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3

셰익스피어/박우수 번역, 햄릿, 열린책들(2)

ddolappa72 2024. 8. 18. 18:40

 

요릭의 해골을 들고 고뇌하는 햄릿

 

햄릿은 마마 보이였나?

 

아버지 햄릿 왕의 장례식에 참석한 햄릿은 부친의 죽음에 대한 애도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더 강하게 표출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동생이지만 아버지와 딴판인 사람과, 그것도 아버지가 사망한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종내 못마땅합니다. 학생들은 이미 서른 살이나 된 햄릿이 왕자로서 왕위에 관심이 없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 어머니의 재혼에 왜 그토록 불만스러워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왕위 승계는 조선 시대와 달리 장자 상속의 원칙이 확립되어 있지 않던 시대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목전에 둔 한 국가의 왕자가 부친의 죽음에 슬퍼하며 상복조차 벗지 않은 채 국가의 안위는 나몰라라 하고 어머니만 원망하고 있는 모습이 여간 볼썽사납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햄릿이 마마 보이가 아닌가 의심스럽다고까지 했습니다. 나이가 서른이나 되는 햄릿이 어머니의 재혼을 못 받아들이는 것은 그가 여전히 모친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미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수업 시간에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던 사실을 기억했던 한 학생이 햄릿이 아버지의 죽음에서 리외처럼 삶의 부조리를 지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페스트'에서 의사 리외는 삶의 무의미성에 맞서서 적극 투쟁을 했던 인물인데, 이렇게 해석할 경우 햄릿은 실존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 삶의 부조리와 투쟁을 벌인 선구자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는 햄릿이 죽은 선왕의 이름과 같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햄릿의 죽음은 아들 햄릿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햄릿의 눈에 왕의 자리나 세상은 무의한 일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싯다르타가 인생의 문제를 풀기 위해 출가를 결심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한 학생이 세계사에서 배운 지식을 떠올리고 이러한 해석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서양의 중세는 기독교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던 시대로 알고 있는데, 햄릿이 어떻게 불교식 고민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학생은 '불교'라는 단어에 꽂혀 햄릿이 탄생한 시기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과도기였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 같습니다. 햄릿 왕은 카톨릭식 장례 절차에 따라 묻혔고, 햄릿 왕자는 루터가 재직한 프로테스탄트 대학에 다니고 있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반문을 해봅니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이자 30년 전쟁과 페스트 등으로 인해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던 시대였기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새롭게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로 유명한 햄릿의 독백도 사실 죽음의 문제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햄릿 :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아니면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까지 대적하여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죽어서 잠을 잔다. 이게 전부란 말인가? 그래, 전부야. 아니, 잠을 자면 꿈을 꾸겠지. 맞아, 그것이 문제야. 사멸할 이 육신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죽음의 잠 속에서 우리는 무슨 꿈을 꾸게 될까? 그 때문에 우리는 망설이고 이 장구한 인생의 재난을 이어 가는구나. (….) 여태껏 아무도 되돌아온 자 없는 그곳, 그 미지의 나라,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저승으로 달려가기보다 이승의 질곡을 참고 살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햄릿'이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햄릿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풀게 될까요?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글로브 극장의 간판에는 '이 세상 모두가 연극 무대'(Totus mundus agit histrionem)라는 라틴어가 적혀 있다
 

 

세상이라는 연극무대

 

왕 : 거트루드, 당신도 물러가 주시오.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햄릿이 이곳에서 오필리아를 만나도록 그를 이곳으로 은밀히 불러오라 일렀소. 과인은 그녀의 아비와 함께 합법적인 염탐꾼이 되어 숨어 있다가(unseen) 그들의 만남을 몰래 엿보고서(seeing) 햄릿이 이토록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사랑 때문인지 아닌지를 그의 거동으로 판단할 것이오.(3막 1장)

 

클로디우스 왕은 햄릿이 정말 미쳤는지 알아 보기 위해 궁전 곳곳에 염탐꾼을 배치합니다. 그것은 흡사 조지 오웰의 '1984'의 감시사회를 방불케 합니다. 햄릿이 왜 궁을 '감옥'이나 '무덤'이라고 불렀는지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햄릿은 그런 감시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연극 안에 다시 연극을 도입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자신이 직접 미친 사람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어 감시자들을 무대 위에 올림으로써 햄릿은 그들을 관찰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전략입니다. 클라디우스가 실제로 아버지를 살해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올린 '극중극' 형식의 '곤자고의 암살'은 그가 유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연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덴마크의 궁정은 모두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연극의 무대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다'라는 햄릿의 대사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에 유행하던 '테아트럼 문디'(Theatrum Mundi) 즉, '세계는 연극무대다'라는 비유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연출하는 무대 위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연출자가 되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 신이라는 연출자가 사라진 연극 무대의 배우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일상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지는 않나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나'와 부모나 선생님들 앞에서의 '나'는 똑같이 행동하고 말을 하나요? 우리도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혹은 상황이나 목적에 따라 전부 다르게 '연기'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런 아이디어에 착안해서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은 일상의 삶을 연극론적 관점에서 분석해볼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즉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을 연출하는 공연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는지, 또 우리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기를 원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일상을 연극론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게 하면 메타인지적 관점에서 자기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유익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유령을 만나는 햄릿

 

 

햄릿은 왜 아버지 유령의 부탁을 망설였을까?

 

햄릿은 절벽 꼭대기에서 아버지 유령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 만남의 장소는 호레이쇼의 경고처럼 '저 아래 바닷속을 바라보며 큰 파도 소리를 듣는 이의 마음에 아무 까닭도 없이 죽고 싶은 망상'을 불러 일으키는 곳으로 이성과 광기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만남의 시간 역시 밤에서 낮으로 시간이 교차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즉 햄릿이 유령과 대면하게 되는 장소와 시간은 서로 상반되는 두 세계가 충돌하는 문턱인 셈입니다.

 

햄릿은 유령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숙부 클로디우스가 아버지를 교묘하게 암살하고 부당하게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 유령은 아들에게 복수를 요청합니다.

 

유령 : 그렇게 나는, 잠결에, 아우의 손아귀에, 목숨, 왕관, 왕비를 단번에 빼앗기고, 내 죄업의 꽃들이 활짝 핀 채 잘려서 성찬식도 도유식도 고해도 참회도 없이 생전의 온갖 죄상을 이마에 붙인 채 하느님의 심판대로 내쳐지고 말았다. 오, 무섭고, 무섭고, 참으로 무섭구나! 천륜을 네 안다면, 묵과하지 마라. 덴마크 왕의 침소가 음욕과 저주받은 근친상간의 소굴이 외지 않게 해라. 허나, 네가 이 일을 어찌해나가든, 네 마음을 더럽히지도, 네 영혼에 어미를 해하려는 무슨 궁리를 품지도 마라. 어미는 하늘에, 가슴속 박혀 찌르고 쏘는 가시 바늘에 맡겨라. 나는 곧 떠나련다. 반딧불이 신새벽 가까움을 알리며 힘 잃은 불빛을 거두기 시작하누나.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나를 기억해라.

 

유령은 햄릿에게 복수를 하되 마음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또 어머니 거트루드를 해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복수해야 마음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버지 유령은 왜 자신을 살해한 자와 혼인을 함으로써 자신의 침소를 더럽힌 아내에 대한 복수를 하지 말라고 아들한테 신신당부하는 것일까요? 또 이상한 점은 유령이 퇴장한 후에도 무대 아래에서 햄릿에게 계속해서 '맹세하라'고 외친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원한이 사무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아들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재촉하려는 의도였을까요?

 

우선 복수 지연 문제는 이 텍스트에서 쟁점이 되는 질문입니다. 비고츠키가 훌륭하게 정식화한 것처럼 '햄릿'은 '이야기 공식은 햄릿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왕을 죽이는 것'이지만 '플롯은 그가 왕을 죽이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모순됩니다. 셰익스피어가 왜 이러한 방식으로 텍스트를 구성했는지에 대한 답변하는 방식에 따라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동안 많은 논평가들이 햄릿의 '우유부단 한 성격'에서 그 원인을 찾았습니다. 햄릿의 성격적 결함으로 인해 그의 복수가 지연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대답은 셰익스피어가 왜 그의 성격을 그런 식으로 설정했는가 하는 또다른 물음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책을 읽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햄릿의 성격이 우유부단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습니다.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햄릿이 앞서서 유령을 만나는 장면이나, 어머니와의 대화를 염탐하고 있는 폴로니우스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장면, 또 계책을 세워 자신을 감시하던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을 죽게 한 장면 등에서는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햄릿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아버지의 복수를 미루는 자신을 '어리석은 불한당'으로 꾸짖으며 자책하는 모습이나 독백 장면에서는 사색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왕이 홀로 기도할 때 죽일 수 있었는데도 완벽한 복수를 위해 미루는 모습이나 왕의 범죄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곤자고의 암살' 연극을 준비하는 모습에서는 그가 치밀하고 계획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계획적 성격 때문에 햄릿은 복수를 미루었던 것은 아닐까요?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문제는 유령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햄릿은 자신이 만난 유령이 악령은 아닐까 의심합니다. 호레이쇼를 비롯한 몇몇도 유령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실제로 유령과 대화를 나눈 것은 햄릿이 유일하기 때문에 유령이 전한 메시지의 진실성은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유령의 말이 진실이라 해도 그 말만 믿고 왕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그의 범죄를 입증할 만한 물증이 필요합니다. 햄릿이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연극을 기획했지만 그것 역시 클로디우스의 범죄 사실을 증명해주지는 못합니다. 레어티즈가 군사를 이끌고 왕궁을 쳐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 플로니우스가 부당하게 살해되고 부적절하게 매장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햄릿에게는 그러한 복수의 정당성이 부족합니다. 즉 햄릿의 복수가 계속해서 지연되는 이유는 그가 복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이 그만큼 지난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햄릿이 겨우 찾은 복수의 명분은 왕이 영국 왕에게 보낸 편지가 전부입니다. 국서를 가지고 간 자들을 고해할 시간도 없이 즉시 처형해달라고 영국 왕에게 청하는 클로디우스의 편지를 이용해 햄릿은 자신을 감시해온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을 역으로 처벌하게 됩니다. 하지만 왕의 편지를 이용해 그를 죽이게 된다면 그것은 햄릿의 사적인 복수일 뿐 선왕을 죽이고 부당하게 왕좌를 찬탈한 자에 대한 공적인 복수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경우 어긋난 시대를 바로잡겠다는 햄릿의 야심찬 계획 역시 실패한 것이 됩니다.

 

자, 다시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로 되돌아가도록 합시다. 햄릿은 대체 왜 아버지의 복수를 미뤘던 것일까요? 아니 질문을 바꿔서 다시 해 봅시다. 셰익스피어는 왜 햄릿이 아버지의 복수를 연기하도록 했던 것일까요? 셰익스피어는 복수극의 형식을 차용해 실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햄릿이 그토록 치밀하게 고민을 해도 왕에게 복수를 할 만한 공적인 정당성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당대의 왕정 질서가 얼마나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인지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면 부당하게 권력을 차지한 클로디우스가 결국에 죽고 만 것은 세속적 권력이 부패하면 결국에는 신의 처벌을 받고 만다고 경고하기 위함이었을까요?

 

그리고 햄릿이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겉으로는 미친 적 연기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고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현대인들과 비슷하지는 않나요? 아버지의 복수 명령에 따르는 듯하면서도 어떻게든 그것을 지연시키려는 듯이 행동하는 햄릿의 모습은 흡사 카프카의 그것과도 비슷하지 않나요? 자의식으로 가득 찬 채 선택의 순간마다 고민하고 갈등하는 햄릿의 모습은 현대인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보아야 할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