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3

알베르 카뮈/김화영 번역, 페스트, 민음사(2)

ddolappa72 2024. 9. 1. 12:41

질병보다 경제적 궁핍이 더 공포스럽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도심보다 인구밀도가 높고 형편도 어려운 변두리 지역에서 희생자가 더 많이 발생했다고 서술했습니다. 감염병이 주거공간의 밀집도와 위생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이 관찰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실제로 주거환경과 경제적 수준 차이에 따라서 코로나에 감염된 정도와 후속조치가 달랐다는 통계 자료가 많습니다. 이것은 페스트나 코로나 같은 질병을 사회학적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코로나는 사회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또한 소설에서는 간호사들과 무덤 파는 인부들이 페스트로 인해 많이 사망했지만 그 일을 할 인력이 부족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페스트로 인해 모든 경제 활동이 중단되고 실업자가 엄청나게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단순 노동은 언제나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해 죽는 것보다 굶주림을 더 공포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발표한 '코로나19가 취약계층 직장 유지율에 미친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가 소득 상위층보다는 저소득층에, 장년층보다는 청년층에, 남성보다는 여성에 더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생각해 보고,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할 지 고민해 봤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코로나 기간 중 전국민에게 지원금을 준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습니다. 과연 전국민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이 맞는지, 만약 선별해서 주게 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지원금을 주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논의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은 공돈처럼 생긴 지원금으로 부모님과 고기를 사먹었지만, 만약 받지 않게 된다면 불평등하게 느끼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아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한테 지원금을 주는 것은 낭비이고, 오히려 저소득 계층 사람들한테 더 많은 지원금을 지급했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거저 생긴 돈이라 여기고 소비를 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소상공인한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기에 무조건 나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원금을 지급받아야 할 계층을 어떻게 정할 지도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연봉 2,500만원 이하를 기준으로 할 경우 연봉 2,501만원을 받는 사람은 제외되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또 연봉을 계산할 수 없는 일용직 근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코로나를 단순히 의학적 문제로만 인식하지 말고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비합리적 미신에 빠져들까?

오랑 시의 사람들은 페스트가 지속될수록 점차 성 로크의 메달이라든가 부적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예언에 지나칠 정도로 흥미를 보이고, 성인들이 쓴 예언서를 대량으로 찍어 유통시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양질의 포도주가 전염병을 예병하는데 효과적이라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상식으로 퍼지기도 했습니다. 석간신문 가두 판매원들은 불안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쥐들의 습격이 중단되었다는 거짓 뉴스를 유포시키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 기간 중 뉴스를 통해 경험했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체 왜 사람들은 페스트와 같은 극단적 상황이 도래하면 이처럼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페스트나 코로나 같은 감염병은 개인의 행동과 무관한 사건입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내가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은 견디기 어려워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불행을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기 위해 관련 정보를 찾아 보지만 초기에는 코로나의 발생 원인도 분명치 않았고, 해결책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련 정보도 불확실하고 뚜렷한 해결책도 없을 때 미신은 거짓된 통제감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우리가 더 주목할 점은 메신저리보핵산(mRNA) 기술을 활용한 코로나 백신이 개발된 후에도 미신이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백신의 부작용으로 인해 신체 장애가 발생하거나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뉴스를 접하며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시민들에게 백신 접종 증명서를 강압적으로 요구해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코로나 감염으로 인한 위험과 백신 접종으로 인해 발생할 부작용의 위험 중 어떤 것이 더 큰지 따져 보고, 어떤 선택이 합리적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팬데믹과 같은 상황에서 국가가 시민들에게 강압적으로 백신 증명서를 요구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백신 접종을 개인의 선택에 맡겨 두어야 하는지도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각자 합리적인 논리적 추론을 통해 타당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연대할 수 있을까?

신문기자 랑베르는 취재를 위해 오랑에 왔다가 페스트로 인해 이 도시에 갇히게 된 인물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해 도시를 탈출하려고 시도하지만 마침내 리외를 도와서 페스트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혼자서만 행복한 것은 수치스러울 수 있어요. 나는 이 도시에서 이방인이니까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 내 경험에 비추어, 원하든 원치 않든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코로나 기간 중 목도한 경험 중에는 랑베르처럼 연대의식을 느끼고 헌신한 사람들도 있지만, 어수선한 상황을 이용해 밀수를 해서 한 몫 잡으려는 코타르 같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마스크가 부족했을 시기 다량의 마스크를 고가에 판매하려다 붙잡힌 사람들이나 물과 음식물을 사재기하려 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기적 행동은 개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일까요? 코로나 기간 중 국제 사회 역시 국가안보 차원에서 코로나에 대응하기 위해 연연해 했고, 협력과 연대보다는 자국 우선주의와 각자도생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아시아인들에 대한 무차별적 테러와 혐오는 또 어떻습니까? 코로나 같은 감염병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서로가 옆에 있는 이웃을 믿고 연대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실상은 서로에 대한 원망과 불신만 더 팽배하지는 않았나요?

모두가 랑베르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코타르 같은 사람이 덜 나타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아닐까요?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 지자 언론은 호들갑스럽게 '포스트 코로나'니 '뉴노멀'이니 하면서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처럼 떠들지만 코로나는 아직도 완전히 극복되지도 않았고, 코로나 기간 중 발생한 산적한 문제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의사 리외는 자신이 기록한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이 될 수 없으며 '여전히 완수해야 할 그 무엇에 대한 증어'에 불과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밤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고 서늘하게 경고합니다. 이러한 경고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2006)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딸을 구하는데 실패한 송강호가 부모를 잃은 고아를 데려와 함께 식사를 하며 밖에서 들리는 기척에 잔뜩 긴장한 채 밖을 응시하는 모습은 괴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코로나 시대에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경고의 목소리를 상기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