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5학년

미하엘 엔데/한미희 번역, 모모, 비룡소(2)

ddolappa72 2024. 7. 28. 12:18

 

 

 

낫을 든 크로노스에 맞서는 방법

 

'모모'라는 캐릭터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는 1973년에 출간된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고전으로 자리잡은 작품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철학적 우화로 어린 독자들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은 판타지의 구조를 갖고 있어서 동화처럼 보이는데다 평이한 언어로 쓰여 있지만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모모'의 경우 '경청'이나 '시간'에 대한 주제가 많이 언급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러한 주제들을 작품 속 매락이나 작품이 형성되고 소비되는 사회적 상황에서 분리시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온당한 태도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딱 그 부분들만 발췌한 지문을 읽고 마치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목도하기도 합니다.

 

사실 나이를 도통 짐직할 수 없는 '모모'라는 캐릭터는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서양의 근대화 이후 서구 사회가 상실한 삶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상기시키는 캐릭터입니다. 모모가 폐허로 변한 원형경기장에 살고 있다고 설정한 것 역시 이러한 상황을 전제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회색신사들은 '시간은 금이다'라는 자본주의 모토를 체화한 캐릭터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파괴하는 부정적 가치들을 상징합니다. 모모와 회색신사들의 갈등을 통해 작가 미하엘 엔데는 시간을 재화를 증식시키고 정량화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극단적인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과연 우리가 상실한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경청'의 태도입니다.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자신만이 너무 소중해서, 타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에서의 삶이고, 그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따뜻한 온기가 사라진 채 차갑게 변했다는 것이 작가의 진단입니다. 다시 인간적 온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소외된 타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 줄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 인간이 동물들이나 사물들의 목소리에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경청'에 담긴 메시지일 것입니다.

 

 

수업 디자인 설계의 어려움

문제는 작품이 담고 있는 이런 심오한 주제들을 초등학생들에게 그대로 전할 수는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어린 독자들이 소화할 수 없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오히려 책에서 멀어지게 하는 독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 수준에 맞게 읽히는 것이 독서 교육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모모'처럼 분량이 꽤 되는 책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읽게 하고,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해 수업을 디자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전반부에서는 사람들이 모모를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보였는 지를 찾게 하고, 회색신사들과 계약을 한 후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 갔는 지를 서로 비교해 보도록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모모와 회색신사가 서로 다른 삶의 원리와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확인된 것들을 반드시 아이들이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책의 세계가 우리의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한테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요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 지, 또 하루의 시간 중 어떤 시간을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어떤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지에 관해 대화를 나눕니다. 이 과정을 통해 교사는 아이들의 생각을 읽게 되면서 어린 영혼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아이들은 친구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 간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면서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게 됩니다.

 

후반부에서는 '시간'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달리의 그림 '시간의 지속'을 보고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작품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표현하도록 했습니다. 흘러내리는 시계를 보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이 녹아 내리는 것 같다고 깔깔대기도 하고, 그림 가운데 있는 형상이 물고기인지 괴물인지 정체를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아이들이 이 그림에서 시계를 '파괴적인 힘'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 죽거나 사라지기 때문에 흘러내리는 시계는 '죽어가는 시간'을 상징하다고 이해했습니다.

 

이 정도의 대답이 나오면 왜 화가는 작품의 제목을 '기억의 지속'이라고 했는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똘망똘망한 아이들은 시간이 흐르면 모든 사람이 죽고 사라져도,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으면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근사한 대답을 내놓기도 합니다.

 

굳이 아이들에게 이 그림이 달리가 녹아내리는 카망베르 치즈를 보고 착상한 작품이라 소개하거나, 왼쪽 하단에 놓인 회중시계 위를 기어 가는 개미떼들이 시간의 파괴적 힘을 상징하고 있고, 그림의 배경에 놓인 바닷가가 작가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림을 보고 자유롭게 떠오른 생각을 말하게 하는 것만으로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적절히 찾아 냈습니다. 물론 이것도 제 수업에서 꾸준히 그림을 읽는 훈련을 쌓아온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주장이긴 합니다.

 

 

파괴적 시간을 이겨낼 방법은 없는 것일까?

흔히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로서의 시간과 카이로스(kairos)로서의 시간으로 구분짓기도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크로노스는 시계에 의해 측정가능한 객관적 시간을 의미합니다. 크로노스의 거대한 낫은 시간의 파괴적 힘을 상징합니다. 이와 달리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라고 불리며 앞머리는 덥수룩하지만 뒤는 대머리로 묘사됩니다. 정면에서 그를 마주했을 때 정체를 잘 알아채면 그의 머리를 부여잡을 수 있지만, 지나쳐 버리면 붙잡으려 해도 잡히는 게 없어 놓치고 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 시간을 나타냅니다.

 

소설 '모모'에서 모모와 회색신사들의 대립 관계는 곧 카이로스로서의 시간과 크로노스로서의 시간 간의 대립이기도 합니다. 회색신사들의 시간 절약 방법은 시간을 측량 가능한 유한한 자원으로 인식했을 때만 제안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 관리 방식은 인간의 삶을 차갑고 삭막하게 만들 뿐입니다. 반면에 모모는 시간을 굳이 크게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모든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아 가려 합니다. 모모가 사람들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모모의 삶은 행복으로 충만해지고 넉넉한 시간을 선물처럼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느 파괴적인 크로노스로서의 시간을 이겨내는 방법은 스쳐가는 우리의 삶에서 카이로스로서의 시간을 더 많이 붙잡는 것일 겁니다. 발터 벤야민의 표현대로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을 더 많이 발견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삶의 무의미를 견뎌 낼 수 있는 희망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반복되는 일상을 따분하고 사소한 것으로 무시하지 말고, 작고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가치일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낚아 채기 위해서는 일상을 세심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명민한 관찰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시선은 일상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통해 길러질 수 있습니다. 마르셀 뒤샹이 일상의 '변기'를 '샘'이라고 명명한 순간 현대의 예술이 탄생한 것처럼 주변의 사물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기 시작하면 평범한 삶도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카이로스를 붙잡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것은 기억력입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파괴적인 시간에 맞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그토록 고군분투했고, 마침내 지속적인 기억 속에서 삶의 참다운 행복을 발견해 냈듯이 우리는 행복의 순간들을 기억 속에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억들은 잠시 잊혀지더라도 우리가 다시 세상의 차가움에 몸서리치는 상황에 놓일 때 언제든 다시 우리를 찾아와 얼어붙은 심장을 따뜻하게 녹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