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중3

알베르 카뮈/김화영 번역, 페스트, 민음사(1)

ddolappa72 2024. 9. 1. 12:36

 

자연이 인간에게 전하는 경고의 목소리

인류가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상황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작품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입니다. 중세의 서유럽 사회가 페스트로 인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나 줄었다는 사실을 역사책에서나 배웠을 사람들이 의료기술과 위생학적 지식이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현대에 코로나라는 전세계적 감염병에 직면하게 되자 다시 책에서 현재의 위기를 돌파한 지혜를 찾고자 하는 간절함이 반영된 결과라 봅니다. 만약 코로나가 유행하지 않았다면 카뮈의 '페스트'를 손에 들게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리고 카뮈의 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사건의 무대는 알제리 북부 해안의 도시 오랑입니다. 카뮈는 이 도시를 "아무것도 예감할 수 없는 도시, 말하자면 완전히 현대적인 도시"로 묘사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본 정서를 '권태'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소설 초반의 이러한 설정을 꼼꼼히 읽어야 소설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주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오랑과 그곳의 주민들은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도시에서 따분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페스트는 바로 그런 루틴화된 일상을 중단시키고 파괴시킨 거대한 재난입니다. 우리가 지겨워 하면서도 결코 떠날 수 없던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리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고 소설은 묻고 있는 셈입니다. 바로 코로나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 역시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카뮈는 페스트를 지극히 현대적인 도시 내부에 오래 전부터 잠복해 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집들이 세워져 있는 바로 그 땅이 쌓여 있던 분비물을 배출하고, 지금까지 안에서 곪고 있던 종기와 피고름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악명 높은 질병이 마치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내재해 있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페스트는 쥐라는 매개체를 통해 외부에서 침입한 질병이 아니라 현대적 삶 속에 내재하고 있던 파국의 에너지가 분출된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설정을 통해 카뮈는 페스트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조건을 되돌아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뮈의 통찰은 우리가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이해하는데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를 단순히 박쥐를 섭취해온 중국 우한 지역 사람들의 독특한 식문화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 덕택에 코로나는 인간의 과도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인간이 산림을 파괴하고 박쥐의 서식지를 침범하게 되면서 바이러스가 확산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기후 위기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열대지방에 사는 박쥐의 서식지가 확장되었고, 그만큼 인간과 박쥐가 접촉하는 범위도 넓어지게 되면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코로나라는 사건은 지구의 주인을 자처하면서 자연 파괴를 일삼았던 우리 인간의 삶의 조건을 되돌아 봐야 한다는 자연의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코로나 이전에 자연은 2002년에 사스, 2012년에 메르스를 통해 인간에게 경고를 보내왔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반성할 줄 몰랐던 우리는 전지구적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코로나보다 더 무시무시한 재앙에 직면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나요? 그런 파국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부조리의 상징으로서 페스트

카뮈는 '작가수첩'에서 "나는 페스트라는 질병을 통해서, 우리들이 고통스럽게 겪은 그 질식 상태와 우리들이 몸담고 있었던 그 위협과 귀양살이의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나는 동시에 그 같은 해석을 삶 전체라는 일반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그는 페스트를 실제적인 질병으로 다루는 대신 일종의 은유로 다루고 있습니다. 페스트라는 은유를 통해 카뮈는 우리의 삶이 '부조리(l’absurdite)'하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부조리'라는 '인생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실존주의적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덧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경험하고, 아무런 치료제도 없어서 무기력하게 거주지에 갇혀 지내야 했을 때 갑자기 느껴야 했던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또는 '존재의 무의미성'이 바로 부조리입니다.(김용규,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 웅진지식하우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겪게 되는 불안과 공포, 무기력의 심리적 상태를 '코로나 블루'가 부르지만 이것은 카뮈가 말한 '부조리'와는 다릅니다. '코로나 블루'는 치료되어야 할 개인의 정신적 장애를 뜻하는 반면, '부조리'는 내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의미를 상실한 철학적 상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 가야 할 의미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개인이 겪게 되는 무기력과 절망감은 심리 치료로 간단하게 극복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 것인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대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하는 물음에 심리 치료제는 결코 답변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런 철학적 질문에 대답하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더더욱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코로나 기간 중에 겪었던 일들이나 느꼈던 감정들을 말해 보라고 합니다. 추상적인 질문과 답변 대신 일상의 생생한 경험들에서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싹을 틔우기 위한 조치입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않아 좋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지 못해 많이 아쉬웠다고 합니다. 영상을 통한 수업은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집중하기 어려워 딴짓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코로나가 많이 완화되어 일상을 되찾았지만, 만약 코로나가 발생한 초기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어땠을 지 물어봅니다. 만약 높은 치사율을 가진 바이러스로 인해 친한 친구들이나 심지어 부모님을 잃어본 경험을 하게 되었다면 어떨 지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런 경험을 하고도 지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코로나를 추억할 수 있을까요? 카뮈가 '페스트'에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극단적 상황이고, 그 안에서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페스트와 싸우기로 결심하다

페스트 같은 대규모의 역병뿐만 아니라 대지진이나 쓰나미, 전대미문의 재해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인간의 오만함을 징벌하는 신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왜 하필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하는 절박한 물음에 합리적 이성이 마땅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종교는 '신'이라는 가장 오래된 답변을 꺼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는 파늘루 신부가 그런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파늘루 신부는 불안에 떨고 있는 시민들을 모아 놓고 '페스트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며, 이를 통해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하려 한다'고 설교를 합니다. 그러니 역병을 받아들이고 두려워하지 말고, 심지어 죽음마저도 무서워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당당한 위로'의 말을 전했으나, 시민들의 공포심은 걷잡을 수 없이 더 커지기만 합니다.

이와 달리 의사 리외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건강을 지키고 죽어가는 목숨을 하나라도 더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깁니다. 그는 '신을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것이 어쩌면 신에게도 더 좋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페스트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직분을 끝까지 완수해 내려는 성실성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습니다.

아이들에게 파늘루 신부와 의사 리외를 태도를 비교하고, 어느 사람의 주장이 더 위안을 주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단순히 종교와 과학의 대변자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카뮈가 페스트를 '부조리'의 의미로 사용했듯이 이들은 삶의 의미을 무화시키는 순간에 직면했을 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태도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인간은 파늘루처럼 이미 주어진 세계 해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부조리한 세상을 이해해볼 수도 있고, 아니면 리외처럼 기존의 세계 이해에 맞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 나설 수도 있습니다.

카뮈는 삶의 부조리에 맞서는 최선책으로 '반항'을 제시합니다.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은 반항이 된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의 어둠과 벌이는 끊임없는 대결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투명성에의 요구이다. 반항은 순간순간마다 세계를 문제 삼는다."(카뮈/김화영 번역, '시지프의 신화', 민음사) 여기서 반항은 단순히 주어진 삶에 불응하거나 거역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을 뜻합니다. 카뮈는 얼핏 위대한 인물이나 해낼 법한 이 과제를 '보잘것없고 평범한 영웅'이 해낼 수 있다고 서술합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자 현장으로 달려가서 하루 10시간 이상 마스크와 방호복을 착용하고 최선을 다 했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떠올려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가 됩니다.

아이들과 카뮈가 말한 '반항'의 의미를 탐구하며 '반항하는 인간'이란 매순간을 온힘을 다해 진심으로 살려는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설령 그 노력이 실패해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반항'이 무의미한 우리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