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들 천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한국 사람들은 '천재' 혹은 '영재'라는 타이틀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방송이나 언론은 물론이고 각종 학원들의 홍보 문구에서도 이와 관련된 문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토록 '천재'에 목말라 하면서도 정작 한국에 제대로 된 영재 관련 교육은 전무할 뿐더러 선행학습을 영재 수업으로 포장해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론에서 높은 아이큐를 지닌 천재로 소개되어 화제를 모았던 아이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면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수업 중 학생들에게 가장 뛰어난 천재로 꼽은 아인슈타인이 만약 한국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예상해 보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가 괴짜나 문제아로 낙인찍혀 변변한 대학도 진학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아갔을 것이라고 답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대답은 천재가 단순히 지능만 높은 사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그들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많은 학생들한테 왜 천재가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천재는 무엇이든 쉽게 기억하고 빨리 해낼 수 있으니까 편하게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제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노력없이 실현시켜 줄 수 있는 편리한 수단으로 천재가 되고 싶은 것일 뿐입니다.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영재'나 '천재'라고 하면 기뻐하는 것도 그 마법과도 같은 단어가 자녀들의 사회적 성공을 예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에서 '천재'란 단어는 물신화된 욕망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런데 '천재'의 어원인 '게니우스'(genius)는 원래 인간을 신성한 존재에게 연결하는 성스러운 존재를 뜻했습니다. 그러다 16세기 경 르네상스 시기에 천재는 천상으로부터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아서 창조활동을 수행하는 존재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대표적으로 다빈치가 미켈란젤로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천재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고 특별한 창조력이나 통찰력을 지닌 개별적인 존재로서 천재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가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낭만주의 예술이 천재를 개인의 개성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삼은 미학 운동을 전개함에 따라 모차르트나 뉴턴 같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천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파시즘이 히틀러를 '천재'로 숭배하게 되면서 오히려 천재에 대한 숭배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천재 숭배에 대한 경계가 생겨나면서 지능지수(IQ)보다 감성지능(EQ)가 중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고, 또 여러 사람의 머리가 낫다는 집단지성에 대한 믿음도 강조되었습니다.(대린 M. 맥마흔/추선영 번역, 천재에 대하여, 시공사)
그래서 학생들이 갖고 있는 천재에 대한 그릇된 편견과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 대표적인 천재들로 손꼽히는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삶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대중들에게 대표적인 천재 과학자로 인식되는 원인은 우선 그들이 남긴 탁월한 업적에 기인한 것입니다.
먼저 뉴턴은 자신의 대표작 <프린키피아>(1687)에서 당대 과학자들에게 난제로 남아 있던 케플러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케플러는 지구나 화성 같은 행성이 태양 주위를 타원운동한다는 것을 밝혀냈지만 이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뉴턴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천체의 운동과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운동이 모두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밝혀 냄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나뉘었던 천상과 지상을 하나로 합해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원제가 암시하듯 자연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놓음으로써 수학에 정통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다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뉴턴의 중력이론이 당시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수학적 난해성 때문이 아니라 뉴턴 역학이 기존의 철학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데카르트식의 기계적 철학은 힘(force)을 물질운동을 일으키는 '효과'(effect)로 이해했던 반면, 뉴턴은 힘을 물질문동의 원인(cause)으로 해석해 천체와 지상의 운동을 기술했습니다. 기계적 철학자들 입장에서는 떨어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마술사들이 주장한 신비한 힘(power)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뉴턴의 주장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05년 그가 처음으로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을 때 그가 빛이라는 파동을 매개하는 신비한 매질인 에테르(ether)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에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전자기 파동인 빛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매개물인 에테르가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아인슈타인이 이것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과학적 천재의 새 모델을 필요로 했던 후계자들이나 뉴턴 과학을 쉽게 풀어쓴 대중서들은 뉴턴의 신격화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이와 달리 아인슈타인은 '뉴턴 대 아인슈타인'의 대결 구도를 조성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각종 언론들 때문에 단숨에 대중들에게 천재 과학자로 각인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에 대한 이러한 신격화는 그들의 이론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하는 한편, 과학은 천재나 하는 것이라는 미신을 퍼뜨린다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또한 과학의 발전이 한 두 명의 천재에 의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뉴턴은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뉴턴과 같은 지적 혁신자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거인들' 즉,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와 같은 뛰어난 선배 과학자들의 지적 노고가 축적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뉴턴이 미적분학, 광학, 역학 등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1665년을 흔히 '기적의 해'라고 부릅니다. 아인슈타인이 현대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공간, 시간, 질량 및 에너지의 기본 개념에 대한 중요한 4편의 논문을 연달아 발표한 1905년 역시 '기적의 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창조적인 생각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호기심 많던 어린 뉴턴은 풍차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의 원리를 파악한 뒤 작동이 가능한 풍차 모형을 정확히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보고 그의 재능을 알아차린 삼촌과 선생님 덕택에 뉴턴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아홉 살이 되던 1661년에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험이나 수학보다는 논쟁과 토론을 중시하던 당시의 교육 방식에 크게 실망한 뉴턴은 독학으로 갈릴레오의 역학, 케플러의 광학과 천문학, 보일의 색깔론,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 광학과 기하학에 대한 저술을 읽어나갔습니다. 1665년 흑사병이 런던을 습격하자 학교는 문을 닫고 뉴턴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를 성숙시키고 해결책을 찾는 데 골몰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뉴턴은 세상을 뒤바꿀 혁신적인 생각들을 해내게 됩니다.
자, 그러면 뉴턴이 '기적의 해'를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엄마의 교육열? 반복적인 학원 교육? 명문 대학 진학?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교육 상식과 달리 당시 뉴턴에게 필요했던 것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책 읽기에 몰두했고, 자신이 궁금해 하던 문제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평생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으려고 애쓰는 소년"으로 살았던 뉴턴의 창조성은 끊임없이 샘솟는 호기심과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 했던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 시절 뉴턴이 떠올린 창조적 아이디어 때문에 그를 천재 과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시기 시작한 그의 광학 연구는 60대가 되어 <광학>(1704>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 역시 크게 세 단계를 거쳐서 20년 간 발전시킨 결과입니다. 만약 뉴턴이 청년 시절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에 만족하는데서 멈춰 버렸다면 그는 세기의 천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집요하게 천착해서 철저하게 탐구한 뒤 그것을 완결된 책의 형태로 완성해 냈기 때문에 세기의 천재적 과학자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재들의 독서 습관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뉴턴의 독서 방식과 메모 습관입니다. 그는 책을 읽다가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도로 앞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또 막히면 또다시 처음부터 읽었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책을 읽는 일은 상당히 많은 시간과 끈기가 필요한 것이지만, 일단 한번 성공하면 뉴턴이 도달한 이해는 책 10권을 대충 읽은 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뉴턴은 독서한 내용을 반드시 요약해 두었습니다. 그저 요약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는 그것이 사실일 때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과들을 기록했고,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실험 상황을 설정해 두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책의 내용을 잘 기억하는 것으로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수학 공식을 암기해서 잘 기억하고 있더라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문제를 조금만 꼬아내면 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인슈타인에게서도 유사한 독서 습관이 발견됩니다.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 아인슈타인은 그리스어 교사로부터 '장래에 쓸모있는 인물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고 남들만큼 빨리 수학 문제를 풀지도 못했지만, 그는 책에 나오는 증명을 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직접 증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학교 성적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기르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대학에서도 그는 정해진 과정을 충실히 따르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실험과 독서를 통해 자기만의 공부를 해나갔습니다. 그는 무엇을 읽든 개념부터 명료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비판적으로 소화해 냈습니다. 특수상대성 이론의 단초 역시 1897년 그가 아라우에서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던 중 착상한 것입니다. 그는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과 갈릴레오 이래의 상대성 운동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파악했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1905년에 특수상대성 이론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뉴턴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인슈타인은 결코 '세상의 몰이해 속에 고독하게 연구한 천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베른 특허국에서 근무할 때도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토론 모임을 만들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료들과 끊임없이 토론했습니다. 또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일반상대성 이론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 동안 자신이 해왔던 작업 방식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한편 수학 교수였던 치구 그로스만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며 그로부터 미분기하학의 텐서 방정식을 배워서 물리학에 응용하기도 했습니다.
공부는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보다 조금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욕심에 자신이 필기한 것을 보여주지도 않는 아이들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대체 그런 인격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부해서 남 주냐'라는 말도 있지만 남을 주기 위한 공부를 해야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남과 함께 하는 공부를 해야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학생들과 이 책으로 수업을 하며 함께 찾아낸 창조성의 비밀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학년별 책읽기 > 중3'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김욱동 번역,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1) | 2024.10.26 |
---|---|
아이작 아시모프/김옥수 번역, 아이, 로봇, 우리교육 (8) | 2024.09.29 |
알베르 카뮈/김화영 번역, 페스트, 민음사(2) (5) | 2024.09.01 |
알베르 카뮈/김화영 번역, 페스트, 민음사(1) (11) | 2024.09.01 |
셰익스피어/박우수 번역, 햄릿, 열린책들(2) (2) | 2024.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