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시 수업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ddolappa72 2024. 9. 7. 16:25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수업 시간에 읽어야 할 책 외에 짬을 내서 시를 읽고 있습니다. 다섯 편의 시를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고 시에서 사용된 단어나 표현을 활용하거나, 시에서 제시된 소재나 주제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변형시켜서 시를 써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재미없다고 하던 아이들도 수 개월간 꾸준히 시를 읽고 시를 써 오다 보면 어느새 시의 매력에 푹 빠져 있곤 합니다. 시 쓰기에 재미를 붙이게 되면서 아이들의 글쓰기 실력은 물론 독해력도 한층 성장하게 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됩니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시 쓰기를 일종의 재미있는 놀이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각별히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시에 나타난 재미있는 표현을 몸으로 흉내내보도록 한다거나, 아이들이 생활 속 경험과 연관시켜서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을 떠올려 보도록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아이들한테 굳이 운율, 은유, 상징과 같은 어려운 개념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를 모방해 보면서 아이들 스스로 시와 산문의 차이를 저절로 깨닫게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그대로 따라하기 급급하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신만의 생각을 시에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쉼표

크다가 말아 오종종한
콩나물 같기도 하고,

연못 위에 동동 혼자 노는
새끼 오리 같기도 하고,

구멍가게 유리문에 튄
흙탕물 같기도 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언뜻 본
귀고리 같기도 하고,

동무 찾아 방향을 트는
올챙이 같기도 하고,

허리가 휘어 구부정한 
할머니 같기도 하고,

(안도현의 시 '쉼표' 전문)


아이들과 안도현의 시 '쉼표'를 읽었습니다. 쉼표(,)의 모양을 보고 '콩나물, 새끼 오리, 흙탕물, 귀고리, 올챙이, 할머니' 등의 유사한 이미지를 떠올린 것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냥 보았을 때는 아무런 연관성도 지니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사물들이 쉼표의 시각적 이미지 중심으로 모여듭니다. 시는 이처럼 낯선 사물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에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유사성을 발견하는 능력은 천재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서로 연관없이 무질서하게 놓여진 사물들 속에 숨어 있는 질서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창조성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시를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도현의 시를 읽고 아이들은 어떤 시를 써 왔을까요?


(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튜브 같기도 하고,

쭈글쭈글 할머니 손에 껴 있는
반지 같기도 하고,

외출할 때 끼는 엄마
링 귀걸이 같기도 하고,

던킨 도너츠에서 산 먹음직스러운
도넛 같기도 하고,

드림렌즈를 한
언니 눈 같기도 하고


(나)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 같기도 하고,

건강에 좋고 고소한
콩 같기도 하고,

몸에 있는 동글동글한
점 같기도 하고,

알록달록한
단추 같기도 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싸인펜을 위헤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달랑달랑 소리 나는
동전 같기도 하고,

달콤한
초코볼 같기도 하고,


(가)와 (나)의 시는 각각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요? 아이들이 쓴 제목이 곧 정답이라 일부러 제목을 적지 않았습니다. 안도현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쓰긴 했어도 2학년 아이들이 이만큼 쓴 것도 대단하지 않나요?

그런데 제가 아이들과 시를 함께 읽기로 결심한 것은 단순히 글쓰기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당연히 시를 꾸준히 쓰다 보면 저절로 표현력이 향상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데 시보다 더 좋은 것도 없습니다. 시를 통해 향상된 이런 창의력은 아이들의 국어 능력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 확장되어 영향을 끼칩니다. 꾸준히 시를 써온 아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마다 독창적인 해답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 메달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가 학창 시절 시인을 꿈 꾸었다고 했던 것도 시와 창의적 사고 간의 연관성을 증명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