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6학년

손창섭, 싸우는 아이, 우리교육

ddolappa72 2024. 12. 6. 19:18

 

주인공은 왜 싸우는 아이가 되어야 했나

4.19 혁명의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될 만큼 중요한 역사적 경험입니다. 서양의 근대적 민주정이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시민혁명을 통해 형성되었듯이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체가 독재자 이승만을 시민들의 손으로 내쫓고 시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저 역사적 경험에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민으로서의 개인'을 발견하게 된 정의로운 항거는 비록 이듬해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좌절된 듯 보였지만, 경제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운 군사정부도 4.19혁명의 경험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의 근본틀은 부정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이 시기에 싹 튼 민주적 시민의식 덕택에 세계에서 드믄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도 있었습니다.(우찬제, 이광호 엮음, 4.19와 모더니티, 문학과지성사)

그런데 4.19혁명의 경험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통해 뚜렷한 예술적 자취를 남겨 놓았습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였지만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광장>의 해였다고 할 수 있다."고 쓸 만큼 <광장>의 예술적 성취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소설가 최인훈은 <광장>의 서문에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쓸 정도로 작품의 탄생이 4.19혁명과 그것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동문학에서는 1960년 어린이 잡지 <새벗> 6월호에 발표된 손창섭의 <싸우는 아이>가 4.19 혁명의 정신을 생생하게 포착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으로 부모를 여의고 보따리 장사를 하는 할머니 품에서 열다섯 살 된 누나와 함께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열두살의 찬수는 아무리 피하려 해도 싸움에 말려들어 싸울 수밖에 없는 아이입니다. 그는 "싸움 안 할래도 자꾸만 싸울 일이 생기는 걸 뭐."라고 말할 만큼 싸움을 걸어오는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찬수는 할머니에게 외상값을 안 갚고 몰래 이사가려는 상진이네와 싸우고, 밀린 방세 때문에 집주인과도 싸우고, 직접 중학교 등록금을 벌겠다고 시작한 신문팔이와 아이스케키 장사를 훼방놓은 건달들과도 싸우고, 누나의 밀린 월급을 떼어먹으려는 사장과도 싸웁니다. 작가는 찬수의 싸움을 불의한 세상에 대한 항거이자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즉 찬수는 개인적 원한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강자들을 향해 약자로서 저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공 찬수의 행동이 4.19혁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동화의 후반부에서 명시적으로 밝혀집니다. 

"사람은 자유다, 자유다." 그렇게 외치면서 집을 향하여 한길을 마라톤 선수처럼 뛰었습니다. 그러한 찬수에게는 사월 혁명 때, 자유를 어쩌라고 막 외치며 용감하게 데모를 하던 대학생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고, 자기 자신도 갑자기 훌륭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손창섭의 동화 <싸우는 아이>는 구체적으로 4.19혁명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혁명 정신의 본질이 강자들의 불의에 저항하는 약자들의 연대와 그를 통해 어렵게 획득해낸 개인들의 소중한 자유에 있다는 것을 감격스럽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 찬수는 시인 김수영이 노래한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 사람"으로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생동감있게 구체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수영의 시 '푸른 하늘을'에서)

 

1960년 4.19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국민학생들의 모습. 실제로 4.19 시위로 국민학생 1명이 희생되었다.



4.19혁명의 알레고리

찬수의 싸움은 동화 초반부에는 개인적 정의의 실천에 그쳤다면 인구네 집에서 착취당하던 영실을 탈출시켜 마음씨 좋은 변호사집에 취직시켜주는 장면부터 사회적 성격을 띠기 시작합니다. 찬수는 인구네서 식모살이하는 영실을 보고 사회적 모순을 각성하게 됩니다. 

"인구 어머니는 옷을 잘 차려 입고 맨손으로 앞장을 서서 걸어오고 있고, 거지 같은 옷주제를 한 영실은 반포대 부피나 실히 되어 보이는 밀가루 포대를 이고 한 손에는 여러 가지 찬거리를 담은 시장 바구니를 들고, 쩔쩔매면서 간신히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양을 바라보는 찬수는 슬며시 화가 치밀었습니다. 어른인 인구 어머니는 살랑살랑 맨손으로 들어오면서, 어린 영실에게만 잔뜩 머리에는 이고 손에 들리고 오는 것이 몹시 미웠던 것입니다."

인구네에서 착취당하고 구박받던 영실을 변호사집으로 빼돌린 찬수는 이제 인구네 가족 전체와 마지막 싸움을 벌입니다. '거대한 대문'과 '알 수 없는 내부'를 가진 집에서 사는 인구네 가족은 마치 사복 경찰처럼 찬수의 뒤를 추적해 영실의 행방을 집요하게 캐묻기도 하고, 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폭력성과 권위적 태도는 이승만 정권의 그것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인구네와 찬수의 싸움은 4.19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동합니다.

"찬수는 악을 쓰듯이 고함을 지르며 돌을 집어서는 인구네 뜰 안으로 자꾸만 던졌습니다. 그 돌은 인구네 집 벽에도 맞고, 문창지도 찢고 유리도 깼습니다. 쨍그랑 하고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나자 안에서는 찬수에게 욕을 퍼부으며 대문을 열어 젖히고 인구네 식구들이 와르르 달려 나왔습니다.

찬수는 기를 쓰고 돌멩이를 마구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나 길바닥에는 돌맹이가 많지 않았습니다. 찬수가 돌을 줍느라고 어릿어릿하고 있는 동안에 인철이가 먼저 번개같이 덤벼들었습니다. 다음에는 그의 어머니가 덤벼들었습니다. 인철이와 그의 어머니는 찬수를 붙잡고 마구때리고 차고 했습니다.

찬수도 지지 않았습니다. 마구 우는 소리를 지르면서 같이 발길질도 하고 닥치는 대로 물어 뜯으려고 버둥댔습니다. 그러는 통에 아이 어른 구경꾼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찬수는 코피가 철철 흘러서 턱이랑 앞가슴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중략) 모무들 영실이를 불쌍하다고 속으로 깊이 동정하면서도 인구 어머니가 무서워서 도와 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걸 찬수가 용감하게 영실일 딴 집에 데려다 주었기 때문에, 인구 어머니가 영실이에게 얼마나 심하게 굴었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소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 열사의 영정 사진



우리는 왜 '싸우는 아이'가 되어야 할까

영실은 찬수 덕택에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인구네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훨씬 젊고 예쁜 주인 아주머니'의 품으로 옮겨 갑니다. 이것은 혁명을 통해 이전의 불의와 부정의 세계가 몰락하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세상은 개별적 주체의 자유에 기반한 합리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작가는 주장합니다.

"아무튼 잘 됐다. 사람이란 언제나 남의 집에 살다가 있기 싫으면 나갈 자유가 있는 거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던 집주인에게 '나 딴 데로 가겠습니다' 말하고 승낙을 받고 나오지 않은 건 잘못이지만, 그렇게 억지로 널 잡아 두고 사납게 부려먹었다니 하긴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지. 우리 집에선 결코 네가 할 만한 일이 아니면 시키지 않겠다. 물론 월급도 꼬박꼬박 주고, 철따라 옷도 해 주고, 정 붙여 한 신구처럼 오래 같이 살면 부모 대신 우리가 시집도 보내 줄 테다. 그리고 네가 우리 집에 있고 싶지 않거든 언제든지 말만 하면 내보내 주겠고, 또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말로 타이르지 절대로 때리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영실의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인구네가 영실을 속여 지방으로 납치했기 때문입니다. 크게 실망한 찬수는 "영실인 겁장이가 돼서 혼잔 못 돌아올 거예요."라고 낙담합니다. 하지만 주인 아주머니는 "그렇지만 우리 집에 와 있으면서부터는 기를 펴고 글도 배우고 전보다 훨씬 똑똑해졌으니까 혹시 모르지."하고 말하며 희망을 갖습니다. 그런지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찬수는 변호사 집 아주머니로부터 영실이 도망쳐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벌벌 떨며 찬수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인구네서 탈출한 영실은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영실의 이러한 변화는 4.19혁명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시민은 폭력적 억압과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 스스로 자유를 쟁취한 자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힘은 교육에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광복 직후 미군정이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어나 일본어 중 어느 하나도 읽을 수 없는 문맹률은 78%였지만, 문맹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1958년에는 비문해율이 4.1%까지 떨어졌습니다.(기사, 문맹률 90%의 나라에서 문화 강국 대한민국으로) 그리고 이승만 정권은 냉전시기에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민주주의 교육을 강조해서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철저하게 배운 민주주의 원리가 실제 현실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부정 선서에 항의해서 마산에서 시작된 3.15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독재자 이승만을 권좌에서 내쫓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VERITAS VOS LIBERABIT)는 말은 사실이었던 셈입니다.

작가 손창섭은 4.19혁명이 가져다준 자유와 환희에 도취되어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이상화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경험한 시대적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 4.19혁명은 과거의 질곡으로부터 단절된 새로운 미래의 시간이 이제 막 시작된 사건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4.19혁명은 일제 강점기, 6.25 전쟁, 이승만의 독재와 같은 불행했던 과거를 떨쳐버리고 자유와 진리에 기초한 새로운 시대가 움트기 시작한 출발점으로서 혁명적 사건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4.19혁명을 기억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를 단순히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싸우는 아이'가 되어 시대마다 새롭게 민주주의를 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