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전문)
'진달래꽃'은 이별 시인가요?
중학교 학생들과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읽어 봅니다. 시적 화자가 어떤 상황에 놓인 것 같냐고 물으니 이별을 한 것 같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왜 이별한 것 같냐고 다시 물어 봅니다. 아이들은 '역겹다'는 시어를 근거로 시적 화자가 상대한테 큰 잘못을 해서 구토가 날 만큼 싫어진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한때는 서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사이처럼 보이는데 상대가 속이 메슥거릴 만큼 역겨워 할 만한 행동해서 헤어지게 되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대체 어떤 행동을 했길래 상대가 속이 뒤틀려 떠나야만 했을까요?
더 이상한 부분은 자신을 역겨워 하며 떠나는 상대에게 시적 화자가 진달래꽃을 한 아름 가득 따서 떠나는 길에 뿌리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수준을 넘어 증오하고 혐오하는 상대한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또 시적 화자는 그렇게 정성스럽게 뿌려 놓은 꽃길을 '즈려밟고' 가달라고 요구합니다. 동사 '즈려밟다'를 '짓밟다'로 이해한 아이들은 시적 화자의 성격이 조금 이상하다고 지적합니다. 자신이 잘못을 해서 상대방을 떠나게 하고는 되려 그 상대한테 정성스레 준비한 꽃을 짓밟아 달라고 요구하다니요. 어떤 아이는 화자가 자신의 책임을 상대에게 돌리기 위해 상대한테 때려달라고 하는 것 같다며 화자가 변태스럽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우리 국민들의 대표적인 애창시인데, 이 학생의 해석 대로 우리에게 피가학적 성향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래서 그 학생에게 시인은 왜 '사뿐히'라는 단어를 썼을 지 질문해 봅니다. '사뿐히'라는 단어와 '즈려밟다'라는 동사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볍고 날렵한 발걸음으로 꾹 눌러 밟는 게 가능한 행동인가요?
어쨌든 시를 끝까지 읽어 봅니다. 처음에 '말없이 고이' 보내주겠다고 하던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안 울겠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펑펑 눈물을 흘리겠다는 뜻인가요? 그리고 시적 화자는 처음의 약속처럼 상대를 곱게 보내주겠다는 생각으로 이별의식을 치루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떻게든 떠나려는 상대를 붙잡아 보려는 심산으로 쿨한 척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게 했을 때, 김소월의 시 속 화자는 사랑하는 상대한테 '역겨움'을 불러 일으킬 만한 심한 행동을 해놓고는 자신의 과오를 상대에게 돌리기 위해 꽃길을 마련해 놓고 그것을 짓밟고 가라고 요구하지만 결국 눈물까지 글썽이며 상대의 약한 마음에 호소해서 붙잡아두려는 변태스러운 사람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다시 읽는 소월의 시
아이들한테 이 시의 상황이 정말 이별하는 순간이 맞는 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는 실제로 이별을 맞이한 순간이 아니라 화자의 상상 속에서 미래에 일어날 지도 모를 이별의 순간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적어도 화자가 이 시를 노래하는 동안만큼은 두 연인이 여전히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시는 이별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이별의 순간을 상상하고 있는 시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 시적 화자는 왜 이별의 순간을 상상한 시를 노래했던 것일까요? 혹시 상대 연인이 이렇게 물었던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나와 헤어질 때 어떻게 하실 건가요?' 또는 '당신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나요?' 시가 노래되고 있는 상황을 이렇게 가정해 보면 이 시는 처음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 '역겹다'는 동사가 생리적 거부를 뜻하는 ‘역(逆)+겹다’의 의미도 있지만, '힘들다'를 뜻하는 ‘역(力)+겹다’의 의미도 갖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이별을 결심할 만큼 힘겨운 상황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두 집안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 극심한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피치 못하게 떨어져 지내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뿐히'란 부사와 어울리지 않았던 동사 '즈려밟다'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즈려밟다'의 '즈려'를 '지레짐작'에서 '지레'로 고쳐 읽으면 어떨까요? '지레'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를 뜻하는 부사입니다. 이 단어를 이렇게 이해하면 저 시구절은 '정성스럽게 뿌려놓은 꽃길을 다른 사람이 밟기 전에 당신이 미리 밟고 가세요'로 해석하게 됩니다. '사뿐히'라는 부사와의 호응도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겨우 단어 두 개의 뜻만 고쳐 읽었을 뿐인데 시가 처음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화자는 부득이한 상황으로 인해 상대가 자신과 만나는 것이 힘들어 떠나게 되더라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순순히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떠나가는 그 길을 꽃길을 꾸며 놓겠다고 합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상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인 것이지요. 그리고 혹시 떠나는 상대가 부담스러워 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봐 배려해서 '사뿐히' 떠나가도 괜찮다고 위로합니다. 시적 화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적 화자의 어조를 결정하는 동사들도 다시 살펴 봅니다. '드리오리다', '뿌리오리다', '가시옵소서, '흘리오리다'와 같은 동사들의 종결형은 어떤 느낌이 들게 하나요? 뭔가 상대를 지극히 존경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떠나는 길 위에 뿌리겠다는 꽃도 '아름' 따서,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두 팔을 벌려 따 놓겠다는 화자는 사귀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사랑하는 상대방을 최선을 다해 존중하고 아낌없이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화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한 것일까요? 자신이 눈물을 흘리게 되면 혹시 떠나겠다고 결심한 상대가 미안하게 될까 봐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하고 있는 현재는 물론이고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최선을 다해 사랑을 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미련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울지 않겠다고 하는 것일까요?
만약 이 시를 후자의 의미로 읽을 경우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아무 미련도 남지 않을 만큼 최대치의 사랑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뜨거운 사랑 고백의 시가 됩니다.
어떤 해석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함께 이 시를 읽은 아이들한테 어떤 해석이 더 마음에 드는 지 물어봅니다. 그리고 이 시는 이렇게도 읽을 수도 있지만 다르게도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일러둡니다. 이 글에서도 소월의 시는 화자를 변태적인 인물로 이해한 아이들의 해석, 학교에서 배우게 될 이별시로서 이해, 그리고 사랑시로서 재이해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시는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 각자에게 다양한 정서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장르입니다. 한 가지 의미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이 시를 읽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학교에서 어떤 시 교육을 받아왔나요? 마치 시에 무슨 정해진 정답이 있는 것처럼 선생님들이 가르친 해석을 무작정 암기해 오진 않았나요? 그저 시험 문제를 잘 풀기 위해 시를 공부해 왔지 시를 음미하고 즐기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지는 않나요? 그래서 시험이 끝난 후 더 이상에 시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지 않나요?
우리에게 어떤 시교육이 필요할 지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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