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청은 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의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조차 귀동냥으로 전해 듣고 '효녀 심청'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듭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식이 목숨을 내놓는 것이 과연 효인가요? 자식의 목숨값으로 생명을 연장한 부모는 과연 마음 편히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요?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일컬어 '참척(慘慽)'이라고 합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은 사랑하던 외아들을 먼저 보낸 참척의 고통을 절절한 글로 풀어낸 바 있습니다.(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세계사) 그러므로 오늘날 학생들에게 효도가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 심청전을 읽게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심청의 선택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눈에 띕니다. 상승댁 부인은 청이에게 공양미 삼백 석을 대신 내줄 테니 자신의 수양딸로 들어올 것을 제안합니다. 그럴 경우 청이는 굳이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될 뿐더러 스님에게 약속한 공양미 삼백 석을 얻을 수도 있고, 수시로 집에 들러 심봉사를 봉양할 수도 있게 됩니다. 하지만 청이는 상승댁 부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청은 눈멀고 늙은 아버지를 홀로 두고 주는 것이 불효인 줄 알면서도 굳이 목숨을 바치는 길을 선택합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부친에게 거짓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인신매매'라는 비도덕적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그녀의 행동이 정말 효인지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심청의 효는 '효인 듯 효 아닌 것 같은 효'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심청이 부처님께 정성을 들여야 부친이 눈을 뜨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상승댁 부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심봉사에게 '공양미 삼백 석'이란 조건만 말했을 뿐 그것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없습니다. 게다가 심청의 인신공양으로 약속했던 공양미가 바쳐진 후에도 심봉사는 눈을 뜨지 못했을 만큼 그 효력이 의심스러운 계약을 위해 굳이 목숨을 걸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뱃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상승댁 부인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설명도 심청이 마치 어떻게든 죽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는 점에서 부적절합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효란 무엇일까
심청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조선 시대 사람들이 효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삼강행실도>에서 효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성리학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당대 백성들의 심성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28년 세종 10년 진주에 사는 김화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었습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으로 인식한 세종은 큰 충격을 받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 효자, 열녀 110명씩 330명을 뽑아 글과 그림으로 이들을 칭송한 <삼강행실도>의 편찬을 명했습니다. 세종은 글자를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그 내용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림을 그려 넣도록 하고, 글을 아는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읽어주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이 책은 그 후에도 여러 판본으로 다시 찍혀 보급되었고, 중종 6년인 1511년에는 2940부라는 엄청난 분량을 찍어 전국에 배포되기도 했습니다.(책으로 백성 길들인 '독점출판사 조선')
문제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이 엽기적이라는 점입니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죽어가는 부모의 목숨을 연장한 효자 이야기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여 남편을 살린 열녀 이야기 등을 모범적 사례로 예시하며 '단지'(斷指)와 '할고'(割股)의 미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선은 국가적 차원에서 '삼강행실'을 꾸준하게 장려하면서 이를 실천하는 이에게 큰상을 내렸으며 명예도 높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어리석은 백성들'은 점차 이 족쇄와 같은 유교적 윤리를 자발적으로 내면화시켜 갔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 <천자문>을 뗀 아이들의 교과서였던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실린 부자유친(父子有親)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친밀해야 한다는 정도로 알고 있지만 이 책의 설명은 예상을 벗어납니다.
"(....) 그렇지만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 아버지가 비록 자식에게 잘못하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옛날에 순(舜) 임금의 아버지는 미련하고 계모는 어리석어 일찍이 순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순은 효도로써 화합할 수 있었다.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부모를 바른길로 가게 했으니 효자의 도리가 지극하였다. 공자께서는 '다섯 가지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가 3000가지나 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다'고 말씀하셨다."[기사, 족쇄와 열쇠 - 조선의 책 이야기](4) 부자유친이라는 수상한 윤리)
이 글의 논리는 대단히 부자연스럽고 모순적이며 강압적입니다. 세상에 옳지 않은 부모가 없다고 해놓고 곧바로 설령 아버지가 자식에게 잘못하더라도 자식은 효도를 해야 한다고 어거지를 부립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해치고 죽이려 하더라도 순 임금처럼 효도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며, 만일 그러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 효란 자식이 부모에게 무조건적으로 행해야 했던 절대적 도덕 규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심청의 행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녀는 효를 실천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해야 했고, 그녀가 부친의 무책임한 행동을 책임지기 위해서 할 수 있던 일이란 자신의 신체 전체를 버리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규범을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애초부터 없었기에 그녀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심청의 행동이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부당한 도덕적 요구에 순종했고, 그러한 순종의 결과 그녀에게 요구된 도덕적 규범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부당한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식의 신체나 목숨을 훼손하면서까지 부모가 누리게 된 효도가 정말 효도인지 심청은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절대적 복종'은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 명령의 부당성을 드러내는 항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이진경, 파격의 고전, 글항아리)

심청은 왜 맹인잔치를 열었나
인당수에 몸을 던진 후 3년이 지나 연꽃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온 심청은 왕비가 되어 궁궐에 살게 됩니다. 그런데 '효녀'라면 마땅히 직접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찾아 뵙고 모시고 올라오거나, 아니면 신하들을 시켜 아버지를 수소문해서 찾아오도록 명령을 내릴 법한데 심청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맹인잔치를 열어 전국의 시각 장애인들을 불러 들입니다. 그녀는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요?
만일 심청이 남편인 왕에게 자신의 사연을 말할 경우 그녀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게 된 경위를 발설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부친의 허물과 뱃사람들의 범죄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 회피한 것일까요? 아니면 다시 태어난 심청은 인당수에 빠지기 전의 심청과 다른 존재로 탈바꿈했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는 것을 애써 거부하는 것일까요? 이것도 아니면 심청은 아버지도 자신처럼 과거의 맹목적 족쇄에서 벗어나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눈을 뜨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심청은 과거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동냥젖 구걸 덕택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청은 도덕적 명령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갚으려는 의도로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어머니 없는 심청이 눈먼 아버지를 부양하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웃들의 도움 때문입니다. 그들의 상호부조가 없었더라면 자신을 물론 심봉사 역시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청이 효도를 실천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요? 그 대상은 육친의 정을 나눈 아버지에 국한되지 않고, 그녀를 둘러싼 이웃과 사회 나아가 산과 바다 같은 자연 전체로 확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한 심청이 깨달은 효란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되갚아야 하는 절대적 명령이 아니라 나와 타인 간의 상호적 실천 윤리로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과거의 윤리에 머물러 있는 모든 맹인들이 잔치에 초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심청이 초대한 맹인잔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던 이들이 '개안(開眼)'하는 깨달음의 이벤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봉사뿐만 아니라 그 잔치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봉사 역시 죽은 줄 알았던 딸을 만났다는 놀라움 때문에 눈을 뜬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무수한 고초를 겪으며 심봉사는 자신을 지탱하던 유교적 윤리의 한계를 몸소 노출했고,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딸과 만난 순간 밀려오던 회한, 후회, 부끄러움, 수치, 죄책감 등을 한꺼번에 느끼며 비로소 그의 눈을 감싸고 있던 어리석음의 꺼풀이 벗겨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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