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동화'는 '좋은 문학'이어야 한다
소설가 한강은 자신에게 영감을 준 작가들 중 한 명으로 스웨덴의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인간과 삶, 죽음에 대한 의문을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연관지을 수 있었다."면서도 “그(린드그렌)가 내 어린시절에 영감을 준 유일한 작가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웨덴의 노벨위원회에 대한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겠으나 동화가 한 명의 위대한 영혼을 탄생시키는데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동화는 어린이나 읽는 수준 낮은 문학으로 폄하되곤 합니다. 어려운 글로 쓴 소설에 비해 쉬운 글로 쓰여져 있고, 어른의 눈으로 볼 때 유치하고 장난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나 그들의 삶과 동떨어진 작품을 쓰게 될 경우 동화가 목표로 삼는 독자층으로부터 외면당할 뿐더러 그러한 작품을 동화라고 부르기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동화는 어른들과 다른 매우 특수한 연령대에 속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이지 결코 수준이 낮다고 평가절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동 문학은 성인 작가가 '동심'을 지닌 어린이라는 특수한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눈높이 맞는 언어를 구사해서 그들이 납득할 만한 사건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더 까다로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린드그렌의 동화들은 우리에게 동화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시금석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좋은 어린이책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그야 좋은 책이어야 하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대답에 그녀가 추구하는 동화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즉 '좋은 동화'란 어린이의 심성을 정화하거나 도덕적 교훈이나 유용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는 장르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독창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좋은 문학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린드그렌은 '좋은 문학작품'을 쓰려고 하다 보니 '좋은 동화'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아스트리드 린드그렌/김경연 번역, 사라진 나라, 풀빛)
그런데 왜 그녀는 어른들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요? 린드그렌은 폐렴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던 딸을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를 딸에게 선물로 주려고 출판사에 보냈다가 우연히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유난히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넘쳤고, 그들을 위해 글을 쓰다 보니 동화작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이 쓴 글의 일차적 수신자로 삼았던 것은 바깥에 있던 아이들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아이"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 안에 살아 있는 '아이'를 위해 글을 쓰다 보니 다른 아이들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린드그렌의 이 발언은 좋은 동화와 그렇지 못한 동화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화작가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아이는 어떤 아이이며, 작가는 그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그 동화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대로의 에밀을 사랑한다고요!
이 동화의 주인공 에밀은 동그랗고 새파란 눈에 발그스름한 둥근 얼굴, 양털처럼 보드랍고 탐스러운 금빛 머리칼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처음 보면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에밀은 얌전하기는커녕 고집불통에다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에밀의 농장에서 하녀로 일했던 리나가 "에밀이 말썽을 부리든가, 에밀 때문에 소동이 벌어지든가, 둘 중 하나"라고 말할 만큼 에밀은 사고뭉치 다섯 살 소년이었습니다. 덕분에 카트풀트 농장은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밀에 대한 어른들의 우려와 걱정은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에밀에 의해 발생한 말썽과 사고는 악의적 의도에서 생겨난 것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수프단지를 뒤집어 쓴 것은 단지 바닥에 남은 수프를 핥아먹으려다 보니 그랬던 것입니다. 동생 이다를 국기 게양대에 대롱대롱 매단 것은 동생에게 이웃 마을을 구경시켜주려는 선량한 마음에서였습니다. 국기 게양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동생 이다를 발견하고 어른들은 기겁을 했지만 정작 당사자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아, 친절한 에밀 오빠! 오빠는 어떻게 만날만날 이런 재미있는 생각을 해내는 걸까?' 에밀의 행동은 어른의 시선에선 터무니없는 말썽으로 보였겠지만 아이들의 눈엔 그저 재미있는 장난이었을 뿐입니다. 식량창고에 있던 엄마의 특제 소시지를 몽땅 먹어치워서 이웃 사람들이 모두 모인 농장의 파티를 망친 것도 에밀을 목공실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부모님 탓이 큽니다.
이런 에밀에 대한 소설 속 서술자의 태도는 이중적입니다. 서술자는 "에밀은 여러분처럼 얌전한 아이가 아니었어요."라고 말해서 어린 독자들이 에밀을 모방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그러면서도 모자를 쓰고 잠을 자겠다고 고집을 피우거나 삶은 강낭콩을 먹기 싫다며 식투정하는 에밀의 모습을 그려 보이며 어린이들이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습니다. 서술자는 에밀이 대부분의 어른들이 원하는 예의바르고 모범적인 아이는 아닐 수는 있지만, 모든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사랑스러운 아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술자는 사고뭉치에 장난꾸러기 주인공 에밀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는 태도를 보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에밀에 대해 "그 녀석, 변변한 사람이 되긴 글렀어."라며 수근거렸습니다. 이에 화자는 마을 사람들이 에밀이 커서 어떤 인물이 될지 까맣게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하며 반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밀이 나중에 뭐가 됐냐고요? 여러분은 마을 회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말 모를 거예요. 아무튼 아주아주 훌륭한 사람이란 것만 알아 두세요. 에밀이 바로 그 훌륭한 회장님이 된다는 것도요." 심지어 마을 사람들은 돈을 모아 에밀의 엄마한테 건내며 사고뭉치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자 에밀의 엄마는 화를 벌컥 내며 동전 꾸러미를 집어던지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에밀은 귀여운 아이예요. 나는 지금 이대로의 에밀을 사랑한다고요!"
이 동화의 서술자는 어린이를 순수한 존재로 이상화시키지도 않고, 그렇다고 엄격한 훈육이 필요한 결핍된 존재로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아동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요청합니다. 오늘날에도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자신의 조부모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말썽꾸러기 에밀이나 말괄량이 삐삐를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로 받아들이는 까닭은 아마도 어린이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을 충분히 공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른은 다 자란 어린이일 뿐
에밀이 말썽을 피울 때마다 아빠는 에밀을 목공실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곤 그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장난을 쳐서는 안 돼. 네 잘못을 깊이 반성해라." 하지만 에밀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성은 금방 끝나버렸고, 똑같은 장난을 두 번씩 되풀이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빠의 말을 어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에밀이 갇힌 목공실은 체벌의 공간이 아니라 에밀에게는 재미있는 또다른 놀이터였을 뿐입니다. 그곳에는 통나무나 판자가 잔뜩 쌓여 있어서 뭐든 만들 수 있었고, 그래서 에밀은 목공실에 갇힐 때마다 우스꽝스러운 나무 인형을 54개나 만들었습니다. 사실 에밀의 말썽이란 그저 "노는 데 열중하느라 일어날 수 있었던 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작가는 에밀처럼 온 힘을 다해 열심히 뛰노는 것이야말로 어린이다운 삶이며 성장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동화에 등장하는 어른들 역시 에밀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엄마가 어린 아들의 머리에 씌워진 수프 단지를 부지깽이로 깨뜨리자고 하자 아빠는 한사코 엄마를 말렸습니다. 아빠는 수프 단지는 4크로나짜리니까 병원에 가서 진찰비로 3크로나를 쓰면 1크로나를 벌 수 있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엄마를 설득했고, 엄마는 참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습니다. 에밀은 늙은 암말 율란을 타고 알프레드 아저씨를 만나러 홀트스프레드로 떠났고, 가족들은 에밀이 길을 잃을까 염려하며 찾으러 떠났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축제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맨 것은 에밀이 아니라 엄마였습니다. 어른들 역시 에밀과 마찬가지로 미숙하지만 천진난만한 성품을 간직한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가가 어린이를 미래의 어른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이 '다 자란 어린이일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서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린드그렌의 동화를 읽으며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동화 작가 유은실의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은 책의 목차가 전부 린드그렌의 동화책 제목으로 되어 있을 만큼 린드그렌에 대한 애정과 헌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사 모은 40여 권의 린드그렌 동화책을 보물 1호라 여기는 주인공 '비읍이'는 린드그렌이 동화를 쓴 이유를 이렇게 추측합니다.
"린드그렌 선생님은, 가출하는 애들 얘기를 재미있게 읽고, 가출하고 싶으면 머릿속으로 가출하는 상상을 실컷 해서 '왼쪽 가슴 아래쪽이 무엇에 세게 부딪힌 것처럼 아픈 것'을 낫게 한 다음에, 진짜 가출은 하지 말고, 자기 잠옷 입고 자기 침대에서 양말 벗고 자라고 쓰신 것이었다."(유은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창비)
비읍이는 엄마가 린드그렌 책을 갖다 버리라고 하자 가출을 결심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즉 린드그렌의 동화는 현실에서 상처받은 어린이를 향한 따뜻한 위로이자, 강퍅한 현실을 이겨내도록 건내는 온화한 격려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밀은 사고뭉치>는 세상의 모든 개구장이들과 말썽꾸러기들에게 작가가 보낸 위안과 위로입니다. 네가 아무리 장난을 쳐도 괜찮단다, 아이들은 원래 그런 존재란다, 그렇더라도 얼마든지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으니 마음껏 뛰어놀도록 하렴. 작가는 어른들에게도 그들이 한때 머물렀던 '사라진 나라'를 다시 떠올려보고, 그들이 잊고 있었던 '내 안에 있는 아이'를 되찾아 보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현실에 지치고 삶에 찌든 어른들 역시 순수한 행복감에 충만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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