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냄새
어린 시절 밤 늦게 붉게 취한 얼굴로 한 손에는 치킨을 사들고 귀가해서 이제 막 잠이 든 내 뺨을 수염이 까칠하게 돋아난 턱으로 부비시던 아빠에게선 역겨운 술냄새와 발 고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엄마의 화사한 화장품 냄새나 향긋한 샴프 향기와는 확실히 다른 거칠고 고약한 냄새의 소유자로 아버지는 제 어린 시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12살 로버트의 아빠 헤븐 펙에게선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 입고 교회를 가는 일요일을 제외하곤 항상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아주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는 돼지를 도살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엄마는 아들에게 그 냄새를 "열심히 일한 냄새"라고 설명할 만큼 지혜롭고 현명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과연 아빠에게서 어떤 냄새가 난다고 할까요? 질문을 살짝 바꿔 아빠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자신들과 잘 놀아주는 사람? 돈 벌어오는 사람? 그것도 아니면 과연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전통적인 농촌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는 여러 모로 다르겠지만 엄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부자야. 가난한 건 그 사람들이지."
헤븐 펙은 변변치 못한 직업에 교육도 일천한 문맹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빠라도 아들에게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 줄 만큼 충분히 지혜롭고 사려깊은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들이 친구들이 입은 코트가 부러워 사달라고 조를 때 그는 이렇게 아들을 타이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모두 다 사는 건 아니라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다 해서 다 따라 할 필요는 없어. 네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해. 겉보다는 속이 중요하단 말이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아닌데 남들을 따라서 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무엇보다 줏대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러줍니다.
누구나 그의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아들에게 자신은 '부자'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는 세속적인 갈망이나 욕심이 없기 때문에 부족한 것도 없고, 또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이 있고, 얼마 되지 않지만 농사 지을 땅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부자'의 진정한 의미는 소설 말미에 드러납니다. 아버지의 장례식날 그를 애도하며 찾아온 수많은 동료들과 이웃들은 살아생전 그가 얼마나 존경받고 친절한 사람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아빠는 언제나 당신이 가난하지 않다고 말했다.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과장이 아니었다. 아빠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정말 그랬다."
풍족한 물질적 재산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유산이란 살면서 아들에게 보여준 검소한 생활 태도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같은 것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아무리 넉넉한 재물을 남겼어도 아들이 방탕하게 써 버리면 금방 사라지겠지만, 그의 영혼 속에 남긴 아버지의 정신적 유산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고작 13살밖에 되지 않은 로버트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리고 이미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엄마와 이모를 이제부터 네가 돌봐야 한다고 어린 아들에게 당부합니다. 겨우 중학생 1학년 정도의 나이밖에 되지 않은 로버트에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로버트네는 사과 수확이 좋지 않아서 겨우내 먹을 양식을 충분히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사냥용 총도 없어서 사슴 사냥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태너 아저씨가 자신의 홀스타인 젖소를 살려준 대가로 로버트에게 선물한 돼지 '핑키'는 불행히도 새끼를 낳지 못한 채 식량만 축내고 있습니다. 이 순간 헤븐 펙은 가장으로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핑키'를 도축해 식량으로 삼기로.
놀라운 점은 헤븐 펙이 아들이 애지중지 길러온 '핑키'를 도축하는 일에 아들을 참여시켰다는 것입니다. 로버트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머리로는 수긍하면서도 가슴 가득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저주를 품고 그 일을 묵묵히 도왔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일어 났습니다. 로버트가 죽은 돼지의 기름과 피가 잔뜩 묻어 있는 아빠의 손에 입을 맞췄던 것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버지 헤븐 펙은 이제 곧 자기 대신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아들 로버트에게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가르쳐주기 위해 돼지 '핑키'를 잡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준 것입니다. 가장은 가족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대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두 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는 아들이 사랑하던 돼지를 죽어야만 하는 자신의 슬픈 운명을 지독히 원망하고 저주하면서도 말이지요.
아들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의 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숭고하고 장엄한 모습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입맞춤은 평생토록 아버지가 짊어지고 살아왔던 고통스런 수고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자 이제부터 자신이 그 짐을 대신 지겠다는 승계의식이기도 했습니다.
돼지 '핑키'의 죽음 이후 더 이상 로버트의 집에서 돼지는 단 한 마리도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책의 제목은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헤븐 펙은 가족을 대표해 모든 책임을 져야만 했던 가부장 전통의 아버지상을 대표합니다. 하지만 가장이 반드시 아버지나 아들이 될 필요도 없고, 엄마나 딸이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의 가정은 과거에 비해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율적으로 책임을 지며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가족들 중 누군가는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을 책임지고 결정하는 사람이 가장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가 묻고 있는 동시에 가장이란 어떤 존재인가 질문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자신들의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또 자신들은 앞으로 어떻게 가정을 만들어나갈 것인에 대해서도 사색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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