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할머니들
나시키 가호의 <서쪽 마녀가 죽었다>를 읽고 난 후 문득 수 십 년 전에 돌아 가신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정확히는 할머니가 해주시던 박대찜이 떠올랐습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물만 붓고 쪄냈는데도 윤기가 좔좔도는 빛깔이며 비린내 하나 없이 정갈하면서도 고소한 맛은 입짧은 편식쟁이 아이였던 제 입맛에도 잘 맞았습니다. 그 맛이 그리워 몇 년 전 근처 식당에서 박대찜을 사 먹었지만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셨던 추억 속 그 맛은 아니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마이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문득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된장국, 손수 만든 반족에 양송이와 파프리카, 베이컨을 넣은 키슈, 그리고 둘이 함께 만들었던 '새콤달콤한 숲의 맛'을 닮은 산딸기잼을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은 손수 만든 음식에다 자신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는 마법을 걸어 놓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퍼내도 줄어들기는커녕 도리어 화수분처럼 샘 솟는 사랑으로 만든 음식이 잊힐 리가 없지 않습니까.
소설은 어떤 갈등을 다루고 있는가
소설은 '서쪽 마녀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로 시작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처럼 소설의 첫 문장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간혹 어떤 훌륭한 소설들은 이 첫 문장에 대한 긴 주석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제목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첫 구절은 이후의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산뜻한 첫 걸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많이 추천되는 대부분의 성장소설들은 초반에 어떤 과제가 제시되고, 이후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그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특히 초반부를 주목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소설의 경우 왜 손녀 마이가 할머니를 '서쪽 마녀'라 부르는지, 그리고 할머니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는지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마이는 왜 2년 전 학교에 가기 싫어 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읽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주인공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는지 찾아 보라고 합니다. 소설이 다루고 있는 중심 문제만 제대로 파악해도 소설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해 지기 때문입니다.
마이의 고민
이제 막 중학생이 된 2년 전 마이는 환절기에 천식이 심해져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육체적 고통만이 문제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난 학교에 안 가. 그곳은 내게 고통만 줄 뿐이야." 이상한 점은 마이의 엄마는 딸에게 왜 학교가 고통만 줄 뿐인가에 대해 묻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이유를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다만 마이 할머니에게 마이는 '다루기 힘든 아이'이자 '살아가기 힘든 타입'이라고 흉을 볼 뿐입니다.
왜 마이는 학교에 가기 싫었던 것일까요? 책을 제대로 읽은 학생들은 할머니가 영국사람이고, 그래서 마이의 엄마나 마이가 혼혈이라는 사실을 단서로 그녀가 왕따를 당한 것이라고 유추해 냅니다. 그리고 소심하고 내성적으로 보이는 마이의 성격 때문에 학교 생활이 더 힘들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아직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만한 힘과 지혜가 부족했던 어린 마이한테 친구들의 따돌림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부분'을 지니고 있어서 마이가 좋아하는 할머니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습니다. 대신 소녀와 함께 산딸기잼을 만들고, 함께 손빨래를 하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리고 마녀의 피가 흐르는 집안의 내력을 은밀하게 말해줍니다. 할머니의 정겨운 음식과 신비한 이야기는 어리고 연약한 소녀였던 마이를 건강하고 성숙하게 변화시키게 됩니다.
할머니는 마이에게 마녀가 되는 수행을 시키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력이라고 말해줍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힘, 자신이 결정한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 말이다. 그 힘이 강하면 악마도 그렇게 쉽게 들어오지 못할 거야." 할머니는 마이에게 잔소리나 가르침을 강요하는 대신 그녀 스스로 시간표를 만들고 그것을 지키도록 하게 합니다. 이런 단순한 연습을 통해 마이는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미덕은 할머니를 마냥 이상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나나 마이에게 엄마의 방식을 강효하지 마."라며 반발합니다. 할머니와 지내며 몸과 마음이 한뼘 성장한 마이도 이렇게 말합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지만, 나는 왠지 할머니가 유도하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만 같아."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고, 결국 자신의 삶은 스스로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소설은 넌지시 일러 줍니다.
서쪽 마녀로부터 동쪽 마녀에게
할머니 집에 온 첫 날부터 마이는 겐지 씨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한여름의 그림자처럼 새까만 사람'인 겐지 씨는 '보기 싫을 정도로 살이 찌고 눈만 이상하게 번들거리'며 '역한 땀냄새'를 풍겨 옵니다. 결국 할머니의 닭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겐지 씨를 범인으로 오해하고 그에 대한 불신은 커져만 갑니다. 겐지 씨가 마이의 은밀한 '장소'를 침범했다고 생각하자 그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폭발하고 맙니다. "난 그 사람이 싫어. 그런 더러운 놈.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순간 할머니는 사랑하는 손녀의 뺨에 손지검을 하게 됩니다. 편견에 사로잡혀 사람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의혹과 증오에 마음이 빼앗겨버린 손녀를 두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다시 만나 겐지 씨는 이전의 위협적이고 거만한 구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아 보이는 몸을 구부리고 마이를 찾아와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은룡초꽃을 마이 앞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울고 있는 겐지 씨를 보며 마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은룡초 한 송이를 화병에 담아 할아버지 사진 옆에 놓아두고, 아기 물망초에 물을 주려고 일광욕실에 들어간 마이는 무심결에 더러운 유리창에 씌어진 글씨를 읽고 벼락에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서쪽 마녀로부터 동쪽 마녀에게. 할머니의 영혼 탈출 대성공!"
예전에 마이는 할머니한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빠는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대답해준 반면, 할머니는 '죽는다는 것은 몸속에 갇혀 있던 영혼이 몸을 벗어나 다시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답해주었습니다. 두 대답 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대답이 마이에게 더 가치있는 삶을 살게 해주는 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할머니는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도 손녀가 했던 그 질문을 기억하고 비밀스럽고도 유머러스하게 대답을 적어 두었던 것입니다. 너무 늦었다는 후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자신의 냉혹함에 대한 자책, 겐지 씨 일로 자신을 때린 할머니에 대한 감정의 앙금은 할머니의 글씨로 인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게 되고 마이는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마이가 읽어 낸 것은 죽음에 대한 비밀이 아니라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신을 뜨겁게 사랑했던 할머니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한 번 죽은 후에 그를 기억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완벽하게 죽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할머니의 육신을 두번 다시 만날 수는 없게 되었지만,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은 그녀의 영혼은 언제까지 마이의 곁에 머물며 함께 할 것입니다. 그녀의 할머니가, 그 할머니의 할머니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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