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5학년

J.M.바스콘셀로스/박동원 번역,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동녘

ddolappa72 2024. 10. 5. 11:36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 책을 처음 일고 대성통곡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교 후 아무도 없던 집 마루에 엎드려 무심코 집어든 책을 펼치기 전까지 저는 활자가 날카롭고 뾰족한 무엇이 되어 제 가슴을 그리 후벼파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던 눈물을 훔치고 다시 책을 펼치고 또 다시 울다가 다시 책을 펼치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책읽기를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 광경을 누군가 지켜보았더라면 인상 깊은 추억으로 간직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훗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책을 다시 읽으며 제가 그 당시 왜 그토록 대성통곡을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제제처럼 조금은 조숙했던 저는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한다는 발찍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렇다고 답답한 내 마음을 정확히 표현할 만한 어휘력이나 논리도 갖추지 못했기에 수시로 덮쳐오는 외로움과 우울함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려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만난 제제는 저처럼 외로운 아이였고, 그가 당해야 했던 고통과 슬픔은 고스란히 저의 것인 양 다가왔습니다. 뽀르뚜가 아저씨가 제제에게 건내는 위로의 말은 저를 향한 것이도 했고, 유일하게 제제를 이해해주던 아저씨의 죽음은 마치 제 친족이 실제로 죽기라도 한 듯 제 심장을 난도질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제제처럼 외로웠고,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다시 책을 읽어 보니 이번에는 제제와 가족들이 견뎌야 했던 '가난'이 눈에 밟힙니다. 아버지는 실직으로 무기력하게 집안을 서성이고, 엄마와 누이들은 일주일 내내 공장에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월세도 몇 개월이나 밀려 있다 보니 크리스마스 전날도 말라비틀어진 빵 몇 조각으로 견뎌야 했습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 보니 다들 어린 제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에게 신경을 써 줄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자신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불러준 노래도 아이의 '선한 의도'보다는 '선정적인 가사'에 더 주목하게 되고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실직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진 아버지의 귀에 아들의 노래는 마치 자신의 무능을 조롱하고 아버지의 권위를 짓밟는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제제가 가난한 아버지가 싫다고 말하는 것을 엿들은 적이 있는 아버지는 잃어버린 가장의 권위가 마치 아들 탓인듯 제제에게 무참한 폭력을 가했습니다. 아동 인권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니 겨우 다섯 살의 어린 몸뚱이에 가해진 끔찍한 폭력은 도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제제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48살의 나이가 된 제제가 왜 어린 시절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다시 소환해서 이런 글을 썼는지 궁금해집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답게 윤색되기 때문에 작가가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져서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린 제제가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하다고 외쳤던 것처럼 작가는 그 나이까지 자신의 신산스런 삶을 견뎌내며 살아가게 만들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 시절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사랑이었노라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하는 물음이 가슴 한켠에 자리잡습니다. 이 질문은 아마도 아이들이 철이 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왜 철이 드는 것은 그토록 고통스러워야만 하나요?"라고 고쳐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사랑했던 뽀르뚜가 아저씨의 죽음과 친구 밍기뉴와의 이별과 같은 지독한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만 철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철이 든다는 것은 고통이 수반되는 과정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만일 그 순간 친절하게 무엇이든 설명해주던 에드문드 아저씨, 점심을 못 싸온 아이에게 용돈을 쥐어준 쎄실리아 빠임 선생님, 그리고 제제가 친아버지보다 더 사랑했던 뽀르뚜가 아저씨 같은 어른들이 곁에 있다면 성장의 고통은 조금 덜 아플 수 있을까요? 


'빈곤'이 '빈곤'해진 사회에서 책읽기

수업 시작 전 아이들한테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냐고 묻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슬프긴 하지만 울 정도는 아니었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더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너희들 전부 T냐고 농담처럼 되묻습니다.(참고로 Mbti 성향에서 T(Thinking)는 의사결정을 할 때 감정보다는 사실과 논리를 중시하는 성향으로, 특정 상황에서 공감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을 놀리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 슬픈 소설을 읽고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수 있냐고 타박하지만 시대와 환경이 다른 아이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제제의 가족들이 겪고 있는 '빈곤'의 경험이 아이들에게는 '빈곤'합니다. 물질적 풍요의 혜택을 누리며 풍족하게 사는 아이들이 그들이 경험하는 가난의 고통에 공감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동의 인권이 강화되며 집에서조차 체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한테 제제가 당하는 끔찍한 매질은 그저 초현실적인 경험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요즘 허리띠로 다섯 살짜리 아들을 구타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었다면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구속되고 비판적 여론이 들끓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비롯해서 위기철의 <아홉 살 인생>이나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 같은 책들을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꾸준히 읽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들에서 아이들은 무방비로 가난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 가난이 공포스러운 까닭은 단순히 매순간 한 끼의 식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난은 그들에게서 자신의 재능을 자유롭게 펼치면서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빈곤을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역량의 박탈"로 정의합니다.(강지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돌베개에서 재인용) 여기서 '역량'이란 '개인이 가치있게 여기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를 뜻합니다. 이렇게 정의된 가난은 빈곤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적 태도나 그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시혜적 태도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은 가난하게 태어난 아이들이 박탈당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그들에게 어떻게 되돌려 줄 수 있을 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할 때 겨우 찾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아이들이 비슷한 또래의 어떤 친구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혹독한 환경에 짓눌려 신음하거나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사람이 살기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영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2014)의 한 장면



제제의 친구가 되어 위로하는 글쓰기

아이들에게 제제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순간을 떠올리고, 그의 친구가 되어 위로하는 편지를 써 보라는 과제를 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특히 제제가 겪은 '가난'과 '폭력'에 주목했습니다.

(가) 네가 크리스마스에도 형편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빠께 담배를 사다드렸잖아. 참 기특해. 근데 한편으로는 네가 안타깝기도 해. 크리스마스에까지 밖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아빠께 선물을 사다 드린 것을 보고 나는 네가 착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줬어. 내가 너였다면 힘들고 무서워서 울어버렸을지도 몰라. 근데 그 고통을 이겨낸 네가 자랑스럽다.

(나) 아, 그리고 네가 아빠를 위로하기 위해 부른 노래 있지? 그 노래는 안 부르는 게 좋아. 너는 아빠를 위해 부른 거였지만, 오히려 아빠에게는 더 속상하게 느껴졌단다. 하지만 내가 아빠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야. 물론 그 노래 하나 불렀다고 영문도 모른 채 맞은 것이 아프고 속상하고 억울했을 거야. 너에게 말로 하고 다음부터 안 그러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무작정 손이 먼저 나가서 너를 때리는 것은 너도 서운했을거야. 그때 맞은 상처는 괜찮니? 이제는 아프지 않기를 빌게.

(다) 제제야, 조금 가슴 아픈 말일 수도 있지만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그리고 심하게 맞더라고. 임산부에게 스타킹을 뱀으로 착각하게끔 만든 일은 충분히 맞을 수 있는 시추에이션이었지만, 네가 잔디라 누나에게 욕을 한 건 그렇게 맞지 않았어도 됐다고 생각해. 만약 잔디라 누나가 너의 멋진 풍선을 망가뜨리지 않고 너를 잘 어루고 달래서 식탁에 앉게끔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그럼 너도 누나도 불만없이 잘 넘길 수 있었을 텐데. 만약 네가 풍선을 안전한 곳에 놓아두거나 누나에게 너의 상황을 잘 말했어도 둘 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다음부터 상대방에게 친절한 말로 잘 설명하면 어떨까?

(가)의 학생은 제제가 크리스마스에도 아버지를 위해 구두통을 매고 나가 일을 해서 선물을 준비한 행동을 언급하며 그에게서 '배려심'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무서워서 울어버렸을 상황을 이겨낸 제제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학생은 가난을 개인이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나)와 (다)의 학생들은 제제가 구타를 당한 상황을 언급하며 그에게 매를 맞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에게 제제가 당한 매질은 방법에 따라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제제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제제가 체벌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웠을 순간으로 꼽은 것은 뽀르뚜가 아저씨의 죽음입니다.

(라) 난 뽀르뚜가 아저씨가 돌아가셨을 때 너의 마음이 공감돼. 아빠처럼 대하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고로 다시 한번도 볼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큰 아픔이란 걸 말야. 그때는 그냥 평소처럼 지내던 나날들 중 갑자기 그런 슬픈 소식을 듣는다면 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은데 넌 어땠어? 믿음과 사랑이 풀려버린 친아버지와, 네가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새 아빠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새 아빠로 고르지 않을까? 확실하게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나도 그런 사람을 새 아빠로 고를 것 같아.

(마) 포르투갈 아저씨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기분이 어땠어? 내가 너였다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을 것 같아. 네가 유일하게 네 마음을 털어놓던 사람이 포르투갈 아저씨였는데, 만약 아저씨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땠을 것 같아? 네 삶이 조금 더 나아졌을까? 나는 아저씨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너와 헤어져야 했기 때문에 네 삶이 더 나아졌거나 더 안 좋아지지는 않았을 것 같아.

(라)의 학생은 제제에게 무심한 친아버지와 제제를 사랑으로 대한 뽀르뚜가 아저씨를 비교하며 자신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아빠로 선택할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학생은 혈연적 가까움보다는 사랑이 아이들한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의 학생은 굉장히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아저씨의 죽음을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가 죽지 않았을 상황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 헤어져야 했기 때문에 제제의 삶이 더 나아지거나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 거라 말합니다. 이 학생은 제제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이 학생의 논리를 따라가면 그러니 아저씨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너의 삶을 살라고 제제에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너무나 냉정해 보이지만 틀린 말도 아닐 뿐더러 나름 세상의 이치를 담은 것이어서 아이와 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 한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정말 제제에게 위로가 될까요?

위로를 주제로 한 글쓰기를 진행하면서 느낀 건 아이들이 괴로워 하는 상대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을 굉장히 낯설어 할 뿐더러 그런 상대에게 어떤 말을 건내야 할 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위로는 상대가 겪는 고통을 충분히 공감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라 할 수 있는데 아이들이 제제의 상황과 그가 느꼈을 고통을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다 보니 이성적으로 거리감을 두고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른들한테도 위로의 말을 건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말 대신 상대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는 식으로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위로를 표현하는 말하기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행동보다 한 마디 말이 상대에게 큰 힘이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두 발로 서는 무수한 연습 끝에 달리기를 배워나갔듯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태도 역시 꾸준한 연습을 통해 습득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