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별 책읽기/3학년

방정환의 금시계

ddolappa72 2025. 2. 23. 18:11

 

실린곳 : 방정환, 만년샤쓰, 보물창고

 

옛날 동화는 요즘 동화와 무엇이 다른가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조어했고, 일제 강점기에 어린이의 인권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을 모르는 초등학생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린이들을 위해 수많은 외국 동화들을 번역하고, 직접 동화를 창작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는 읽을거리가 변변치 않던 시절 어린이 잡지 월간 <어린이>를 창간해서 이원수나 마해송 등 아동문학가들을 발굴해 척박한 한국 아동문학계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왕자와 제비'나 '잠자는 왕녀' 같은 외국 동화를 번안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기별 삼형제' 등의 동요를 직접 짓기도 하고, 추리소설인 '칠칠단의 비밀' 등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방정환의 동화를 읽는 것은 암울했던 시절 그가 어린이에 걸었던 기대와 희망이 무엇인지 상기해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쓴 동화 '금시계'를 읽어보면 요즘 읽게 되는 동화들과 다르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먼저 동화의 주인공 소년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 아아, 불쌍한 어린 신세 .... 그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난한 어머니가 품을 판 돈으로 시골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남의 집 종이 되어 심부름을 해 가면서 야학에라도 다녀 보겠다고 서울로 와서 며칠씩 굶어 가며 벌이터를 찾아다니다가 간신히 O대문밖에 있는 XX목장에 와서 낮에는 온종일 소 떼를 지켜 주고, 심부름 하고, 새벽에는 자전거를 타고 이 동리 저 동리 돌아다니면서 우유 먹는 집에 우유병을 돌리고 한 달에 겨우 심삼 원씩 받고 있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는 일제가 노골적으로 한반도 주민들을 착취하던 식민지 치하였고, 세계 대전과 경제 대공황이 전세계를 휩쓸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궁핍과 곤궁에 시달리는 어린 주인공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아마도 가난에 신음하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동화를 통해 위로받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작가가 등장인물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고전소설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즉, 이 동화의 서술자는 3인칭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작중 인물이 처한 상황를 안팎으로 속속들이 알고 있고, 본인의 주관적 판단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편집자적 논평을 가하고 있습니다. 예문에서 독자는 주인공이 놓인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기도 전에 서술자로부터 '불쌍한 어린 신세'라는 판단을 강요받게 됩니다. '말하기(telling)' 대신 '보여주기(showing)'을 주로 선택해서 독자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는 현대적인 소설 작법에 익숙한 독자로서는 촌스럽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나)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효남이는 가엾은 우리 효남이는 미칠 듯이 가고 싶어 하던 시골집으로, 병든 어머니와 나이 어린 누이동생이 울면서 기다리고 있는 시골집으로 급행열차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울면서 나오는 것을 보고 뒤쫓아 나오신 선생님의 주선으로 기찻삯을 얻어 가지고 우리 효남이는 지금 급행열차를 타고 시골집으로 닿고 있습니다. 아아! 이 급행열차가 닿을 때까지, 효남이가 자기 집에 갈 때까지 어머님의 병환이 더하지 않고 계시도록 다 같이 빌어 드립시다.

위 예문에서 서술자는 노골적으로 독자들을 호명하고 그들에게 등장인물의 행운을 빌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특히 위 예문에서 주목할 점은 화자가 마치 눈 앞에 독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하듯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효남이는 가엾은 우리 효남이는'과 같은 부분은 입말의 리듬감을 살리기 위한 것이고, '시골집으로 닿고 있습니다'처럼 현재화된 문장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공유하는 현장성과 일체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화 구연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방정환은 어린이들이 '읽게' 하기 위한 동화가 아니라 '들려주기' 위한 동화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당대에 유행한 무성영화에 변사들이 해설을 붙여 대중들을 울리고 웃겼듯이 방정환은 글을 읽지 못했던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그들이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동화를 썼던 것입니다.

 

방정환의 장편 추리동화 <북극성>을 원작으로 1978년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77단의 비밀>


왜 하필 금시계를 훔쳤을까

주인공 효남은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목장에서 일하며 우유 배달을 했습니다. 굉장히 특이한 설정인데 우리나라에서 우유의 소비는 일반적이지 않았고, 더우기 서울 주변에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서구인들을 따라잡기 위해 우유를 권장했고 그런 식습관이 식민지 시기에 한반도에 유입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몰려살던 충무로나 명동과 가까운 서울역 일대, 철도업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청량리 일대에 목장이 들어섰고, 이런 수요에 맞춰서 최초로 우유를 시판하기 위해 청량리 농유조합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효남의 목장주인은 바로 이 조합에 가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기사, [100년을 엿보다](2)우유)

또한 수득이가 목장주인에게서 하필 금시계를 훔쳐서 전당포에 팔아버린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왜 하필 금시계를 훔쳤을까요? 1876년 개항 이후 시계는 문명의 상징으로 수입돼 유통되었으나 사치품으로 인식되어 보급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910년대가 되어도 조선인들에게 시, 분, 초로 이루어진 근대적 시간은 여전히 익숙치 않은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다 1921년 조선총독부가 '시(時)의 기념일'을 제정하고 시간을 존중하는 선전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근대적 시간 관념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관공서, 철도역, 은행, 백화점, 학교 등 근대 건축물마다 시계가 부착되고, 시계탑, 전기 시계 등 표준시계도 곳곳에 설치되었습니다. 그 결과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시계 보급이 본격화되었습니다.(기사,  조선 종소리서 일제 사이렌으로… 시간은 어떻게 강제되었나) 

수득이가 훔친 금시계를 맡기고 돈을 빌린 전당포 역시 개항과 함께 조선에 도입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옷이나 비녀 등 여성들의 물건이 주로 담보로 잡혔고, 나중에는 토지나 건물까지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일제강점기 '질옥(質屋)’으로 불리고도 했던 전당포는 1920년대 이후 나날이 번창해 경성 시내에서 전당포업을 하는 사람은 1926년에 조선인 133명, 일본인 102명을 합쳐 235명에 달했고, 대출금액은 310만2330원 규모였습니다.(기사,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56> 전당포)

따라서 금시계를 중요한 소재로 선택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금시계는 당시에 단순히 값비싼 사치품일 뿐만 아니라 근대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효남이와 수득이가 일하는 목장, 그들이 배달하는 우유, 훔친 금시계, 금시계가 맡겨진 전당포, 효남이가 목장에서 쫓겨나 집으로 타고 가던 기차 등등 이 동화에는 근대를 상징하는 사물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효남이와 수득이는 이런 근대적 사물들과 제도를 '도둑질' 하지 않고는 마음껏 향유할 수 없다는데 그들의 비극과 슬픔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이 동화의 주동인물은 '효남(孝男)'이고 반동인물은 '수득(壽得)'입니다. 이름부터 그 인물의 됨됨이를 암시합니다. 즉 효남은 '효행과 선행을 실천하는 인물'이고, 수득은 '남에게서 이득을 얻어 목숨을 연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수득은 효남에게 누명을 씌워서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 했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효남이 수득이가 목장주인의 금시계를 훔쳤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목장안주인의 금반지를 자신의 서랍에 넣어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묻어두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오냐, 아무 말도 말자. 수득이 집 형편은 나보다 더 급하다 나보다도 더 불쌍하다!' 효남은 목장에서 쫓겨나며 마지막으로 수득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도 가난하지 않을 날이 있겠지. 가난한 탓밖에 무슨 탓이 있겠나 .... " 효남은 수득의 범죄가 그의 사악한 본성 때문이 아니라 집이 구차해서 발생한 일이라고 분석하고, 자신 역시 수득이 못지 않게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에도 그를 용서하고 끌어 안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효남이 누명을 쓰고 목장에서 쫓겨 났지만 그가 구제를 받을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사흘이나 갈 곳이 없어 굶주린 채 돌아다니던 효남은 야학교를 찾아 갔습니다. 그곳에서 수남은 야학 선생님의 도움으로 기찻값을 얻어서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목장 주인 내외도 울면서 자백하는 수득이의 말을 듣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장 주인은 야학 선생님한테서 효남의 주소를 알아내서는 즉시 효남을 찾아가서 사과를 하고, 효남이 식구를 서울로 데려와 효남이 어머니는 병원에, 효남이와 효순이는 학교에 입학시켜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동화의 결말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헛된 희망처럼 보입니다. 부자가 설령 자신이 부리던 급사 소년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 집안 전체를 돌보아주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작가가 이런 결말을 맺은 것은 이 동화를 읽는 가난한 소년소녀들이 자신의 처지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뚫고 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다른 한편 작가는 근대적 질서로부터 부당하게 배제되어 가난에 무방비로 노출된 조선의 청년들이 효남이처럼 이미 성숙한 정신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것을 호소하고 싶은 마음도 엿보입니다. 동화에서 근대적 문물인 학교를 담당한 교사로부터 효남의 성숙성이 발견되고 인정받음으로써 그의 구원 가능성이 열린 것이 그 근거입니다. 

따라서 이 동화는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게 된다는 식의 교훈을 주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닙니다. 방정환은 새롭게 도래한 근대적 질서와 그로부터 부당하게 배제된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을 직시하고 그들 간의 조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가 해결책으로 제시한 방법은 교육입니다. 효남은 낮의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야학을 포기하지 않았고, 효남과 효순이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한 일도 학교에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아야 새로운 근대적 사회 속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방정환의 계몽주의적 신념이 투영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