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교육은 정답 찾기가 아닙니다
책 읽기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우리 사회가 책에 갖고 있는 견고한 편견들과 부딪히게 될 때가 많습니다. 우선 책을 많이 읽으면 아이가 국어를 잘 하게 될 것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 물론 독서량이 많은 아이가 국어 시험을 잘 보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학교에서 치루는 국어 시험 유형에 익숙치 않으면 시험이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 놀랍게 아직도 수십 년 전에 유행했던 속도법 학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책을 많이 읽기만 하면 교육적으로 무조건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독서왕 선발 대회라는 것을 해서 하루에 책을 30권 이상을 읽었다는 학생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과연 그 학생이 읽은 책들을 제대로 소화시키기나 했을까요? 그리고 단순히 많이 읽기만 하면 정말 독해력이 좋아질까요?
학부모들이 갖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편견 중 하나는 '책 읽기는 공부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 책 읽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핀잔을 주는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 입시를 치르는 목적도 대학에서 교재와 논문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아닌가요? 책 읽기 자체가 공부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이루어지는 교육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이러한 편견은 교육 현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책 읽기 수업에서도 요약본으로 줄거리를 확인하고 중요 대목을 발췌해서 정답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식으로 운영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 스스로 책의 내용을 요약할 줄도 모르고, 문제점을 파악해서 정답에 접근하는 방식도 모르고, 심지어 책의 주제도 학원에서 배운 것이 전부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입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줄거리 정도는 알고 있고, 햄릿을 우유부단한 인간 유형의 대표라고 떠벌이기까지 합니다. 마치 책을 전부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지만 막상 책을 직접 읽혀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소연을 늘어 놓습니다. 자신이 책과 씨름을 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이 아니니 쉽게 잊힐 뿐만 아니라 그런 노고를 들여야 얻을 수 있는 해석 능력을 갖추지 못한 탓입니다.
문제제기로서 문학 공부
많은 문학 수업이 작품을 다루기 전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배경 지식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햄릿'의 경우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엘리자베스 1세의 튜더 왕조와 세임스 1세의 스튜어트 왕조를 설명하거나 작품의 배경인 12세기 덴마크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리고 작품에서 이런 역사적 상황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를 찾는 것으로 작품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하곤 합니다. 그런데 문학 작품의 가치가 작품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을 확인하는데 있는 것인가요? 역사적 지식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역사책을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나요? 문학 작품의 배경을 아는 것은 우리가 작품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는데 그쳐야지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곤란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작품에서 시대적 배경을 역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햄릿'에서는 죽은 선왕과 클로디우스 왕이 보여주는 국가 운영 방식의 차이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완전 무장한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난 햄릿 왕은 생전에 담판 중에 화가 나서 폴란드인들을 얼음판에 짓이길 만큼 잔인하고 냉혹한 무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덴마크가 젊은 포틴브라스에게 침략당할 위험에 처한 것도 그가 젊은 포틴브라스의 아버지와 목숨을 건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어 영토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햄릿 왕은 중세의 기사도의 표본이라 할 만합니다.
이와 달리 클로디우스 왕은 선왕에 의해 빚어진 갈등으로 인한 군사적 긴장 관계를 외교술로 해결합니다. 클로디우스는 코넬리우스와 볼티먼드를 늙은 노르웨이 왕에게 사신으로 보내서 협상을 통해 국가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합니다.
주인공 햄릿이 살았던 시대는 이처럼 중세의 기사도가 몰락하고 근대의 왕정이 막 등장하던 과도기에 해당합니다. 햄릿의 고민과 갈등은 그가 옛 가치와도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새로운 가치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햄릿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효과적인 교두보가 놓인 셈입니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햄릿'(1601)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605)가 동일한 역사적 전환기에 탄생한 작품들이라는 사실 역시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햄릿은 어떤 사람인가요?
작품이 발표된 이래로 주인공 햄릿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이 등장했습니다. 괴테는 햄릿을 '극히 도덕적이지만, 영웅이 되는데 필요한 정신의 힘을 지니지 못한 인간'으로 해석했고,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한 예로 그를 이해했습니다. 투르게네프는 햄릿을 돈키호테와 대비시켜 '우유부단하고 자의식이 강한 에고이스트'로 해석했습니다. (다양한 비평적 견해들은 설준규의 햄릿 번역본에 첨부한 부록을 참고할 것)
그런데 이런 다양한 해석들을 살펴보는 일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분명 도움을 주지만, 학생들이 자신만의 햄릿상을 만들어 나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들 중 하나는 주인공이 지닌 다양한 성격 때문인데 학생들이 짐짓 권위에 짓눌려 자신만의 상상력을 펼쳐 나가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작품 속에 나타난 햄릿의 말과 행동 등을 근거 삼아 자유롭게 그의 성격을 유추해보도록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더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햄릿을 1) 아버지의 죽음 이전의 햄릿 2) 아버지가 죽은 이후의 햄릿 3) 유령을 만난 이후의 햄릿 등으로 세분화시켜 관찰해 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구분해서 인물을 살펴 보면 그의 성격적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햄릿 왕이 죽기 이전 햄릿은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이 대학은 마르틴 루터가 재직했던 대학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는 그는 오필리아와 달콤한 연애편지를 주고 받을 만큼 쾌활하고 사랑에 넘치던 젊은이였습니다. 연인 오필리아에 따르면 햄릿은 '조신의 눈이요 군인의 칼이며 학자의 혀, 나라의 희망이자 기대, 맵시의 거울이며 예법의 귀감'이었습니다.
그랬던 햄릿은 선왕의 죽음이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햄릿의 첫 독백을 읽어보면 그는 젊음의 생기를 잃고 시들어버렸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채 자살 충동을 느끼는 우울한 모습으로 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 이 괴롭고 더러운 육신이 남김없이 무르녹아 이슬이 되어 버렸으면. 아니면 조물주가 자살을 금하는 법을 정하지나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 하느님, 하느님! 이 세상만사가 나에게는 한없이 따분하고 싱겁고 무의미하고 무익할 뿐이구나! 염병할, 염병할, 세상은 잡초투성이 정원. 잡초가 자라 열매를 맺는구나. 고약하고 무성한 것들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구나. 이 지경이 되다니!"
이후 햄릿은 유령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숙부 클로디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한 화신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렇게 햄릿의 변화 과정을 정리해 보면 수많은 질문이 제기됩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햄릿은 왜 그토록 견디기 힘들어 했을까요? 유령과 만나기 이전에 햄릿은 왜 그토록 어머니를 원망했을까요? 그리고 유령을 통해 아버지가 암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왜 햄릿은 곧바로 복수하지 않았을까요?
햄릿의 성격을 정리해 보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은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했습니다. 학생들이 제기한 문제들은 대부분 논문들에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들이고 그 해답도 각양각색입니다. 비록 학생들이 찾은 해답이 전문 연구가들의 그것에 비해 엉성하고 부실해 보이더라도 무가치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학 자체가 세상에 던지는 질문이고, 그것에 어떤 방식으로 대답하는가는 읽는 사람의 수만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학 수업은 정해진 정답을 효과적으로 찾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나 세상에 의미가 있는 질문을 던지는 연습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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