간의 신분과 지위를 나누는 것을 옳은 일인가? 흑인과 백인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인가?
학생들에게 이 소설에서 유토피아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자유주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헉과 짐이 그곳에 도착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말 그곳에 도착했는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약간의 힌트를 줍니다. 강으로 상징되는 자연과 마을로 상징되는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헉과 짐이 편견 없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네, 그렇습니다. 그들이 타고 여행하는 뗏목이야말로 작가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장소입니다. 그들이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이미 그들은 그 장소에 도착해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좋아, 난 지옥에 가겠어!"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는 흔히 '스토 부인'이라 불리며 미국의 남북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0)의 작가입니다. 그녀는 1850년 의회가 흑인 노예들의 도주를 돕는 이들에게도 벌금을 부과해 처벌하는 법률인 '도망 노예법'을 통과시키자 저 소설을 쓸 결심을 하게 됩니다. 헉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이유도 바로 저 법 때문입니다.
헉은 친구로서 짐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지만, 그것이 법과 종교에 어긋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헉은 짐의 주인인 왓슨 부인에게 도주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써 놓고 보내야 할 지 망설입니다. 그리고 함께 여행을 하며 짐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일이나 자신에게 다정하게 해주었던 일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편지를 찢어 버리고 지옥에 가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당시 교회에서도 도망 노예법을 지지했기 때문에 헉의 선택은 법뿐만 아니아 종교적 계율을 어긴 것이 됩니다.
학생들에게 과연 헉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지 질문합니다. 다들 헉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지는 잘 모르겠다고 답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학교의 교칙을 잘 준수하는 모범생이라고 알고 그렇게 길러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그 규칙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단 한 번도 가져보지 않은 아이들이 '양심의 자유'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스토 부인에 대해서도 질문해 봅니다. 그녀는 자신이 소설을 집필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독실한 크리스천 여인이 그래야 하듯이, 이 불쌍하고 단순하고 의존적인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의무를 완수하려고 애써왔어요. 여러 해 동안 그들을 보살피고 가르치고 감독해왔고, 또 그들의 근심과 기쁨을 함게 나누어왔어요. 우리가 약간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톰 같이 충직하고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우리가 가르쳐온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아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겠어요."(기사, 스토와 '잠재적 아군')
스토 부인이 흑인 차별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그녀는 흑인이 "충직하고 성실"하기 때문에 차별에 반대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후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난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가들은 백인들의 선의를 기대하는 수동적 흑인을 조롱하며 '엉클 톰'이라 부르게 됩니다. 즉 스토 부인은 차별 자체가 불의이고 나쁘다는 사실을 아직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안의 인종차별주의
미국에서는 1830년대 백인들이 흑인 노예 흉내를 내며 조롱하는 유희가 쇼로 만들어져 크게 유행했습니다. 일명 '민스트럴 쇼'라는 것입니다. 이 쇼는 1828년 토머스 다트머스 라이스라는 백인 코미디언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점프 짐 크로'(Jump Jim Crow)라는 노래를 부르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64년 민권법이 도입되기 전까지 미국 각 주별로 실시되었던 흑백 격리법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온 '짐 크로 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미국에서 얼굴을 검게 칠한 블랙페이스는 인종차별적 행위로 지탄을 받게 되었습니다.(기사, 블랙페이스의 흑역사)
1980년대 개그맨 장두석과 이봉원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시커먼스~ 시커먼스~'라고 외치던 코미디가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코너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훗날 이봉원은 폐지 이유가 88 서울올림픽을 위해 입국하는 흑인 선수들과 관계자들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1980년에도 블랙페이스가 흑인차별이나 비하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제작진이 인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건 그 뒤 무려 30년이 흐른 뒤인 2017년에 개그우먼 홍현희가 흑인 원주민 분장을 하고 또다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개그맨으로 활동한 샘 해밍턴과 오취리가 문제 제기를 하자 동료 개그맨 황현희는 '단순히 분장한 모습을 흑인비하로 몰아가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냐며 반론을 제기하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2020년. 재치있는 졸업사진으로 유명한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이 당시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소위 '관짝소년단'을 따라하며 또 다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관짝소년단'(Coffin Dance)라 불리는 이들은 아프리카 가나의 장례식을 담당하는 이들로 무척이나 무거운 관을 어깨에 이고서도 관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흥겨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서 유튜브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서아프리카 지역의 독특한 장례 문화와 그들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눈길을 끈 것입니다. 논란은 가나 출신의 방송인 샘 오취리가 그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블랙페이스는 흑인 입장에서 매우 불쾌하고 모욕적인 행동이니 흑인을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고서도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학생들이 인종 차별을 의도한 것도 아닌데 오취리가 의도적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기사, '시커먼스'와 '관짝소년단', 인권 감수성 30년째 그대로)
과연 의정부 고등학생들이 '관짝소년단'을 패러디한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일까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관련 기사를 읽게 한 후 의정부 학생들의 사진이 흑인에 대한 차별인지 아닌지 주장하는 글을 쓰게 했습니다. 쟁점은 학생들이 비하의 의도가 없었음에도 흑인을 혐오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 대다수의 한국인들의 주장처럼 오취리가 철없는 학생들의 행동을 지나치게 과도하게 해석한 것은 아닌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한국 사회는 수많은 외국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변했습니다. 세계화로 전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유튜브나 넷플릭스 덕분에 한국의 문화가 전세계로 소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 인종차별주의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순간을 종종 목격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표현과 문화를 세계인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문화 역시 조금 더 성장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살아가게 될 우리의 아이들이 그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다문화 교육이 지금부터라도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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