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진보하는가
1815년에 있었던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군이 패배하면서 유럽의 '낡은 왕정들'은 역사의 시계를 잠시 거꾸로 돌려 놓게 됩니다.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왕정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부정하고 유럽의 질서를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위고는 다른 나폴레옹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워털루 전투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운이 없어서 졌다고 믿고 싶어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워털루에서의 굴욕이 단기적으로 반동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장기적으로는 역사에 진보를 가져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쟁에서 프랑스군과 접촉한 유럽 각국의 병사들이 프랑스 혁명에서 탄생한 진보와 인권, 민주주의 사상을 흡수해서 고국으로 가져서 유럽 곳곳에서 왕정을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왕정파였던 할아버지 질노르망의 슬하에서 성장한 마리우스는 나폴레옹 추종자였던 자신의 아버지 퐁메르시의 존재를 은밀히 조사하면서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공화정은 대중에게 되돌려 준 시민권을 권력의 바탕으로 삼은 반면, 제정은 유럽에 심어 준 프랑스 사상을 권력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대혁명을 통해 위대한 민중의 얼굴이 나오는 것을 보았으며, 제정을 통해 위대한 프랑스의 얼굴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모두가 옳은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진보에 대한 마리우스의 믿음은 워털루 전쟁에 대한 위고의 평가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작가 개인의 신념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역사는 일시적으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앞으로 나아가며, 프랑스 혁명은 인류를 자유와 해방으로 이끈 위대한 사건이었다는 것이 위고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레 미제라블'은 역사는 진보한다는 역사철학에 기초해서 쓰여진 소설입니다.
그런데 과연 위고의 생각처럼 역사는 발전하는 것일까요? 진보사관은 야만 상태의 국가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 제국주의의 논리로도 사용되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역사가 진보한다면 그 방향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만약 위고의 시각으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서양의 근대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발전사관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당은 부지런하다
사회의 '맨 밑바닥' 출신의 테나르디에는 이 소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악당입니다. 그런데 그는 분명히 사악한 인물이지만 이야기 곳곳에서 서사적으로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워털루 전투에서 죽은 군인들의 소지품을 도둑질하다 우연히 마리우스의 아버지 퐁메르시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내와 여인숙을 운영하며 팡틴의 딸 코제트를 대신 길러주었다가 돈을 받도 장발장에게 넘겨주기도 합니다. 또 빈민굴에서 사람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편지로 사기 행각을 벌이다가 마리우스가 코제트와 재회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수구에서 사람들의 물건을 도둑질하다가 경찰에 쫓기던 장발장과 마리우스가 탈출하도록 돕기도 하고, 마리우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장발장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토록 성실한 악당이라니! 마치 때로는 신이 악을 통해 선을 이룬다는 말을 실천하는 듯합니다.
작가는 테나르디에가 악당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즉 그는 '세상의 진보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야욕을 채울 생각밖엔 없는 자'이고, '무지와 가난'을 스승으로 삼고 '욕망'을 안내자로 삼아서 오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포악하고 게걸스럽게 행동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된 것입니다. 공동체의 진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개인의 욕심에만 충실한 사람은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면 부유한 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쫓겨난 마리우스 역시 '맨 밑바닥'으로 추락해 가난을 경험했지만 그는 테나르디에와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가난은 그에게 물실생활의 실체를 깨닫게 해주고 그로 인해 오히려 정신적 생활을 지향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변세계와 사람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성찰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연밀을 품은 인정 많은 사색가로 변모했습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가진 그에게 가난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발판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베르는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집요하게 장발장을 추적했던 자베르는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자 크나큰 충격에 빠져들고 맙니다. 자베르는 법을 수호하는 사람이고 장발장은 법을 어긴 사람인데, 자베르가 장발장에게서 도움을 받고 그 보답으로 장발장을 풀어 주게 되면서, 자베르 역시 장발장과 마찬가지로 법을 어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가 평생 지향한 것은 '인정 있는 인간이나 위대한 인간, 아니면 탁월한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었는데 장발장의 숭고한 행동으로 인해 그의 마음 속에서 '올곧은 양심의 탈선'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베르와 장발장의 차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자베르는 법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양심'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반면 장발장은 신부의 가르침 대로 인간의 선한 본성을 타인에게 실천하는 것을 '양심'에 따른 삶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장발장은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자신의 결정을 양심의 거울에 비춰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자베르는 국가의 권위와 명령을 맹목적적으로 굳게 믿었고 무비판적으로 따랐습니다. 자베르의 행동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치 정권에서 히틀러의 말을 법으로 받아들이고 상관의 명령을 성실히 이행한 아이히만은 자신이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악인이 된 것은 그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상부의 명령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유하지 않는 천박함',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을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습니다.
자베르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일까요? 자신이 평생 지켜온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삶의 무상함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죄인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 것일까요?
자베르를 통해 '양심'이란 단순히 신념을 지키는 것과 무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양심(conscience)'의 어원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scientia)를 '함께 나누다'(con)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바'는 '도덕적 의식'을 뜻하고, '함께 나눈다'는 말은 보통 '자기 자신과 나눈다'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다시 말해 양심의 어원은 '스스로와 나누는 도덕적 성찰'이 양심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기사,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인권에서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베르에게 결여된 것은 바로 '양심'이었고, 장발장을 통해 '양심'의 눈을 비로소 뜨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베르는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도덕적으로 되짚어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장발장, 자유인으로 죽다
반면에 장발장은 마리우스에게 자신이 과거 도형수였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장발장에게 마리우스는 그 까닭을 묻습니다. "그 까닭이란 게 좀 묘하다오. 정직하기 위해서요.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소. 그건 사실이오. (...) 하지만 이제 나를 위해선 거짓말해선 안 되오. 그걸 꼭 밝혀야 할 사정이 있었느냐고 자네가 물었지? 이상한 게 하나 있다오. 그건 양심이오. 나는 삶에서 밀려난 사람이오. 예전엔 살기 위해 빵 하나를 훔쳤소. 그런데 오늘은 살기 위해 이름 하나를 훔치고 싶진 않소."
양심에 따라 산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태도를 뜻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양심입니다. 장발장은 빵 하나를 훔친 대가로 19년이란 세월을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출소 후에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타인의 이름을 훔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고 사회적 존경을 받게 되더라도 다른 이의 이름 뒤에 숨어 사는 삶은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 그리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장발장은 파란만장한 모험을 겪은 끝에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빵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양심에서 나오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장발장이 고단한 인생이 여전히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까닭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획득하기 위한 그의 눈물 겨운 투쟁 덕택에 현재 우리가 그러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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