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5학년

니콜라이 레스코프/이상훈 번역, 괴물 셀리반, 다림

ddolappa72 2024. 7. 16.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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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벤야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글을 쓴 레스코프를 '이야기꾼'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이야기의 전통이 몰락하게 되면서 등장한 장르인 소설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남으로부터 조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도 아무런 조언을 해줄 수 없는 고독한 개인'에 의해 탄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괴물 셀리반'을 읽어 보면 벤야민이 왜 레스코프를 '이야기꾼'이라고 했는 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가 글을 길어올리는 원천이 되는 그리스 정교회의 공동체적 분위기와 보댜노이 도모 보이, 레쉬, 키키모라, 바바야가 등이 출몰하는 정령들의 세계가 작품 속에 물씬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말을 통해 경험을 주고 받으며 함께 이야기를 만들었던 러시아 농부들의 이야기 공동체로부터 레스코프는 이야기의 원천을 끌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스코프의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 '동화'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벤야민은 최초의 진정한 이야기꾼은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동화'의 이야기꾼일 것이라 말합니다. '좋은 조언이 잘 떠오르지 않았을 때는 동화는 언제나 조언을 해줄 줄 알았다. 어려운 처지에서 그리고 정작 조언이 필요했을 때 가장 가까이서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동화의 도움이었다.' 그리고 그는 옛날에 동화가 했던 가장 현명한 조언을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가르쳐 주고 있다고 덧붙여 놓았습니다. (발터 벤야민/반성완 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따라서 레스코프의 이야기와 그것을 읽고 아이들이 전해주는 감상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오히려 오늘날 어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셀리반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일찍 부모를 여의고 소년 시절을 칼라치 빵장수 집에서 보낸 셀리반은 말을 잘 듣는 착한 소년이었습니다. 빵집 주인은 셀리반이 성실하고 믿을 만하다며 많은 칭찬을 늘어놓았습니다. 실제로 셀리반은 작은 푼돈도 빼먹지 않고 전부 주인에게 줄 만큼 믿음직한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리카의 딸과 함께 마을을 떠난 이후 셀리반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악령과 어울리며, 심지어 벌써 오래 전에 여러 악령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다고 수근거렸습니다. 그가 귀족 아이들의 손가락을 하나씩 천천히 잘라 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하고,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유인해서 살해하고 재물을 훔치는 흉악한 강도라고 비난당하기도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이런 저런 동물이나 사물로 둔갑을 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힌다고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일상에서 겪는 크고 작은 불행의 원인이 모두 셀리반에게 있다고 그를 원망하고 저주했습니다. 셀리반은 왜 괴물이 되어야 했던 것일까요?

 

아이들과 실제 셀리반의 모습과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셀리반의 모습을 비교하게 한 뒤 마을 사람들이 셀리반을 괴물이라고 생각하게 된 원인을 함께 찾아 보았습니다. 어떤 아이는 셀리반의 얼굴에 있는 붉은 점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추측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신체적 차이가 그를 차별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지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다른 아이는 마을 사람들이 셀리반에 대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것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전달된 소문을 근거도 확인하지 않은 채 사실이라 믿고 비난부터 쏟아내기 일쑤인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부연설명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답변은 사람 사람들이 셀리반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만들어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괴물은 셀리반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 자신이야!

 

셀리반이 괴물로 둔갑하게 된 원인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크로미 마을 사람들이 보리카와 그 딸에게 했던 만행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 망나니로 일했던 보리카라는 사람은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태어난 열다섯 살쯤 되는 딸과 거주 등록을 하기 위해 크로미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크로미 사람들은 '모두들 정결한 사람인 양하며' 그들을 멸시하고 그들이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호소를 해도 외면했습니다. 가끔 그들에게 적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런 것'일 뿐이었습니다. 보리카 부녀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데리고 자던 비쩍 마른 개 한 마리를 '엄격한 도덕성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죽이고 말았습니다. 결국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보리카는 죽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가 흉물스런 삶을 살다가 참회도 하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정식으로 공동묘지에 묻지 않고 '뒤쪽'에 파묻어 버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죽은 아버지의 품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던 딸 아이의 사라진 행방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셀리반이 괴물로 취급받은 이유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자 그의 모든 것이 파렴치한 악당의 행동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유 구조입니다. 셀리반 얼굴의 붉은 점을 보고 사람들은 '악한 사람은 하느님이 점지해 놓는 법'이라는 속담을 언급하며 빵집 주인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또 그들이 보리카와 그 딸에게 아무렇지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불결'하고 자신들은 '정결'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이 돌을 집어 들어 죽이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가 나타나 '여기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다들 돌을 내려놓고 여인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왜 여인을 돌로 죽이려 했을까요? 여인이 '간음'이라는 치명적인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엄격한 율법과 강한 공동체 규약이 통용되던 시기에 간음한 여인은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의 말 한 마디에 다들 들었던 돌을 손에서 내려놓았던 것일까요? 아마도 신 앞에서 자신은 '죄 없는 자'라고 당당히 주장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예수가 그 말을 하기 전에는 여인을 죽이려 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은 '정결'하고 그 여인은 '불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 많은 여인을 정죄하는 행동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정결'을 확인하려 했고, 자신들은 '정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여인을 정죄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러한 그들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성찰하도록 한 것입니다.

 

타인의 죄를 정죄하고 사멸해야 자신의 '깨끗함'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선적 '믿음'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 했고, 보리카를 얼어 죽게 만들었고, 셀리반을 괴물로 만들었고, 결국에는 예수를 십자가 못 박았던 것입니다. '선량한' 농부들은 자신들의 '경건함'을 지키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태연하게 잔혹하고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 괴물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레스코프는 아이러니하게도 신부의 입을 통해 괴물은 셀리반이 아니라 바로 '경건한 농부들 자신'이었다고 적시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결여된 채 자신만의 정의를 타인들에게 관철시키려 할 때 그 역시 '괴물'이 되고 만다는 슬픈 진실을 오늘날에도 도처에서 발견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소년은 왜 셀리반의 편을 들지 못했을까?

 

'괴물 셀리반'을 읽다 보면 우리 사회가 정말 레스코프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 발전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순간들이 많습니다. 셀리반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소문들은 현대의 인터넷과 SNS를 떠도는 정보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릇된 신념 위에서 만들어진 거짓 정보가 '뉴스'라는 탈을 쓰고 사람들 속으로 침투해 그들의 확증편향된 신념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처럼 '소문'은 셀리반에 대한 거짓된 이야기를 '사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그럴 듯한 거짓이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통하는 '탈진실(Post-Truth)'의 세계에 살고 있던 것입니다.

 

이야기의 화자인 소년은 마을 사람들과 달리 꿈 속에서 셀리반을 '조용하고 선량하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꿈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결코 발설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숲속에서 버려진 자신과 어린 동생을 셀리반이 구해주었지만 소년은 그에게 감사하기는커녕 비난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년과 어린 동생을 숲에 버리고 돌아간 일행들이 그런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이 셀리반에게 있다고 힐난했기 때문입니다.

 

왜 소년은 공개적으로 셀리반의 편을 들지 못했던 것일까요? 만약 소년이 셀리반을 두둔하는 말을 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소년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이런 침묵이 셀리반과 같은 선량한 사람들을 보댜노이 도모 보이, 레쉬, 키키모라, 바바야가 같은 괴물들로 여전히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해자의 텍스트를 피해자의 텍스트로 바꿔쓰기

 

레스코프의 이 책은 마을 사람들이 셀리반을 박해한 기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사건을 셀리반의 시선에서 재구성한다면 이야기는 피해자의 텍스트로 탈바꿈됩니다. 아이들은 셀리반의 입장에서 그에게 일어났던 몇몇 사건을 다시 써 봄으로써 피해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눈보라가 치던 밤 숲에서 구두장이 이반이 셀리반과 조우했던 사건을 셀리반의 입장에서 다시 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 구두장이는 셀리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며 다다가서는 크고 뾰족한 송곳을 꺼내 냅다 셀리반의 배를 찌르고 달아났습니다. 다행히 셀리반이 이정표 푯말로 둔갑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푯말 깊숙이 박힌 송곳은 아무리 기를 써도 뺄 수가 었었습니다. 이 사건을 셀리반의 입장에서 재서술하면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황당함은 바로 구두장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었던 '믿음'이 지닌 황당함일 것입니다. 아이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면서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해야 할 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이런 윤리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마도 아이들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독서는 우리가 윤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도사린 '차가움'을 부수기 위해서 책을 꾸준히 읽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