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은 깨고 나온다
BTS와 '데미안'
한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 할 청춘의 필도서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책은 신비한 아우라를 내뿜었고, 책에 나오는 뜻모를 구절을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친구들 사이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친구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요즘처럼 책을 읽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젊은 날의 치기였다고 기억합니다.
그런 '데미안'을 청소년들이 다시 주목하게 된 건 전적으로 BTS의 공이 크다고 봅니다. 2016년에 발표된 BTS의 '피, 땀, 눈물'은 전세계 아미들을 열광시켰고, 앨범과 뮤직 비디오가 헤세의 '데미안'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적 역시 덩달아 판매고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저 또한 책의 모티브를 뛰어난 방식으로 시각화한 뮤직 비디오를 보며 감탄했었습니다. 계기야 어쨌든 책을 읽지 않은 젊은 세대가 읽기 어려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헤세의 '데미안'을 신비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무엇인지, 또 그 책이 여전히 청소년들에게 읽힐 만한 것인지, 그리고 그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책은 여전히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가치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충분하게 논의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두 세계 사이에서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어느 날 자신이 '밝음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사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상징되는 '밝은 세계'에는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 다정한 말들과 깔끔한 옷이 속해 있습니다. 반면에 '어두운 세계'는 도살장과 감옥 같은 섬뜩한 장소나 강도, 살인, 자살 같은 끔찍한 사건들과 더럽고 거친 말들이 소용돌이 치는 곳이었습니다. 싱클레어의 고민은 이 두 세계가 놀라울 정도로 가깝게 맞대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금지된 그 세계에 유혹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초반에 주인공이 직면한 갈등과 고민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소설의 서사는 이런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사건들로 직조됩니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밝음의 세계' 속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가 이제 막 그 세계를 벗어나 '어둠의 세계'를 인식하고 혼란을 겪는 인물입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이제 막 유년기를 벗어나 청소년기에 진입한 청춘들이 마주하게 될 정신적 혼란을 떠올리게 합니다. 싱클레어가 그런 혼란의 시기를 데미안이라는 정신적 멘토의 도움을 받아 헤쳐나가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라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싱클레어가 어떻게 두 세계를 구분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말한 '밝음의 세계'는 기독교적 경건주의를 신봉하며 살았던 독일의 시민 계급의 가치가 반영된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성실과 경건을 진정한 가치로 내세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육체나 성적 욕망을 억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싱클레어가 육체가 배제된 '정신적 사랑'인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을 거쳐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통합된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데미안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인 에바 부인 역시 정신적 멘토로 기능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둠의 세계'는 노동 계급이 속한 세계로서 개별인간의 독특성을 무시하고, 개인을 무리 속에 얽매어 두려는 특징을 지닙니다. 하녀들과 크로머로 대변되는 이 세계는 유혹적인 만큼 폭력적으로 싱클레어를 구속하려 들지만 데미안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볼 경우 '두 세계'는 매우 특수한 독일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한 구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소설의 후반부에 데미안이 '진정한 연대'에 대해 말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연대는 각 개인이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새로이 생겨날 것'입니다. 반면에 '무리 짓기'는 자신을 알지 못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도피하기 위해 만든 거짓 공동체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따르고 있는 삶의 법칙이 낡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무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데미안의 이러한 언술은 작가 헤세의 시대 진단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시 유럽 사람들이 전통적 가치와 질서는 붕괴되었지만 아직 새로운 세계 질서는 도래하지 않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너진 옛 계율'을 억지로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적 질서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헤세가 소설 후반부에 데미안이 자발적으로 전쟁터로 향하도록 한 까닭도 전쟁을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계1차 대전에서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이 유럽에 새로운 가치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나요? 반전주의자로 알려진 헤세의 이런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악'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주인공 싱클레어를 괴롭히며 용돈을 갈취하는 크로머는 청소년 시절 책을 읽은 후에도 오랫 동안 잊혀지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꿈속에서 그가 으슥한 골목길에서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던 광경은 한동안 저의 어린 영혼을 옴싹달싹 못하게 옥죄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데미안처럼 강인한 친구가 나타나 싱클레어처럼 저를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장을 하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생에서 크로머와 마주친 것과 같은 상황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먼저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거짓말을 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해서 그에게 책을 잡힐 빌미를 제공합니다. 그는 왜 그런 도둑질 이야기를 꾸며 냈던 것일까요? 그 순간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또래 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허풍을 떤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부터 '어두운 세계'에 유혹을 느꼈던 그는 크로머가 속한 무리에 들어가길 원했고, 또한 크로머가 휘두르는 권력이 탐이 나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크로머는 이미 싱클레어의 마음 속에 있던 어두운 충동이 실체화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엄석대가 당시 한국 사회의 대중들이 갖고 있던 '일그러진 욕망'의 체화된 화신이듯 말입니다.
그런데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싱클레어는 데미안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시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가 '원래 내 모습보다 더 어리게, 더 의존적으로 더 어린 애처럼' 굴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데미안이 크로머의 자리를 대신해서 그를 괴롭힐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앞서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잠깐 맛본 '어둠의 세계'에 진저리를 치고 다시 '오래된 밝은 세계'에 머물러 있으려는 태도는 퇴행에 불과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순간을 싱클레어는 이렇게 기억합니다. "아, 이젠 나도 안다.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내키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데미안에 대한 싱클레어의 마음 역시 항상 일관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를 동경하기도 하고, 그의 뛰어난 체력과 지력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리고 어느덧 그와 대등한 위치에서 깊은 유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의 변화 과정이 싱클레어가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겠지요. 다른 한편 싱클레어의 내면의 성장 과정은 크로머로 대표되는 악과 유혹에 맞서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성인이 되어 싱클레어가 다시 크로머를 만나게 된다면, 그는 크로머를 어떻게 대할까요? 그는 여전히 크로머를 두려워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크로머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충분히 성장했을까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싱클레어는 아버지가 자신의 젖은 구두를 눈치 채지 못한 모습을 보고 최초로 자신이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가는 이 장면을 '아버지의 신성함에 새겨진 첫 칼자국'이었다고 평가하고, 아버지에 대해 느꼈던 우월감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체험이라고 서술합니다. 한 개인이 '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반 제넵은 모든 통과의례가 '분리-전이-통합'의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 '분리'의 단계는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세계와 의도적으로 단절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 '전이' 단계는 자신의 몸에 밴 오래된 습관이나 행동을 제거하고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사람들과 분리되어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고독'은 새로운 자아로 탈바꿈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 번째 '통합'은 충분한 전이 단계를 거친 후 자신도 모르게 들어서는 단계입니다.(아놀드 반 제넵/김성민 번역, 통과의례, 달을긷는우물) 대부분의 성장소설이 통과의례를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참다운 자아'를 찾기 위해 먼저 익숙했던 세상을 등지고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 길은 광대한 세상을 떠도는 고단하고 힘든 모험의 길이지만 결국은 내면의 자아를 찾아 나선 마음 속 모색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길을 떠나지 않고는 영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헤라클레스 같은 그리스의 영웅도, 예수나 부처와 같은 성인도, 그리고 싱클레어도 입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세계를 떠난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인도를 받아 '아브락사스'로 상징되는 비밀스런 모임에 가입하게 됩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신비한 주문처럼 보이기도 하는 유명한 이 문장들은 데미안이 지향하는 세계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는 싱클레어에게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에 대해서도 예배를 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과격한 반기독교적 주장 같지만 데미안은 우리가 세계 전체를 온전하게 인식하려면 사회에서 '허락'된 것뿐만 아니라 '금지'된 것도 사유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금지와 허락의 구분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미안의 이런 주장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외부로부터 강제로 주입되고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을 일일히 점검하고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한 이러한 요구를 끝까지 관철하게 될 경우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옛 세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자아란 기존 질서의 의심하고, 그것을 무너뜨려야만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것을 의심하고 반항하라는 헤세의 이런 요구를 과연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이나 학생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매우 궁금합니다. 어른들의 말에 고분고분하고, 오직 공부에만 매진하는 착한 학생을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주어진 것들을 의심하고 항의하며, 사회가 정해놓은 길과 다른 길을 가려는 반항적인 학생이 있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그 학생을 수용할 수 있을까요? 헌데 어쩌면 우리가 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혼란의 주된 원인은 그런 학생들을 길러내지 못한 교육 시스템과, 그렇게 길러진 구성원을 수용하지 못한 사회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데미안'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읽힌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가능성이다
하지만 참다운 자기를 찾기 위해 고독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일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때 싱클레어가 찾아간 피스토리우스는 그에게 커다란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그는 개인의 경계를 좁게 긋지 말고 이전에 살았던 인간의 영혼들이 우리 영혼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런 영혼들을 점차 의식으로 전환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 가능성들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충고합니다. 즉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네 안에는 무수한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그러니 너 스스로를 믿고 존중해라.'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스토리우스는 영혼이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되었다고 여기지 말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서둘러 망쳐 버려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즉 '영혼이 소망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고, 용기를 갖고 도전해 보도록 해라.'고 그는 말합니다.
알을 깨고 바깥으로 나오려는 젊은 영혼들에게 데미안의 강인함과 에바 부인의 다정함이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 준다면, 피스토리우스의 따뜻한 충고는 커다란 위로가 되어 줍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너는 가능성이다. 그러니 용기를 갖고 도전해 보아라'고 말해줄 수 있는 어른들이 더 많이 늘어나길 강력하게 소망합니다.
끝으로 소설 '데미안'의 주제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찾아 보시며 BTS의 뮤직 비디오 '피, 땀, 눈물'를 감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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