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방드르디'인가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허구적 인물도 아니면서 근대의 '신화적 인물'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세의 떠돌이 마술사에서 근대인의 대표가 된 '파우스트', 기사도 소설의 '팬'에서 편력기사로 거듭난 '돈키호테', 현재의 쾌락을 위해 종교나 사회규범도 무시했던 에고이스트 돈 후안, 그리고 무인도조차 경영의 대상으로 삼았던 '호모 에코노미쿠스' 로빈슨 크루소가 그런 예들입니다. 영문학자 이언 와트는 이런 인물 유형들이 '반르네상스' 또는 '반종교개혁'이라 불리는 시기에 출현한 것은 반동적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개인주의'가 등장한 것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 모두 '자아 대 세상'이라는 태도에 입각해서 행동하며, 공동체적 가치와 규범에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것입니다.(이언 와트/강유나, 이시연 번역, 근대 개인주의 신화, 문학동네)
이 네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고전으로 '정전화'되었고, 이들은 서양의 근대적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본 모델을 제공했기 때문에 '신화화'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인도에 홀로 남은 고독한 개인'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로빈슨 크루소는 기독교 윤리로 무장한 근대적 경제 주체의 전형을 탁월하게 형상화했기 때문에 신화적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 윤리가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것을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가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인물들이 특권화하고 있는 서양의 근대가 '빛'과 '어둠'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인류가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과거의 미신과 불합리를 타파하고, 지상 낙원을 향해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이 관철되던 시대였습니다. 동시에 이 시대는 서양인들이 우월한 물질 문명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같은 비서구적 문명들을 야만이라 멸시하고, 문명화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착취하고 식민지화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는 합리성과 자율성을 무기로 섬을 개척하는 뛰어난 모험가이기도 하지만, 흑인 청년을 하인으로 삼고 기독교 세례를 베푸는 인종차별자이자 서구우월주의의 전형이기도 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 밀림 내류지역의 원주민 부족을 연구한 뒤 이들이 미개한 사회가 아니라 '우리들과 다른 사회'일 뿐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합니다. 그는 서구 사회가 자신들이 만든 기준을 다른 세계에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폭력일 뿐이며 "야만인은, 야만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자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클로드 레비스트로스/박옥줄 번역, 슬픈 열대, 한길사)
레비스트로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미셸 투르니에가 대니얼 디포의 소설을 다시 쓴 것이 <방드르디, 야생의 삶>입니다. 디포의 소설에서 주인공 로빈슨은 흑인 원주민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이전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로빈슨은 명명 행위를 통해 프라이데이와 주종 관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와 달리 투르니에가 영어 '프라이데이'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방드르디'를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전복시켜서 선배의 작품을 다시 쓰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입니다. 따라서 투르니에가 디포의 소설을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고쳐 쓰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이 소설 읽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빈슨은 왜 그토록 열심히 일을 했을까?
이 소설에서 '섬'은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일까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처럼 이상적인 공간일까요? 아니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사막처럼 '고독한 공간'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우선 투르니에는 디포의 전통을 따라 '야만'의 상징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홀로 남은 로빈슨은 섬을 '야상의 땅'이자 자신에게 '적대적인 공간'으로 여기고 그것을 문명화된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가 멈추지 않고 섬을 정비하고 개척했지만 날이 갈수록 일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많은 노동을 해야만 했고, 이런 작업과 의무에 진저리를 냈습니다. 그래서 종종 맷돼지들의 진흙탕 속을 뒹굴며 환각 상태에 빠져들거나 엄마의 자궁 같은 동굴 깊숙이 기어들어가 몇 날 며칠을 지내곤 했습니다. 그는 수시로 빠져드는 퇴행을 막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책을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로빈슨의 노동은 한 마디로 근대 유럽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몸부림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줄 수 있는 타인이 부재한 무인도에서 그는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해시계와 달력까지 만들어서 유럽적 시간 속에 자신을 편입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노동 개념은 삶의 재생산을 위한 여가와 휴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배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노동에 매달릴수록 그의 삶은 황폐해지고, 심지어 환각과 환상으로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투르니에의 '섬'은 근대 유럽의 자본화된 노동을 성찰해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로빈슨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데, 그를 통해 '시간은 돈이다'라는 맹목적 믿음을 전파한 근대적 노동의 한계와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습니다. 생산된 물건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타인'이 배제된 노동, '여가'를 게으름으로 죄악시하는 노동은 결국 노동하는 사람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방드르디에게서 배운 새로운 삶
로빈슨은 죽을 위기에 처한 인디언 청년을 구출해주고 그에게 '방드르디'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의 하인으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방드르디의 실수로 로빈슨이 동굴에 모아둔 모든 생산물과 침몰한 배에서 구해온 물품들이 화약 폭발로 파괴되면서 이들의 관계가 뒤바뀌게 됩니다. 로빈슨이 주인 행세를 할 수 있게 해주던 물건들이 사라지자 그는 방드르디에게서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로빈슨은 영국식 요리 대신 아라우칸족의 요리를 먹게 되고, 하얀 피부는 점차 방드르디의 것처럼 단단한 구리빛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들의 뒤바뀐 관계를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은 가짜 인형 놀이입니다. 로빈슨에게 화가 난 방드르디는 머리는 야자열매로, 팔과 다리는 대나무 줄기로 만든 인형에다 로빈슨의 낡은 제복을 입혀서 끌고 왔습니다. 그는 마네킹을 로빈슨 앞에 세운 다음 "스페란차 섬의 총독인 로빈슨을 소개하지."하고 말한 다음 조개껍데기를 집어들고 고함을 치면서 야자열매에 대고 문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하는 이 이상한 연극의 교훈을 이해하고 그를 껴안아주었습니다.
이 연극에서 인형은 과거 주인 행세를 하던 로빈슨입니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에게 직접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그를 닮은 인형에 폭력을 가하면서 노예 생활을 하던 과거의 우울한 추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로빈슨 역시 방드르디의 연극을 보면서 가혹한 주인이었던 과거의 잘못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빈슨도 방드르디에게 화가 나면 바닷가로 달려가 모래로 방드르디를 만들어놓고 등짝과 볼기짝을 후려치며 속상한 마음을 풀었습니다. 그런 다음 진짜 방드르디에게는 오직 친절만을 베풀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역할극을 통해 그들은 서로의 역할을 바꿔 봄으로써 상대에 대한 이해를 넓혀갈 수 있었고,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점차 서로 평등한 친구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에서 프라이데이는 서구의 방식으로 문명화시켜야 할 야만인이었다면, 투르니에의 방드르디는 로빈슨이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친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방드르디는 로빈슨을 노동과 유희가 구분되지 않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는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을 겪고 마침내 염소들의 왕 앙도아르를 사냥합니다. 고집세고 오만한 늙은 숫양 앙도아르는 로빈슨의 분신입니다. 방드르디는 양의 가죽으로 연을 만들어 하늘에 날리고, 양의 뼈로 아이올로스 하프를 만들어 바람결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이제 방드르디는 로빈슨이 교육시켜야 할 야만인이 아니며, 로빈슨이 스페란차라고 이름붙인 섬도 개척해야 할 황무지가 아니며, 로빈슨 또한 자본의 축적에 몰두하던 식민지 통치자가 더 이상 아니게 됩니다. 로빈슨이 방드르디를 자신과 동등한 타자로 인정하게 되면서 그는 기쁨과 유희로 충만한 삶에 눈 뜨게 됩니다.

문명과 야만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마라톤 전쟁에서 페르시아인들의 말소리를 듣고 이해할 수 없자 그들의 말소리를 흉내내서 그들을 '바르바로스(barbaros)'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영어로 '야만인'을 뜻하는 'barbarian'의 어원이 바로 그리스어 '바르바로스'입니다. 즉 그리스인들이 이해할 수 없어 소통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야만인'인 셈입니다. 언어의 소통 가능성을 동일하게 적용시킨다면, 페르시아인들 입장에서 그리스인들 역시 '야만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것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중화(中華)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바깥에 거주하는 이민족들을 각각 각각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고, 이들을 오랑캐라 칭했습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공유했던 우리 선조들은 중국을 따라 이들을 오랑캐라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입장에서 오랑캐에 불과했던 우리가 다른 민족들을 오랑캐라 멸시한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중국의 역사를 '한족'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19세기 이후 영국이나 일본 등 열강에 의해 중화적 세계관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만들어진 피해의식의 산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역사는 유목사회(오랑캐)와 농경사회(중화제국)가 끊임없이 서로 교섭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고 확장되어온 것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양하이잉/우상규 번역, 오랑캐-주변국 지식인이 쓴 反중국역사, 살림)
(가) 방드르디는 구더기를 조개껍데기에 담았다. 그리고 자기 입에 털어 넣더니 씹고 또 씹었다. 마침내 그는 진하고 하얀 즙을 독수리의 부리 속으로 흘러 넣었다. "살아 있는 벌레는 너무 싱싱해요. 이 새는 병들었거든요. 그러니 씹고 씹어야 돼요. 새끼 새를 위해서는 씹고 또 씹어야 돼요."
(나) 기다리는 동안 그들을 살펴보면서, 헌터 선장과 부선장 조지프 그리고 주변에서 분주히 일하고 있는 모든 선원들이 그에게는 더럽고 거칠며 난폭하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 거기서 한 선원이 금화 두 개를 발견했다. 그는 즉시 큰 소리로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한바탕 격렬하게 실랑이를 벌인 끝에 금화를 쉽게 찾기 위하여 초원 전체에 불을 지르기로 결정했다. 로빈슨은 금화가 자기 것이고, 불이 나면 짐승들이 섬에서 가장 좋은 풀밭을 잃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로운 금화가 발견될 때마다 단도나 긴 칼을 휘두르는 참혹한 싸움이 벌어졌다.
(중략) 부선장은 미국 남부의 목화 농장에 노동력으로 제공되는 흑인 노예 매매에 대해 열광적으로 설명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특별한 배에 짐짝처럼 빽빽이 실려 수송된 후 미국으로 팔려나가고, 그 대신 돌아가는 배에는 목화, 설탕, 커피, 쪽빛 염료 등이 실린다. 이 물건들은 유럽의 여러 항구를 지나며 쉽게 팔 수 있으므로 배에 싣고 돌아가기에 가장 이상적인 화물이라고 했다.
새끼 새를 살리기 위해 구더기를 입에 넣고 꼭꼭 씹는 행위와 몇 푼의 금화를 위해 초원 전체를 불태우고 흑인을 노예로 거래하는 행위 중 어느 것이 더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리고 우리는 서구권에서 온 백인들과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유색인들을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나요? 혹시 우리 안에도 자의적으로 설정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있지는 않나요?
로빈슨의 섬에 '화이트버드호'가 들르게 되고 그는 다시 문명 세계로 되돌아갈 기회를 얻게 되지만 결국 섬에 남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문명 세계의 야만성에 진저리쳤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섬에서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점은 그 대신 호기심 많은 방드르디가 성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섬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영국으로 간 방드르디는 과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국이 전세계로 확장하던 당시 방드르디는 영국에서 무엇을 보았고, 또 어떤 일을 겪게 되었을지 무척이나 궁금해집니다.
투르니에의 소설은 디포의 원작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라 할 수 있습니다. 원작에 대한 존경과 비꼼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패러디는 단순히 원작의 주제나 구성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을 새롭게 읽을 수 있게 하고, 원작에 없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제시할 때, 독창적인 작업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방드르디>는 성공적인 패러디라 할 수 있습니다. 디포의 소설이 지닌 문제점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신화화된 '로빈슨'을 탈신화화해서 우리 시대에 걸맞는 인물로 재탄생시켰기 때문입니다. 투르니에의 소설을 읽고 원작에 도전해 보는 것도 원작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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