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5학년

미하엘 엔데/한미희 번역, 모모, 비룡소(1)

ddolappa72 2024. 7. 27. 22:09

 

 

빼앗긴 시간을 되찾기 위하여

 

'나눔'과 '돌봄'의 공동체

 

어느 날 폐허가 된 원형경기장에 모모라는 한 소녀가 찾아와서 그곳에서 살게 됩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 고아로 보이자만 이 소녀가 혼자 사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하지만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거처를 깨끗이 치워주고, 손수 가구를 만들어 주고, 남긴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모모의 삶은 부족하기는커녕 풍족했습니다. 그들 모두 '나눔'을 통해 '풍족'해지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흡사 '심청전'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심봉사가 출산 직후 죽은 아내를 대신해서 갓난 심청이를 키울 수 있었던 까닭은 마을 아낙들의 후한 젖인심 덕택이었습니다. 마을 공동체가 젖을 나누고 돌봄을 베풀었기 때문에 청이도 심봉사도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청전'은 '효'를 단순히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 상호부조의 원리로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심청이 왕비가 된 후에 아버지만 찾지 않고 맹인 잔치를 열어서 많은 시각 장애인들을 구한 것도 그녀가 공동체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시 되갚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모를 돕던 가난한 이웃들은 단순히 그녀에게 베풀기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모모에게 베푼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것을 얻어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모모를 찾아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 만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불행한 사람이나 억눌린 사람도 마음이 밝아지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누어준 물질 이상의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모모의 신비한 능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독일 하노버의 미하엘 엔데 광장에 있는 모모의 조각상

                                            

 

잘 듣는다는 것

 

모모의 신비한 힘은 그녀가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비록 모모가 그들에게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꾹꾹 담아 두었던 속마음을 속시원하게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독일 하노버에 있는 모모의 조각상은 마치 이 세상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듯 커다란 귀를 품안에 소중히 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모는 '커다란 귀'를 가진 존재입니다. '삼국지'에서 유비는 큰 귀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데, 이것은 그가 상대방의 말에 깔려 있는 동기나 정서를 헤아려 들어줄 만큼 큰 인물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귀도 유독 크게 표현되고 있는 것도 그가 중생들의 모든 고통의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어 주시는 존재라는 것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모를 중심으로 이상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도 훌륭한 지도자는 '잘 듣는 자'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도자가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혼자서만 말을 할 때' 그는 '독재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모모의 '경청'하는 태도는 어떤 공동체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듣는 자'는 '말하는 자'를 전제하고 있고, 이들 간의 상호관계에 의해 '이야기'가 생성된다는 점에서 모모의 원형경기장은 이야기의 유토피아가 실현된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 명령이 실천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온 힘을 기울여 귀를 기울여 주는 존재를 통해 말하는 사람은 위로와 희망을 얻고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 또한 직접적으로 아무런 조언을 건내지 않더라도 따뜻한 눈빛과 진심어린 태도만으로 그에게 마음을 전함으로써 삶의 온기를 공유할 수 있게 됩니다. 이야기 안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서로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소설가 한창훈은 '쿠니의 이야기 들어주는 집'에서 '듣는 것'은 곧 '말하는 것'과 같다고 쓰고 있습니다. "말은 그 사람 자체예요. 그렇기 때문에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읽는 것과 같아요. 덕분에 전 당신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지요. (....) 당신과 가까워지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진정으로 가까워지려면 서로 번갈아 이야기하고 관심 깊게 들어야 한다는 거. 듣는 것도 마치 말하는 것 같아야 한다는 걸요."(한창훈,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한겨래출판)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도둑 맞는가?

 

모모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침묵의 소리마저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모모는 주위의 그 어떤 것도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매순간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시간을 충만하게 충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시간 도둑인 회색신사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저축해주겠다며 접근합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며 사람들을 설득하며 그들로부터 '시간'을 빼앗습니다. 회색신사들과 계약한 사람들은 돈은 더 벌게 되었지만 신경은 더 날카로워 지고 안정을 잃어 갔고, 아무리 알뜰하게 시간을 쪼개 쓰더라도 늘 시간에 쫓기며 불만스럽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삶은 점점 빈곤해 지고, 획일화 되고, 차가워 지고'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효율성을 추구하는 회색신사들의 속삭임에 넘어가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해 집니다. 아들은 시간이 아까워 어머니가 머문 요양소를 더 이상 방문하지 않고,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는 시간마저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이별을 통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과 '성공'이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자리잡게 되면,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들은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게 됩니다. 따라서 회색신사의 존재는 우리 삶에 내재하고 있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모모의 '경청'보다는 회색신사의 '제안'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발적으로 그것에 복종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내야 직성이 풀리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사회 전체가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는 사회에서 '나'의 생존만이 중요하지 '우리'를 생각할 여유는 점차 부족해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힘이라면, 효율성을 추구하는 정신은 그와 반대로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극단적으로 효율성을 강조하고 자발적으로 그것에 복종하는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불가능합니다. 회색신사의 영업을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요즘 아이들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모모는 이 세상 모든 것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개, 고양이, 귀뚜라미, 두꺼비, 심지어 빗줄기와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밤이면 홀로 세상의 거대한 정적의 소리에 귀기울이곤 했습니다. 동화와 마법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동물이나 사물이 내는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성'과 '합리성'을 무기로 세계를 '탈주술화'하며 자연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고, 인간은 더 이상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한테는 여전히 동물들이나 사물들이 건내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을 하는 여우가 등장하는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읽어내고, 땅에 심은 몽당연필이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는 동시도 쉽게 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대하기 때문에 회색신사들조차 그들의 시간을 훔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아무리 엄마들이 회색신사와의 계약조건을 잔소리로 끊임없이 쏟아내도 그들은 쉽게 설득당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시간의 빈틈을 찾아내서 자신들에게 유미한 시간으로 탈바꿈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지 궁금해서 글로 써 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학원을 오가는 쳇바퀴 같은 일상을 매일 반복하고 있습니다. 루틴화된 일상에서 아이들은 어떤 시간을 가장 소중하고 여기고, 또 어떤 시간을 가장 쓸모없다고 생각했을까요? 아이들이 쓴 글들을 직접 읽어 보시고 여러분들께서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